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2. 하나님께 영광을) / 본문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미국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에 오래 전에 이민가신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네 아들을 하나같이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교회와 이웃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29살에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당시 남편은 숨을 거두면서 권사님을 불렀습니다.”여보,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미안하지만 이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오. 우리 네 아들을 꼭 책임지고 키워주오” 권사님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약속할게요”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전도사님이 그러는데 요즘은 LA 길거리에서 한국인 거지를 가끔 본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꿈을 안고 미국을 왔을 텐데…” 하면서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답니다. 미국 땅에 아들 넷을 남겨놓고 떠나는 남편의 약속에 대답은 했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권사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이 믿음밖에 없는 젊은 과부는 갖은 고생을 하며 어린 네 아들을 키웠습니다. 공부를 특별나게 더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밥상에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주님,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했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주님, 오늘은 금식하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아들 넷을 키웠습니다. 양식이 있건 없건 감사를 드리면서 아들을 키운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들을 돌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려 사람은 바위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초기정착, 독립운동지원, 강제이주, 구 소련의 해체 후 다시 시작되는 방랑의 길, 험난했던 고려인 이주 140년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좀 강해져야 합니다. 경제적인 부만 쌓여간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감사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고 했습니다.
시 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게 되면 행복이고 나쁘게 되면 불행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며(롬8:28), 부해도 가난해도 자족할 줄 아는(빌4:11)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문둥병자가 되었으니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면 뭐하고 사마리인이면 뭐합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만날 수도 없으며,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문둥병이 심하면 소리지르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문둥병환자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병에서 깨끗해져라”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주님은 그 다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물으십니다. 창세기 3:9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던 말씀과 똑 같은 뜻으로,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이탈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은 당연히 예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 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 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목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고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전부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인가?, 불평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가 결정해야 됩니다. 불평은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낳게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를 잘 하느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얼굴을 보면 압니다.
우리는 당연히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근이지요, 당근은 속어로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아기오이가 엄마오이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오이 맞아?” 하니까 엄마 오이가 웃으면서 “당근이지” 그랬습니다. 이 말은 당연하지 하는 말인데, 아기오이가 오해를 하여 “어머나 나는 오이가 아니고 당근이구나” 하고 가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행복도 만족도 감사도 없습니다.
비싼 개와 싼 개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비싼 개는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비싼 개는요, 아무리 굶어도요 아무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먹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먹어’ 해야 먹습니다. 그러나 똥개는 아무거나 먹습니다. 주인이 말하든지 말든지 제 맘대로 합니다. 개도 그렇지만 말도 그렇다고 합니다. 중동에 가면은 말을 많이 타는데, 비싼 말은 수십 억 원도 넘는다고 합니다. 비싼 말과 싼 말의 차이도 같습니다 비싼 말은 수십 킬로를 달려와도 주인이 ‘물먹어’ 해야 먹는다는 것입니다. 싼 말은 막 먹는 것이지요, 고깃덩어리 값밖에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인생의 값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1. 감사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고 하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즉 돌아와서 나에게 감사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으로 되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속성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것이 강제로 됩니까?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2. 감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첫째, 15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로” 했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말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들은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했습니다. 고쳐달라고 할 때는 문둥병이 들려있는 상태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고침을 받은 후에는 침묵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eujcaristw’n:유카리스테오, 깊은 환희와 기쁨속에서 나오는 감사)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한 고드란트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은 것(막 12:42-43)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마라아인인 이 사람이 문둥병자로서 병고침을 얻었지만 주님께 드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죄송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례였습니다.

3. 감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란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 축복들이 어디서 왔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 감사는 믿음이었고 구원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와 절하고 감사의 표현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유대인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구원을 받게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욥이 고백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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