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3.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 본문 :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각 은하마다 1,000억 개가 넘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太陽系) 은하수(銀河水) 성운(星雲)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크고 기묘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이 신비롭게도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며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수소(水素) 가스와 헬륨 가스(He gas)를 발생시키는 “빅뱅(Big Bang)”으로 폭발하여 오늘날 현재의 우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마치 보석가게가 폭발하여 정확한 시간을 맞춰 주는 고급 시계를 만들어 냈다는 우스운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고 발전했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 될 수록 천지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인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지구의 돌아가는 속도의 정상화입니다. 즉 지구는 시간당 1,600km로 돌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만약에 한 시간당
160km로 돈다면 사람들은 낮에는 타 죽고 밤에는 얼어죽을 것입니다.
2.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리가 신비스럽게도 아주 알밪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지구가 23.5도(度)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4계절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지구가 수평이라면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게
되어 대양(大洋) 증발(蒸發) 수증기(水蒸氣)로 남북은 어름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4. 지구와 달이 80,000km의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하루에 두 번씩 물에 잠기는 일이 없습니다.
5. 지구의 두께가 3m만 더 두꺼웠다면 산소(酸素)가 없어 모든 동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6.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았더라면 지구는 별똥들에 의해서 날마다 불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7. 연어의 경로입니다. 연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강물로 올라갑니다.
8. 장어의 행로입니다. 장어가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죽으면 새끼들은 다시 호수나 강으로 돌아옵니다.
9. 호주의 선인장이 빠른 속도로 번식되는 것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인장만 갉아먹고 사는 곤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폐를 가지고 있으며 곤충은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성장을 억제시킵니다. 만약 곤충이 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만큼 성장할텐데 다행스럽게 곤충은 더 성장할 수 없는 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사실은, 어떤 영적 사실의 상징이다.”(R.W. Emerson)라고 했습니다.
아마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신비스런 아직까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설교 계속하면 남자들은 계속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 분들은 따분해 하십니다. 벌써 졸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이라고 해야 고작 10퍼센트.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차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대문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때 거리 양쪽 모든 집의 현관문이 일제히 열리고 동네사람들이 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절망했던 환자는 ‘나는 사랑 받고 있어.’ 하는 생각에 가슴 가득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으로 준비하신 축복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이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라고 하시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창조와 신비

첫 번째 창조가 우주적 창조였다면 두 번째 창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8)
사람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만일 그것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면 그 가진 것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돌을 맞이한 준혁이와 하민이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위로부터란 뜻도 있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유대인)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8) 왜 그렇게 하나님이 율법을 강조하시고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살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렇게 언약하시고 이 백성이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며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때 다윗을 통해서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듯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분열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B.C 931~586:19대 왕조:345년)와 북 이스라엘(B.C 931~721:20대 왕조:210년)로 나누시고 혹시나 하시는 마음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떠난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의 제일 악한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제위기간이 2년을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집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하들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파리의 신)에게 자기 병을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보냅니다. 도중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는 누운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하반절)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점보는 집에 가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오세요.
이사야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많은 재산과 축복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비는 모습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붑에게, 이집트에게 빌붙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치졸하게 돈을 바라고 세상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치욕스럽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로 포로 70년을 지내게 되고 이후에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시고 구약시대를 마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마지막성경 말라기가 기록되고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약 400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 말씀처럼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다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위로부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오시는”(ejrcovmeno”:에르코멘스)는 어근 “e[rcomai:에르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나타나다 이전에 “동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절대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예수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은 이 땅의 사람과 다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인의 모습이 아닌, 능력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심

본문에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나니” 두 번 만물 위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물의 내용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을 우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태형 90대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90대가 200대가 되고 징역 6개월이 늘어났습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당했던 변호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법정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자와 노인과 약자의 편입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볕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주인과 하인이 길을 가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뜻밖의 횡재를 한 주인은 신이 나서 하인에게 당장 그 상자를 가져다 자기 집의 창고에 넣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하인에게 뜨거운 여름날에 상자의 무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상자를 발견한 주인이 하인에게 ‘자네의 집으로 가져가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인에게 그 상자는 무겁겠습니까? 실제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하인의 어깨에 눌리는 무게 감은 가벼운 새털 같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가? 신나고 가볍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금 상자를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신앙생활이 달라지며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말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만 결코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을 위해서만 우리보고 존재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들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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