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아닌 꽃씨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7. 꽃이 아닌 꽃씨를) / 본문 : 행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열두 명의 장정들이 부모를 버리고 하던 일도 모두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으며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의 신앙은 자랑했지만 자기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어 예수님을 쫓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부모의 장래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쫓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일생을 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씨는 생각하지 않고 꽃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 속에 예수를 따라 다닌지 3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심은 잘 얻으시고도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모함과 고발로 로마인의 재판자리에 섰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가면서까지 예수를 풀어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는 끝이 났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다시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처럼 함께 계시지도 않고 가끔 보여주시고(11번) 확인만 시켜준 상태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어느덧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승천하신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이건 또 웬 일인가 싶어 제자들은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감람산 현장에서 예수님의 옷소매에 매달려 그냥 가실 수 없다고 애절하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 단 한번만 저 로마를 향해 입김 한번만 불면 불바다가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은 못 가십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쪽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다스리다가 다음에 바사(페르시아제국), 헬라에 이어 지금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700년 간의 나라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제자들은 오늘 승천하시기 전에 결판을 내자고 하는데 예수님은 매정스럽게 느긋하신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십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시는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선순위 첫 번째가 무엇인지 정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더 땡 깡을 부려 받자 소용없습니다. 워낙에 단호하신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전대도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훈련시킨 적이 있습니다. 돈 한푼 없는 제자들이니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 정도는 하셔야 했습니다. “배 삯은 염려 말아라. 얼마 전 내가 병 고쳐 준 자에게 배 삯을 부탁해 보겠다.” 한다던가 “여전도 회장 막달라 마리아가 마련해 줄 것이다” 하든지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무 조치도 없으시고 그냥 “가라!”고만 하십니다. 대책이 없으신 분입니다. 3년 간이나 12명, 70명, 5천 명, 수만 명 떼지어 다니면서도 교단 이름하나 지어 놓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오직 단 한가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ajlla;:알라)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인데, 헬라어의 이 말은 “a[llo”:알로스”의 중성 복수형에서 왔습니다. 알로스는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물질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1983년 전주안디옥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재정의 60%이상(실제로는 70%사용)을 선교비로 지출하며 2007년 현재 바울선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 87개국에 37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2007년 9월 현재). 이렇게 많은 사역과 세계교회에 찾기 어려운 모범적으로 선교를 실천한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동휘 목사님은 “돌이켜 보면 나는 실패했다. 나는 내 교회를 믿었고 이 교회의 헌금을 의지했다. 하나님께 직접 구하기보다는 바쳐진 헌금에 울고 웃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방법을 수없이 놓쳤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주안디옥교회 만큼 절약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접대비 명목으로 된 지출이 없다보니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성도님들이 사온 음료수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목사님께서 박카스를 오신 장로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장로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에 목사님이 집회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을 소개하시면서 전주안디옥교회는 박카스도 반병씩 아껴서 먹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실수하신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 지시면서 그만 하셨으면 하셨지만 장로님은 자랑스럽게 계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계속 물만 마실 수 없으시니까 박카스 반병을 마시고 옆에 놓아둔 것을 그만 실수로 장로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한 다발의 화환과 한 봉지의 꽃씨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주인들의 요구에 양보했더라면 그는 화환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화환보다는 울부짖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어렵고 힘든 싸움이 일어났지만 먼 훗날을 위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선교의 대책은 오직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과 다르게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을 정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 나가는 일로 간주하셨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그의 에너지를 창조와 복구에 사용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죄는 왜 하게 됩니까? 원한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찾기에 원한에 싸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한이 창조와 회복이 아닌 정죄와 파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알고 보면 불쌍한 민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정죄는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눅 19:22)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요 5:45)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하고(20장까지) 21장을 마치 ‘추신’처럼 기록했습니다. 다 기록을 하고 나니까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누구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기록은 있는데 그가 예수께 돌아와 회복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 모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1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세 번 같은 말이 이어지고(요 21:15-17) 베드로의 요한에 대한 엉뚱한 관심이 나옵니다. “주님 저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엉뚱한 관심으로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는 땅을 샀습니다. 누구는 50평 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누구는 교회를 크게 지었습니다.
여러분!
북한에 이런 구호가 이더라구요. “우리는 우리식대로 산다” 우리는 예수식대로 산다. -아멘-

둘째, 프로의 삶을 사세요.
프로페셔널이란 말에는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는 일시적으로 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는 프로 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가리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차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예수님이 잡혀가시게 되자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가시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이 말은 다시 번역하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입니다. 우리가 프로정신이 없을 때 하기 좋은 일만 골라한다면 시골교회는 누가 담임하고, 장애우들은 누가 돌봅니까? 먼지 날리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오늘도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기도의 씨를 뿌리세요.
불교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합니다. 가톨릭인들은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긋고 합장합니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가거나 그곳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몇 번씩 절을 합니다. 힌두교도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눅 18:11).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멋 대로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양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 11:41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구약서부터 보면 기도의 보습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두 손들고”, “가슴을 치며”, “머리를 숙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등의 모습이 나오지만 모두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모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골방에서 하라”(마 6:5-6)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마 5:44), “중언 부언 하지말고”(마 6:7), “무엇이든지”(마 18:18), “믿고 구하라”(마 21:2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런데 원문에 보면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te: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앞에 나타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연관이나 첨가의 기본 불변사입니다. 뜻은 “역시, 양쪽의, -까지도, 둘 다”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다 되면 그 다음에 유대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10명의 성도만 있을 때는 하지말고 100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테’의 강력한 불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선교 명령은 최소 될 수도 없으며 그 곳이 어디든지, 언제든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 있던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선교지 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이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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