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5. 서로 사랑하라) / 본문 :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저에게 2-3년 전까지는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취미가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 찍기”라고요. 그래서 말도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하나가 선교지를 변화시킨다.” 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지, 그리고 작은 것 같이 보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제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2년 전에 북유럽에 선교여행 함께 다녀왔던 목사님이 지금도 제가 찍어드린 사진 만한 게 없다고 하십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것인데 사진은 내가 내 자신을 찍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거울을 보면서 한번 찍어 보았는데 얼굴이 카메라에 가렸습니다. 저에게 사진이 찍히는 분들이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아래 가시면 하민이와 준혁이 사진 하나씩 걸어놓았습니다. 서은이와 하민이 준혁이를 보면서 저는 하루가 힘이 납니다. 그 사진만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랑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단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납니다. 사랑과 서로입니다. 사랑은 네 번, 서로는 3번 나옵니다. 상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혼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짝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짝사랑이라는 말은 불가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 호세아서에는 이런 안타까운 Love Story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은 남편을 배신하고 창녀의 소굴로 도망쳐 버리고, 남편 호세아는 보리를 싸들고 찾아가서 팔려간 고멜을 돈을 주고 사오는 겁니다. 그녀의 배은망덕한 사랑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계속되는 배신은 하나님을 짝사랑의 애닮은 연인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짝사랑의 아픔을 앓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짝사랑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전에 어느 날인가 복잡한 통근시간에 시내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저만치 한 여학생이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나는 꼭 그 여학생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뻗쳐 가방을 받기에는 애매한 거리였습니다. 그저 그 학생이 한번만 돌이켜본다면 나는 그를 부를텐데, 조금만 더 다가선다면 그 가방을 받아줄텐데 그 학생은 끝내 더 먼 위치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눈뜨는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돌보시는 그의 사랑을 아십니까? 당신의 먼 장래까지 보장하시는 그의 관심을 아시나요? 그런데 나 자신이 어쩌면 주님께 시선한번 안 돌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에 성경한번 제대로 안보는 사람, 하루 중에 기도한번 안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오늘도 짝사랑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실 성소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때 제일먼저 만들게 되는 것이 성소의 제일 안쪽(지성소)에 있게될 증거궤(법궤)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나머지 성막들과 도구들은 이 법궤를 위함이며, 보호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의 뚜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위쪽에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출 25:20)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서로 바라보는 보습을 하고 동시에 이 천사들은 속죄소를 바라보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하셨습니다.
속죄소의 법궤 없이는 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만 모세와 대면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의 모양이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여 보고있는 것입니다. 날개가 펴 있다는 것은 지금 일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지금 천사들과 함께 행동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1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 네 생물이 나옵니다. 이 네 생물은 천사들입니다.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겔 1:9)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의 날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송영을 부를 때 손에 손을 잡고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들은 손을 잡은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뒤돌아 보지 아니하며 앞으로 향해서 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1) 함께 지어져 가는 모습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고 하시면서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부사이에서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서로”라는 말씀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좋은 것은 “서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저에게 몇 번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신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남학생이 김밥을 싸왔는데 손으로 감싼 채 혼자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학생들이 젓갈을 가지고 같이 먹자고 덤벼들었는데 계속 혼자 먹으려고 도시락을 가지고 피하려다 그만 김밥이 다 쏟아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디서 목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도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안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두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는 날이 간혹 있었습니다.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면 부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정하게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구멍난 문 창호지 사이로 내다보였습니다.
무엇인가 반찬을 만들고 계시는 어머니와 불을 때시느라 벌개진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동시에 “한국교회 성도의 선교의식구조 조사”라는 설문을 인터넷을 통해서 메일로 보내고 설문 통계를 보고있었습니다. 문항이 26번까지 있어서 누가 참여해 주겠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설문에 응해주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10명, 50명, 100명을 넘어서 지금은 350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응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이 설문을 잘 정리해서 발표하면 박사학위도 누가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설문조사 주소 : http://missionmagazine.com/main/php/vote.php?idx=4

선교지에 가면 한국선교사님과의 갈등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도와주면서 기도하면 선교해야 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변의 사람들 다 끊고 나만 고상하게 살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집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책임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에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막 9:50)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요 13:14)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행 2:42)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4:32)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롬 12: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4:19)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고전 12:25)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갈 5:13)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6: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엡 4: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엡 5: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살전 4:18)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히 10: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약 5: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벧전 4: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벧전 4: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5: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요일 3:11)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사랑을 5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는 사람 중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존경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의 위치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것이 존경입니다. 이 존경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셋째,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란 말의 영어의 뜻은 ‘아래에 서다’란 뜻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낮추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넷째, 책임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과 권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매사에 의무보다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이 사랑입니다.
다섯째, 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주는 사람은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어떤 젊은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주는 허무함,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긴장 가운데서도 조종사는 그 여자가 보내는 편지에서 위로를 받고 삶의 용기를 가지곤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약속한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꽃 한 송이를 들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줌마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습니다.
조종사는 크게 실망이 되어 모르는 체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웬 멋장이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주면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사랑의 약속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무에 비유하며 정원(포도원)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아가서에는 포도원 망대를 허무는 작은 여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동산을 방해하는 자를 말합니다.
미국의 전래동화 이야기입니다.

 

주머니쥐가 친구인 너구리를 방문했습니다. 너구리의 집은 강 근처에 있었는데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도 그런 정원을 가꿀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너구리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머니쥐는 모든 힘을 기울여 열심히 정원을 가꾸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너구리에게 약간의 씨앗을 얻었습니다. 주머니쥐는 집으로 달려와 흥이나서 노래를 부르며 씨앗을 땅에 심은 뒤, 집안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씨앗이 다 자랐나 보기 위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원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어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머니쥐는 화가 날 정도로 실망했습니다. 그는 땅에 묻힌 씨앗들을 향해 “어서 자라나거라. 씨앗들아!”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땅을 두드리기도 하고, 발로 쾅쾅 밟아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대체 무슨 소동인가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너구리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왔습니다.
“주머니쥐야 도대체 무슨 일이니? 네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온 숲이 시끄럽구나.”
주머니쥐는 왜 씨앗들이 자라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하며, 다시금 씨앗들을 향해 큰 소리로 어서 자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을 주머니쥐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머니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마침내 너구리가 말했습니다.
“잠깐만, 주머니쥐야. 너는 씨앗들을 자라게 할 수 없어. 그저 햇빛을 잘 받게 하고, 물만 잘 주면 나머지는 씨앗들이 알아서 해. 씨앗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그때부터 주머니쥐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고 너구리가 말한 대로 씨앗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쥐는 규칙적으로 물을 주고, 쓸모 없는 잡초는 뽑아주었습니다.
마침내 아름다운 연두 빛 새싹들이 정원 여기 저기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예쁜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쥐는 기쁜 마음으로 너구리에게 달려가 자랑했습니다. 너구리는 주머니쥐의 정원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것 봐. 네가 지켜보는 동안 씨앗들이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었잖아.”
“맞아. 그러나 씨앗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
사랑을 알게되고 확인하는데는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성스럽게 돌보고 가꾸다 보면 우리의 정원도, 교회도 주머니쥐의 정원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며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 역할을 귀찮다 생각지 마시고 충실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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