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행위보다 우선한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4. 존재는 행위보다 우선한다.) / 본문 : 요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중국언론들이 14일 보도한 내용입니다. 중국 서남부 윈난성 푸민현 정보가 라오서우산 산허리 전체에 녹색 페인트칠을 해 ‘녹화’ 사업을 한데 대해 주민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코미디같은 녹화사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현 정부의 지시에 따라 페인트칠을 했으며 이유는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페인트칠하는 값이 중국 돈 47만 위안(약 5,700만원)이 들어갔답니다. 이 돈으로 진짜 나무를 심었으면 더 푸르게 만들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 산이 푸르게는 보일지 모르나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흉한 보습만 하게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외형적 크리스천은 페인트칠한 산과 같은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아있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하셨습니다. 페인트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껍데기만 남아있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생명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개신교인은 8,760,336명이었고 천주교인은 2,950,730명이었습니다. 개신교인이 약 2/3이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05년 조사에서는 개신교인 8,616,438명이며 천주교인 5,146,147명입니다. 천주교는 배 정도가 성장한 반면 개신교는 오히려 15만 명이나 줄었습니다. 열심으로 보면 개신교가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보다는 행위에 우선을 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전도와 선교를 지향하며 열심을 가지는 교회에서 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우리의 사명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바른길인지는 우리가 결정하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기업형 교회관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교회성장학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가끔 깜짝 놀랍니다. 300명 이상의 교회가 되면 목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관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기존 목자의 직무에서 벗어나 시스템관리자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조직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그 이상 성장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도 교회는 그 이상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왜? 한 교회가 성장해야만 성장한다는 논리를 갖게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목회자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신학생이 배출되고요. 한국교회가 중소형 교회가 더 많으면 한 두 교회가 큰 것보다는 더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목사님들 모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서울의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교역자에게 성과급 제도가 있답니다. 처음에 교역자로 갔을 때 구역을 맡기고 성도가 100명이라면 거기서부터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동의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어떤 교역자에게는 성도가 돈으로 보일 것입니다.

기업형 교회관이 잘못된 이유는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경제 논리에 밝은 요즘 교인들은 교회를 마치 기업처럼 생각하고 교역자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이유는 “존재”나 “근본” 보다는 “행위”와 “기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가장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방법을 통해 물건을 생산해 내고 팔아야 합니다.
어떤 기업주가 “우리 회사는 가정과 같습니다.” 하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또한 기업을 하려면 그렇게 해서는 기업이 안됩니다. 기업은 생산성을 통해서 이윤을 낼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또한 똑 같은 논리로 나가고 있다면 그들은 쉴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로 갔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 자녀라는 것은 생산성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 가정의 예를 들어봅시다. 말썽만 부리는 딸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무엇을 생산해낼 능력이 있어서 가족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커서 나중에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한 자녀를 키우고 키워준 것을 투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존재로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장모님은 83세가 넘으셔서 교회에 오셔서 아무 일도 못하시고 안 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존재함으로서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교단체는 간혹 투자에 대한 “생산”이라는 말로 목표를 설정합니다. 점검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효율성만을 따지다 “생산” 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부모는 좋은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도하고 많은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결코 투자관계에서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 자식들이 결코 이익을 벌어들이는 수단이 아닙니다. 가족은 생산 능력이 있든 없든 모두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우리는 모두 자녀일 뿐입니다. “존재”로서만 그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요 5:31-47절에 보면 “기업형 교회”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믿고 나아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잘못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동양의 어떤 군주처럼 폭군의 모습도 없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신분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마구 노예로 부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은 그래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믿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그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더 크고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요 12:37-39 참조). 이처럼 유대교는 신약시대의 “기업형 교회”였던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서로를 시스템 적인 관계로 생각합니다. 이런 부부는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평가를 합니다. 결국 자신이 절대적인 손해라고 생각하면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는 용서와 사랑이 메말라 갑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기업형 사고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집에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안에”라는 말이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공장이 아닌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동산에서 멀어졌는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 또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진전시켜야 한다”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건설한다, 확장한다, 진전시킨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사실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들과는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한 인간의 반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성경은 “영접한다, 들어오라, 구한다, 상속받는다”와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언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성경의 언어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 “열매”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본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경은 왜 열매라고 표현합니까? “목수가 견고한 가구를 만들었다, 제과 업자가 맛있는 빵을 만들었다” 등과 같은 표현 대신에 열매라고 표현한 것은 “행위”에 초점을 두게되면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존재”가 “행위”에 우선합니다.
“존재”가 “행위”에 우선할 경우 오히려 교회는 활력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존재” 함으로 만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행위”를 강조할 경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성도는 성도도 아닌 것처럼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까지 경쟁을 유발시켜 여기서 뒤떨어지는 듯한 사람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기독교를 종교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종교를 초월합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알게되면 내면이 변화하게 됩니다. 살아야 되는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하지만 “행위”로서는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선한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스템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유달리 승부 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끼날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와 같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집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존재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에녹이 특별한 일을 했다는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바벨탑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철저하게 “존재”에 초점을 두고 “행위”는 경계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것이 반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는 필요하지만 “존재”를 우선하지 않은 “행위”는 허무만이 남게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서 그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 막 8:36, 눅 9:25)고 하셨습니다.

○ 온 교회를 가득 채우고, 더 큰 예배당을 짓고서 온 가족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 많은 헌금을 모금하고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 원대한 꿈을 이루었지만 존엄성을 잃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말 개인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행위”의 교인이 아니라 “존재”의 성도로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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