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0. 비유(18) – 부자와 나사로) / 본문 : 눅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미국에 간 전도사님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LA에서는 가끔 한국인거지를 본답니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알고 이민 왔을 텐데 어떻게 살다보니까 거지가 된 것이지요.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또한 단순하게 보복적인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부자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 때문에 더 중요한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 또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와 나사로(거지), 이생과 저 세상으로 대조됩니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합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현실주의 자 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부자가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한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지옥에서 나사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를 경멸했을 것입니다.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은 사람입니다. 충분히 나사로를 도울 수 있었는데 이것을 외면했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산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 결과는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최소한 가난한 사람은 부에 대한 자부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가 잘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자만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 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이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상황이 변화됩니다.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이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니 빨리 죽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습은 역시 살았을 때나 다름없이 취급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열 여덟 번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하나님의 일꾼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은 물 한 방울이 허락되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 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무엇보다도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향락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로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 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천국 가는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겨울방학에 밤을 세워서 친구 한 명을 억지로 설득해서 안 가겠다는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출을 했습니다. 간 곳은 강원도 황지라는 탄광촌입니다. 그 때 제 꿈은 하도 가난해서 10년 후에 택시를 사서 고향에 금의 환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그 때 생각하기를 누가 탄광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역이 추천역으로 해발 855m인데 지금은 눈꽃 축제를 만들어 관광열차가 갑니다. 그 옆에 황지역이 있습니다. 지금은 태백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도착하니까 얼마나 추운지요. 태백은 정선ㆍ도계 탄전과 더불어 태백탄전의 중심지이며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입니다. 1933년 일본인에 의해 매장이 확인된 후 계속 개발되어 1987년 640만 톤으로 전국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했었습니다. 지금은 수요의 감소로 석탄산업의 경쟁력을 상실하여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43개에 달하던 탄광의 93%가 문을 닫고 현재 3개의 탄광만 남아있답니다. 당시 탄광 근로자는 2만 여명이었는데 지금은 5,000여명으로 감소하였답니다. 제가 탄광에서 일을 하겠다고 그곳까지 찾아갔습니다. 중학생은 안 된다는 걸 사정사정하니까 아침에 오라는 것입니다. 여관에서 하루 묶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일주일 정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가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 때 제가 머물렀던 어느 방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후 밤을 세워 친구를 다시 설득해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어느 청교도 교인이 아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와서 지혜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큰 부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 그는 자기의 세 가지 신조를 젊은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술 마시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만 믿고 만사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생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당신이 말한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릅니까 ?” 하고 뭐 좀 특별난 대답이 없느냐는 식으로 되물었습니다. 그 때에 부자는 정중하게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알고 있을 뿐이지 실천하지를 않는 것이 지성인의 약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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