합심하여 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0. 합심하여 구하라) / 본문 : 마 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롬 8:5).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해서 일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일 것입니다. 돈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의 사람에게 주어지면 영을 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돈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주고 나면 더 많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과 사랑의 차이입니다.’(템플턴)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잘 마치는가 싶었는데 그만 아멘을 해야 하는데 대신 “아다리”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건강하다는 말과 기운이 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욥 33:4, 요삼 1:2).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때도 있고 쇠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할 때는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힘이 있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쇠하면 간단하고 쉬운 일에도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일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이럴 때는 내 영혼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육신이나 영혼이나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하여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쉬기만 한다고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회복을 위하여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도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날로 새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도 합심기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하는 방법이요 새로운 능력을 받는 비결인데,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할 때 개인기도만을 생각하기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앞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 또한 육신에 속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심 기도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합심기도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의 관심사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 교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모여 가지고 부담을 가지냐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다면 합심하여 기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한다고 할 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기도하지만 개인의 일도 얼마든지 합심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옥문을 열렸고 자유롭게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함심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살기 좋아지면서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약 먹지말고, 병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못살 때는 약 사먹고 병원가지 어려우니까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일을 기도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식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배아프면 약 사러가기 전에, 병원 가지전에 배에 손을 얹고 기도주세요.

제가 알게된 한 집사님이 계신데 이분은 서울 강남의 모 교회에 다니십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7년여 동안 전도하여 50-70명을 그 교회에 인도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올 초에 교회에서 결정하기를 집사님은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손 떼세요? 그랬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현지 목사를 데려오고 국내 책임자로는 모 신학교 여 교수님을 임명해서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그분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집사님 말씀으로는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밀려났다는 겁니다. 다른 여러 말로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꾸준히 봉사하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일전 전화를 했더니 간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더라구요. 어찌된 것이냐고 하니까 필리핀 여성이 아이를 낳는데 돌봐줄 사람도 없고 병원에서는 150만원이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 집사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가서 아이를 데려와 돌봐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병원비는 보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150만원 정도 불렀는데 보험이 없어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이런 일을 기도하며 해결하고 다니셨는데 교회에서 이 일을 알아 가지고 집사님을 불러서 손떼시라고 했는데 왜 자꾸 관여 하냐고 해서 참다못해 한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훌륭한 시스템과 최상의 학력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합심”이란 말의 헬라어는 “쉼프호네오”(sumfwnevw)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조화되다. 규정하다, 일치하다, 합심하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쉽프호노스”(suvmfwno”)로 “함께 소리내는, 일치된, 조화된”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쉽프호노스”는 “쉰”(suvn)이라는 “교재, 함께, 도움, 동참”이라는 단어와 “프호네”(fwnh)는 “말, 목소리”를 말하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오늘 본문의 “합심” 바로 헬라어 ‘쉽프호네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어 보세요.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그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큰 악기, 작은 악기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 동원된 악기의 종류들이 다 다르지만, 훌륭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쉼프호네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 알만으로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얼마나 진실하시겠습니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의 역할 중에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 역시 단순히 사람 사귀어서 인맥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제의 역할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하나되지 못한다면 교재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바로 서로를 엮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가 발사됐는데, 그만 예상치 못한 고장이 났습니다. 우주선에 탄 우주 조종사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당시로서 0.001%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가 나가게 되니까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던 닉슨이 텔레비전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날을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관공서마다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고,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국민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무사귀환의 확률 0.001%의 희박한 상황이었지만, 3일 후에 그들은 기적처럼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너무너무 기뻐서 국민들에게, “이번 주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나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우주 기지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이 발사한 후에는, 항상 합심 기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금만 뭘 하려고만 하면 돼지 머리에다 절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전에 모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다놓고 돼지머리 상 차려 가지고 절을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한국에 아직도 이렇게 미개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까?”라고 했답니다.

이 나라에 우상이 사라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PC통신이 처음 생기고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한 통신사가 초기화면에 ‘오늘의 운세’라는 메뉴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초기 화면에 올려주지 않으면서 ‘오늘의 운세’를 올리다니 이것이 한국의 정보화입니까? 실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운다고 하더니 몇 일 사라지더니 다시 슬그머니 올리더라구요.

올해는 특히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던 대부흥운동(1907.1.2)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 받은지(1907.9.17)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도 합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6.25사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미군 소대장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정찰하러 나가지 않겠나?” 그 병사는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은 그 병사가 겁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되어서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소대장님, 지금 정찰하러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진 소대장은 아끼는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지금은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대답하기를 “소대장님, 바로 이 시간이 어머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원하는 형제, 자매들로 인해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성도들의 승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도해준 사람들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승리는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기도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절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합심의 최소 단위는 두 사람입니다. 사람만 많이 모였다고 합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열 제자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모였을 때에 홀연히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셨으며 500여명이 성도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냥 사람 많은 길거리나 시장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처음 성령이 내렸던 것도 마가의 집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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