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9.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 본문 :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역사상 제일 큰 땅을 차지하게 된 인물은 아마도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라는 데는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온유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온유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바보스러운 것이 온유가 아닙니다. 또한 도전적인 사람이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 미저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산타마리아 호’는 많은 관광객들의 관람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산타마리아 호는 컬럼버스를 태워 가지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에 도착한 배의 이름입니다. 지금의 산타마리아 호는 그 때의 배를 원형대로 모조해서 바닷가에 메어 놓은 것인데, 보는 사람마다 그 배가 대서양을 건너기에는 형편없이 작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길이가 30m도 되지 않는 이 배는 지금 미저리 강을 오가는 거대한 배들 틈에서 장난감같이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배와 두 척의 더 작은 배가 용감한 컬럼버스를 태우고 신대륙에 건너 왔으며 탐험의 신기원을 마련한 것입니다. 바로 신대륙의 발견 등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컬럼버스는 부족한 장비와 가망성 없는 모험을 용기로 보충한 사람이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을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생활입니다.

본문에 ‘온유한’(praei’”:프라에이스)로 사용된 말은 시편 37: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의 이 어근은 “pavscw:파스코”라는 말인데 “고난을 체험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원래 히브리어의 뜻은 “겸손한, 온순한”이라는 말의 “wn:[;:아나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브의 어근은 “hn:[;:아나”입니다. 아나의 뜻은 “누르다, 괴롭히다, 고통”을 뜻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모두 원문상의 이 뜻을 종합하면 “온유한”것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은 결코 온유하지 못하고 온유한 것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은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칼빈은 온유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실로 나폴레옹이나 진시황과 같은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무력의 힘과 권력으로 수많은 땅을 정복하였지만, 그들은 죽어서 몇 평 안 되는 묘지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심으로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천국의 영원한 기업을 상속하여 주실 것입니다.

미국은 정말 온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라스카는 미국 본토의 1/5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본래의 알라스카는 구 소련 땅이었습니다.
1867년 죤슨의 대통령으로 재임당시 720만 불을 주고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당시 얼음으로 되어있는 빙하의 땅으로만 알려졌던 문제의 땅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미국 국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소환하여 질책을 가했습니다. 국회동의도 없이 쓸모 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중 한 의원은 “얼음이 필요하다면 미시시피강을 얼음으로 이용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아이스박스에 불과한 알라스카를 샀는가?”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후 정부와 의회의 공동 조사단에 의하여 알라스카를 탐사해 보았더니 그 땅에는 상상외로 순금, 백금, 석유 풍부한 어장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은 얼음 땅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황금의 땅을 거져 주었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 국회의원들이 백악관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알라스카의 축복이 주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땅이라고 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쓸모 없는 땅이라도 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서 자연이 형성되고 인간의 문화가 이뤄지고 인류의 역사가 창달되고, 정치 경제 산업 등의 온갖 사회적인 발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힘이 강한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물리치고 땅을 빼앗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면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개인사이에 싸우기도 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침범하는 일이 지구상에서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 전 국토를 침략하였고, 그 후 6.25의 한국전쟁이 발생된 이래 지금까지 남북으로 분단된 뼈아픈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유럽일대를 정복하고 지중해연안에 있는 주변국가들의 영토를 로마 지배령으로 삼았지만, 로마제국은 결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당성을 벗어나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빼앗은 땅은 언젠가는 다시 빼앗기고 결국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평화와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결국 오랫동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땅을 불법으로 빼앗은 자는 땅으로 망할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이집트에서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네겝 땅으로 올라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켜서 서로 편리하게 떨어져 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기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롯은 요르단 분지를 가리키며 목자와 짐승들을 따로 데리고 분가하여 물이 넉넉하고 하나님의 동산같이 느껴졌던 소알 평지를 향했습니다. 롯이 떠나간 다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라. 네 눈에 비치는 온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창 13:14-17)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한 이유를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오늘도 선택하십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온유한 자들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 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약 3:13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보면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말한 것인데 이것은 천국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땅을 얻어보아야 얼마나 가겠습니까?

어느 마을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어 원에서는 그 사람의 뒤를 밟도록 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떻게 부모 마음을 헤아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캐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효자의 뒤를 밟던 관리는 그의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효자는 집에 오자마자 난간에 앉아 어머니가 떠온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들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관리는 화를 내며 효자에게 달려나갔습니다.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라고.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소문이 나서 찾아와 봤더니 천하에 불효 막심한 인간이었구만. 늙은 어머니에게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켜?”
그러자 이 효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효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도록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일하러 갔다 온 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큰 낙으로 알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무슨 큰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시고자 하나님의 뜻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앙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가는 것입니다.

유머작가인 루코크라는 사람은 현대판 성령강림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림”이라는 광고가 났습니다. 적어도 120여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빌립의 가족은 지난 밤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토쇼장에 갔습니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차 골프를 치러 떠났습니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쳤으니 당연히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갔습니다.

불꺼진 등대는 위험만 가져다 줄뿐입니다. 주님의 온유하신 성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불꺼진 등대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영원한 땅을 기업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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