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교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6. 사라진 교회들) / 본문 : 마 4:21-2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대한민국 개신교인수는 통계 조사이래 1995년이 8,760,066명(19.6%)으로 제일 많은 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인구는 4천 4백만 명에서 4천 7백만 명으로 300만 명이 늘어난 반면 개신교인구는 8,616,438명(18.3%)으로 오히려 143,628명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1,000명의 교회가 143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명목상의 신자들조차도 줄고 있답니다. 지난 1990년대 초 프랑스인들은 전 인구의 80%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51%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니라 종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응답한 이탈리아의 경우 27%, 독일 21%, 프랑스, 체코 11%, 미국 60% 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해 이슬람 국가에서는 90% 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보다 휠 씬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영국인들의 44%만이 신이 존재한다고 답하였으며, 35%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21%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인들의 40%, 영국인들의 15%, 독일인들의 12%,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국민들의 5%만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유럽 국가 전체의 평균 수치는 20%가 채 되지 않으며, 2000년 조사에서 미국인들 중 16%, 프랑스인들의 60%, 영국인들의 55%,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40~50%가 거의 또는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노르딕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은 국기 모양이 노르딕 모양으로 모두 십자가 국기입니다. 국기는 십자가인데 교회는 5%만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진 나라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 경각심을 가져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수가 80~100%까지 되었던 유럽 국가들하고는 다릅니다. 유럽 나라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옛날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말은 예전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신교인 20%을 넘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옛날로 돌아가면 불교나 유교 또는 무교, 샤머니즘으로 가자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라진 교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어원의 뜻

본문 21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부르시니”는 원어의 “ejkavlesen”(에클레시안)으로 어근 부르다(kalevw:칼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을 라틴어에서 에클레시아(Ecclesia)로 그대로 읽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카라’에서 왔는데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부름, 소명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 부름(call), 소명(calling)으로 불러지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칼라가 칼라치아가 되고 영어에서 회중을 의미하는 church 라는 단어로 보편적인 측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영어 발음에서는 칼라가 약해지고 치아의 발음이 살아나 church가 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단수형으로 나옵니다(행 2:47, 5:11, 7:38, 8:1, 9:31).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 1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될 수 없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교회의 수적 증가를 말할 때 복수로 나옵니다. 또 한가지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굳이 다른 곳과 같이 단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교회의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오늘날 변화된 가톨릭이나, church가 아니라 원래 이 말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칼레오(부르다), call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출 19:20)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무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나 예수께서 부르신 것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며(마 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구원에로 부르십니다(롬 8:3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롬 9:7),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롬 9:2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에클레시아, church, 가톨릭’의 단어는 모두 ‘칼레오’ 부르다와 동시에 엔칼라오, 엔클레마(ejpikalevoma 에피칼레오마이:고소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부모님께 와서 일러바칩니다. 사실은 유치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산주의가 부패하는 것은 언론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른 언론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기능이 바르게 작동될 때 사회는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관

본문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이 불러서 행하신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며” 교육과
둘째는 “전파하시며” 전도, 선교와
셋째는 “약한 것을 고치시니” 능력 행함과 공동체적인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감리교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일년에 700개씩 교회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조사해 보니까, 첫째는 기도하지 않고, 둘째는 성경을 보지 않고, 셋째는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교회는 모이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동경의 모리야마 목사는 수요일 날 기도회도 많은 분들이 모입니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저녁에 모이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금요일 오전에 ‘감람회’라 해서 모이는 모임이 있다. 그리고 금요일 날 저녁에는 철야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철야기도회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할까 해서 모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다 하는 데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철야기도회의 인원도 점점 늘게 된 것입니다.

사라진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북왕국 20대왕 남왕국 19대 왕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왕들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조롱과 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십니다. 역대하 마지막 36장 17-21절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왕을 통해서 이 성의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죽이게 하고 하나님의 전은 노략을 당하고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동안에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었고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은 갈대가 날리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러 돌아옵니다. 이 성을 재건하고 찬송을 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노인들 중에는 예전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3: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라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주로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지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묘비의 글을 알려줍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는데 ①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②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③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느헤미야 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어느 교회에 설교하려 갑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작은 교회에 가서도 설교하십니까?
형제여! 작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다 위대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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