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람산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0. 감람산의 기도) / 본문 : 눅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한번 체질화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습관이 사람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난 습관이 있습니다. “낮이면 성전에서 … 밤이면 감람원이라하는 산에서 쉬시니라”(눅 21:37)고 했습니다. 눅 1:9, 2:42에도 “습관을 좇아”라고 나옵니다. 47절에서 가롯유다가 체포조를 이끌고 이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간 것도 습관적으로 가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0절에 “그곳에 이르러”라고 했는데 그곳은 습관적으로 가시는 그곳입니다. “그곳”이란 바로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마 26:36, 막 14:32). 예수님에게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밤에 다신 곳도 바로 늘 가셔서 기도하시고 쉬신 곳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마지막 밤이 다가온다면 늘 가던 교회로 나와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교회 가까운데 묻히면 부활 때 무덤에서 제일먼저 일어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교회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점점 들어와 교회 앞마당과 심지어는 강대상 밑에도 무덤을 삼았습니다. 섹스피어의 무덤도 교회 강대상 밑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에서 남보다 더 빨리 부활하려고 교회를 가깝게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 습관적으로 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가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습관은 인간 생활에 큰 지도자이자’(Heine)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아멘을 습관적으로 크게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흥회 중에 예배 분위기가 방해될 까봐 이 집사님에게 유아실로 가서 아이들을 보고 계시라고 임무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때 설교를 하고있는데 저 쪽에서 아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설교도 들리지 않을텐데 왜 아멘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들 교과서인 세계지도를 보고있는데 파랗게 칠해진 바다를 보고 아멘 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아멘.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멘 하는 삶, 이런 습관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시험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바로 이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있을 일도 사람은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만일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한다면 좀더 진실 되지 않겠습니까? 늘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며 기도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 됩니다. 아이들하고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떠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언제까지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때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영원한 기도의 제목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사람이 바보가 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사리분별를 잘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단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면 사람과의 관계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합니다. 저기 멀리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사람입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시험이 듭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예수님에게 사단은 끈질기게 따라다닙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 때 잠시 물러간 것 같으나 아주 떠나지 않고 늘 예수님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사단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마16:1, 19:13, 22:35). 바로 예수님이 지금 기도하시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보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뜻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머리로 다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머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으려면 끝까지 못 믿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는 신을 믿으려면 아마도 나보다 못한 것을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 25:5)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8:2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합니다. 이사야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힘을 도와 주십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43)
우리가 기도할 때도 천사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도왔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육신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집사람 동기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동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모님이 목사님이 40일 기도를 하러 가셨는데 그만 중간에 죽을 것 같아 사람들이 들것에 모시고 집으로 왔답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잘 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기도원으로 돌려보냈답니다. “죽어도 기도원에서 죽으셔야지 돌아오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목사님이 능력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천사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이 천사는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도 나타나 도와 주셨습니다(마 4:11, 막 1:13).

누구나 힘을 좋아합니다. 힘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힘은 육체적 힘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일을 위해서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다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 세상 힘을 가졌을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후에는 겸손한 사람이요, 참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힘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세 가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I can do nothing on own, because I am nothing) 빌 3:4-8
2)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I con do all things through Christ becauce He stsengthes me) 벧전 5:10
3)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I give God all the credit for my thing I am able to accomplish)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식(seuse of God’s almighty power)하고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모패트(1795∼1883년)는 남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선교 활동 중 고향인 영국에 잠시 들러 후원을 호소했는데 첫 번째 교회에 들어섰을 때 무표정한 서너 명의 여신도밖에 없어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잠언8장4절을 인용,「사명의 고귀함」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남자라고는 오르간에 바람을 집어넣는 소년 조수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놀라웠습니다. 아무도 안 들었을 것 같은 그의 설교를 이 소년이 듣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후에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다른 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새 힘 교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앙교회에 다니면서 어 깨 축 늘어뜨리면 안됩니다. 누가 툭 치면 살아서 팔딱 뛰어야 합니다.

정범진 씨의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무렵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침대 머리맡을 들어올려 내 발가락을 관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신체부위가 발가락이라는 이야기를 의사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몸의 마비를 경험해 본 사람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몸의 마비를 경험하지 않고도 이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한 자기 발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가만히 주인 앞에 와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왜 바라봅니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 하는 것은 무엇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힘이 나옵니다. 그 모습은 바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모습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1)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입니다(Soar).
2) 곤비치 않고 달려가는 힘입니다(run).
3) 피곤치 않고 걸아가는 힘입니다(walk).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역사상 기독교인을 꺾었던 왕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인들은 가이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제국을 밀어 제치면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Start from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with Christ).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며 행동하시기 바랍니다(walk learning on Christ).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to Christ).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이 여러분들에게 날마다 소생시키는 힘이(Renewing Strength)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