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8. 잃은 양) / 본문 : 눅 15:1-7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 오니”(엥기존테스) 접근하다는 뜻의 분사형입니다. 이는 이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 또한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원망하여”(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들을 보고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명령에 의해서 세금을 징수해야하고 거두어 들여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반민족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통칭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들도 아닌 하층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비유로 하신 말씀은 당시 적대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1. 잃은 것을 찾지 아니하느냐?

제가 서울에 올라와 잠시 옷 만드는 공장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밤낮으로 일해서 번 월급을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가방 맨 밑바닥의 종이를 들추고 그곳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없어졌습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몇 칠을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려본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의 마음을 압니다. 베트남에서 디카 날치기 당하고 몇 칠을 중고 카메라 상점에 나가 찾아보았습니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니까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1마리가 길을 잃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99마리는 나와 함께 목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99마리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래도 목자라면 찾아 나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99마리의 양은 길 잃은 이 양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붇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썽 장이 양입니다. 고집이 쎈 양입니다. 99마리가 생각하기를 “그놈은 이 참에 아예 죽어야 돼? 우리 목자만 고생시키고 우리를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99마리는 목자와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 양입니다. 그리고 만일 목자가 지금 한 마리 양이 없어졌는데 99마리와 함께 편안히 먹고 쉬면서 세미나를 하면서 역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효율적인 측면에서 할 일이 못된다고 하면서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목자를 따라가겠습니까? 그래 역시 우리 목자가 효율적이고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우리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목자야 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곧 잃은 양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 버렸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을 찢어내는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아픔이 큰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역사를 가졌고,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수치도 당하였었으며, 교회도 잃어버리는 아픔도 당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 버리셨나요?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 동안 공들여 완성하고 봉헌식 때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사람이 아무리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다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책 가운데 “안네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16살 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핍박받던 나치 정권 아래서 히틀러 군대에 의해 모진 시련과 고난을 받고 있던 때의 일기입니다. 친구들, 친척들, 부모 형제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결국은 가스실에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죽고 그의 아버지만이 살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안네의 일기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

16살 난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펼쳐보지 못한 무지개 빛 꿈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나날이 공포와 두려움이고 절망과 좌절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세상을 보고 내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유태인의 역사는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이며 핍박과 눈물의 세월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Say 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라고 말씀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폭풍이 밀려오고 환난의 바람이 불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하며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 4절로 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만일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요, 열정이 식었거나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며 그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서은이를 좋아합니다. 한번 붙인 것은 절대 안뗘냅니다. 서은이에게 쉽게 마음을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또한 쉽게 버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두 개의 비유가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특징은 모두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찾아야 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눅 19:10).

무엇을 찾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 중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견디다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네”라는 말, “아멘”이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네”하고 “아멘”해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 찾은 자의 즐거움

본문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의 “즐거워”(카이로)는 단순한 만족의 기쁨을 넘어 넘쳐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생과 비용이 들어갔다고 해도 잃은 양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찾은 자의 기쁨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경제적 손익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여는 것 보다 아예 잃은 양을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설교한다는 생각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고 생각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잃은 것, 잊은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납 사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찾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선교는 1000년을 넘게 한 것입니다. 미국도 1885년에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적어도 미국 선교의 역사도 200여 년은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근대선교는 2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또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양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요 나 자신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고 불평하는 양이 아니라 목자를 돕고 기도하는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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