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4. 기다림) / 본문 :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소녀가 편지겉봉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주소도 없이 보낸 그 편지는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역사는 처칠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바다를 넘고 우뚝 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랜돌프는 아내에게 “아들이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니 군인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들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제니는 워낙 바람기가 많은 여자여서 아이들의 양육을 유모와 하인에게 맡겨 버린 채,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자, 기숙학교에 보낸 뒤 돈을 보내 주고 가끔씩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의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고 게다가 고집이 셌기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교사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나빠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고 아버지로부터 “전혀 쓸모 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들은 후에 하는 수 없이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 간 과외 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으며 세 번째 시험을 준비했답니다.
그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는데,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와 기적적으로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든 살이 넘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늘 지긋지긋한 빚 독촉과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열 세 살 때부터 폐렴을 앓았고 심장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였습니다. 수상직에서 물러나 모교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 그는 학생을 행해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라고 말하며 연단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실 오실 때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강절에는 네 개의 촛대를 준비하여 한 주에 하나씩 켜나가서 성탄절 주일에 마지막으로 제일 큰 촛대의 불을 켜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이 오기 전, 4주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을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부터입니다. 처음에는 6주간을 대강절로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결혼을 금지하였고, 사제들은 매일 금식을 하도록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날 대강절은 11월 30일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첫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예비해야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첫 번째로 “기다림”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는 기다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결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같이 교회에 나오기로 했던 전도한 분이 안나오면 예배시간 내내 그분을 기다립니다.
자녀가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은 애타게 기다립니다.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잘 살게되어 기다림에 대한 갈망이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북한에 사는 사람보다 갈망이 상대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40)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로마는 각 지역마다 총독을 통하여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대다수 서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대지주들에게 노동력과 생산물을 착취당하게 됩니다. 또한 바리새인 같은 종교 엘리트들에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성전에 한번 들어가기 위해서도 세금을 내야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소작인이 되거나,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워 노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옛날 다윗 왕 시대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다윗 왕의 혈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이 비참하고 비굴한 삶에서 건져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내면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을 화려한 왕통으로 소개하는 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낙타 털로 짠 볼품 없는 옷)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축 늘어진 옷이니까 허리띠를 해야 겠지요), “메뚜기와 석청(들 꿀)을 먹더라” 그랬습니다. 단순,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을 하다가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곧 그가 메시아 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등장하기 전에도 스스로 메시아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사이에는 약 400년 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동안에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 졌고, 가짜 예언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세례 요한이 등장했는데, 요한은 말하길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이것을 볼 때 세례요한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강절 기간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되,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대강절이 안고 있는 의미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 보다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때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법이 없습니다. 방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먼지를 닦고, 거실을 정갈하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손님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해 놓고, 동네 어귀까지 마중을 나가서 손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네 삶이 이럴진대 하물며 구세주를 맞이하는 이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히브리어의 산성이란 단어는 ‘미스가브’(misgab)입니다. 이 단어는 높다, 안전하다는 뜻인 ‘사가브’(sagab)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masada)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높은 산성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최후까지 로마에 항거했습니다. 이 마사다도 ‘미스가브’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환난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울 때 계획했고 안정된 시기에 축성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겨울에 땔감을 사는데 쓰지 않으면 안될 돈을 여름에 놀며 쓰지 말라”, 잠언 6: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니니라”고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닥칠 가장 어려울 때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준비되었다는 것은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일을 추진하는 시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일의 성과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오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내일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해야 할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은 바로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 깨어있어 홀연히 임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한다는 것이 잘 안됩니다. 스스로하면 죄를 지을 확률이 많아집니다. ‘법 없이도 산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제 우리에게 총 들고 강제로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막는 일이 있지만 복음을 믿으라고 강제로 시키는 나라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해야합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지켜 내야하고, 우리 가족을 지켜 내야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누가 시키면 잘 안 합니다. 그래서 ‘하던 일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눌러서 강제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교육을 많이 받은 민족도 드뭅니다. 그러나 정말 공부를 잘하고 바른 사람으로 교육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은 하고 싶어서 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강제로 시켜서 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5-36)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 5:30절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5절에서는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7장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라”이라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능력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실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주님과 동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스스로란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3. 뒤돌아보지 말고 미혹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막 13:5-6)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1-32)
본문에 보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뒤돌아보는 것은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는 이 세상에 많은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지나친 욕심이 있으면 미혹 당하기가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 못할 집단을 만납니다. 바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제사장 그룹입니다. 제사장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로마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라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제사장)들은 성전 세를 받아 챙기니 얼마나 좋습니까? “마음이 둔하여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해하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뒤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눌러 앉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 많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 생길지 모릅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 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 분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 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 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만 믿으면 되겠군요.” 노 교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 때 영광 중에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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