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2. 웬 떡) / 본문 : 요 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여기는 롯데월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6-7세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롯데월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뽀뽀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엘림을 떠나 시내산이 보이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앞뒤를 살펴보고 좌우를 보아도 먼지 날리는 모래뿐입니다. 애굽에서 싸들고 온 양식도 바닥이 들어 나고 가축들도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응답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주시는 대신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보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m)를 광야생활 40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출 16:45). ‘만나’라는 말은 ‘마’(hm) ‘무엇? 웬?’이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웬 떡’ 우리 식으로 말하면 ‘웬 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빵은 주식이며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입니다. 빵이라고만 말씀드리면 주식이라는 개념이 약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저는 밥으로 고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요한복음 6장 1-4절에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기적일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그것은 집단적인 치유가 아닌 개인적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체험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이 특히 일상적으로 늘 필요한 빵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더욱 들뜨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 예수님이 가신 곳에 좇아갔습니다. 다른 기적과 달리 오병이어 기적은 사람들을 대단히 흥분케 한 기적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온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을 밥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을 위해 일하여라. 그 밥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의도하신 뜻이 여기에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썩을 밥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은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런 의도로 해석하여 오병이어의 기적과 더불어 영생하는 밥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곧 이어진 대화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그들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밥인 만나를 먹었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그 밥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 밥을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밥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니 사람이 이 밥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많이 헷갈렸습니다. 떡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고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밥과 만나라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영적인 차원으로 이야기가 비약되므로 유대인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얼른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니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먹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33절에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시내산에 받은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진정한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는 것을 양식(糧食)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는데,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도주와 젖으로 비유하면서 값없이 와서 사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스겔서에 보면 예언자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먹었는데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겔 3:1-3).

이런 전제를 가지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로고스(Logos) 즉 말씀이라고 하였으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교훈을 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밥
‘나는 생명의 밥이다’ 세 끼 밥 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밥은 필수음식입니다. 밥 먹는 것을 보고 누가 사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밥은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잘 못 먹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입맛과 식성이 다 다르지만 밥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고 식성에 장애가 없이 다 먹는 양식이 밥입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밥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밥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는 사람을 가려서 ‘너는 내 밥을 못 먹는다’ 그렇게 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라는 말씀을 주님은 자주 사용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밥
지난번 캄보디아에 갔을 때 배가 아파서 고생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상한 음식이나 물을 잘 못 먹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상한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즉시 탈이 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밥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까지 하는 약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인간의 역경과 좌절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의 밥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것도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8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것이 웬 밥입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식새끼들 입에 따끈따끈한 밥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이야!”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기쁨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을 때 일 것입니다.

요 6: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의 두 단어의 문법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먹으면”(favgh/:화게)은 ‘과거형 능통태 가정법 단수’로 일회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먹으면’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만일 단 한번이라도 먹는다면”이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한번만 받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는 성찬 예식은 이것을 기억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그리고 또 한 단어가 있습니다. “나의 줄 떡”(ejgw; dwvsw hJ savrx)의 “나”(ejgw:에고)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입니다. 이것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나는 앞으로 단 한번에”가 됩니다. 미래형을 사용하셨고 또 ‘혼자서 단 한번에’ 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 해 두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들은 너무 많이 밥을 퍼 주셔서 어떤 때는 먹기 싫어서 “내가 풀게!” 하면서 밥통으로 가면 어머니는 쏜살같이 오셔서 “엄마가 풀게 기다려라!” 하며 주걱을 빼앗아 가십니다. “또 많이 줄 거면서”하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히 밥솥을 열었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밥솥 한쪽에 어머니가 드실 찬밥 덩어리가 동그마니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혹시 우리가 보거나 먹을까 염려하셨던 어머님입니다.

우리말에 속썩이는 자식에게 부모가 하는 말이 “날 잡아 먹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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