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예술(藝術)이라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1.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 본문 :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 11일입니다.
빼빼로데이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과 함께 상업적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농림부에서는 이런 국적 없는 기념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로 하자고 합니다.
세계 교회는 해마다 11월 둘째 주일을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1일인 바로 오늘입니다. 세계의 수백만의 기독교인과 수천 곳의 교회에서 일제히 박해 아래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빼빼로데이는 알면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안타깝습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는 곳은 이슬람권과 공산권일 것입니다.
압둘(가명)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역시 이슬람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성 이슬람 신자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이슬람에서 배운 것은 증오였다. 알라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라고 늘 배웠다. 그러나 내가 얼마 전 만난 두 가정은 나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일찍이 이슬람 사회에서 이웃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후 나는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책 한 권을 주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사람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수께로 달려갔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원망과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예술(藝術)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 작품을 말합니다. 순수 예술과 교양 예술로 나뉘고, 어떤 사물이 우수하거나 아름답게 생겼을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는 예술이야”, “오늘 설교 제목 예술이야!”, “당신의 말은 예술이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인’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닮을 쌓을 때 큰돌을 쌓는데 큰돌로만은 닮을 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큰 돌 틈으로 작은 돌을 넣어야 큰돌이 중심을 잡고 닮을 잘 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예술 아닙니까?

예술 중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체예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과정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때는 해프닝, 이벤트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포퍼먼스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하게 될 애굽과 구스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사 20:2-3) 이사야의 벗은 몸과 발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마치시지 않았습니다. 우주 최대의 포퍼먼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삶을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제일 아름다움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룩”(aJgiavzw:하기아조)은 성별(consecration)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리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죄와 분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들을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했습니다(렘 1:5).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출 28:41).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아름다움은 추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 진리”(17절)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진리와 구별하기 위함인데요 즉 앞에 나온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뒤에 나오는 것은 “참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삶을 가리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또한 이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또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었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순간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성도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 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를 영접한 뒤 얼마 동안 한 산으로 기도를 많이 갔었습니다. 기도원에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산기도 초보자들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었는데 사람들 이발도 해주고 기도도 도와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여전히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인가? 나가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40일 금식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도원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실려고 그렇게 기도만 시키시는지…”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앙 인들은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세상의 일을 해야 하는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 일을 주시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인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광야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복도, 음식도, 행동도, 요구도.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을 가지고 의견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랍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요셉입니다.” 랍비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아버지는 말 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말 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어느 일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침례교인이 침례 받으러 물 속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랍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그것이 무엇이오?’
성도 ‘돈지갑입니다.’
목사 ‘돈지갑을 넣은 채로 침례 받으십시오. 바로 그 돈지갑이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걸작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걸작이 바로 거룩한 삶 아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거룩한 습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든 크리스천은 ‘순종학교’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8-9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기보다도 내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올래요! 하나님께 엄포를 놓고 공갈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항상 부인하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삶인 것입니다(고전 9:27).

2차 대전 때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서 큰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한 쪽 팔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히려 의사선생을 향해 ‘선생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병사의 눈은 슬픔에 잠긴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없어진 한 팔에 대해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삶은 한번만 무대에 올려집니다.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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