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건축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3. 비유(13) – 어리석은 건축자) / 본문 : 눅 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제가 사무실을 영등포에서 9년 있었고 건대입구에서 6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 갈 때마다 그 주변에 아파트와 건물을 다시 건축하는 것입니다. 건축할 때 기초공사를 하는데 중장비 차가 와서 기둥을 박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몇 달을 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초공사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심지어는 아주 종교 생활을 잘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상은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난주에도 ‘영리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비유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는데 믿음이 잘못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을 밤새워 기다리다 기름이 부족하여 5명의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할 말 가운데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라구요. 물론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문제를 다시한번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주여,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참 좋은 말씀이다.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재산을 나누어주어라”그러면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신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다 마쳤는데 한 학생이 제게 “목사님 술을 먹는 것이 죄 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학생은 술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본인이 먹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술을 먹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이 술을 좀 먹었다고 그것이 꼭 죄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술 드시게 되면 죄를 범할 확률이 먹지 않는 분에 비해서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 자신에게는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고 먹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이 지키나 안지키나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말씀은 주님을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이미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건축자
우리는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먼저 다른 사람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틀린 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천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집을 짓는 사람은 장점이 있습니다. 빨리 짓는 다는 것입니다. 한참씩 걸려서 기초를 놓아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함으로 고생해야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값이 지나치게 많이 올랐습니다. 집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오른 것이야 좋지요. 그런데 진짜 심각한 것은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퍼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은 집도 바람이 불고 비가 지독하게 내리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스펄전은 실행이 없는 말을 가리켜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인 유혹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대신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대신 그저 ‘나는 믿노라’고 말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오는 대신 그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을 말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말만 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하는 자입니다.

일본 동경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때에 무너지지 아니한 빌딩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건물은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란 사람이 지은 빌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 설계를 하고 빌딩을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설계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설계대로 하면 과다한 비용이 들고, 많은 노동력,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건물은 처음부터 말을 많이 듣고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나고 보니깐, 이 빌딩만이 지진 속에서 변함없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
기초 없이 미련하게 집 짓는 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게 집을 짓는 사람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산상수훈에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5)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집을 주초위에 놓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복음서 모두 주님의 가르침의 실천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가 나가서 도덕적으로 좀 더 잘살아보아라”하는 의미 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른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초위에 세우는 것은 예수님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모두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사 28:16)고 했으며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라(마 16:18)는 말씀을 들은 장본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 직후 산헤드린 공회의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또한 자신이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벧전 2:6-8)
우리는 이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경계해야 될 오류가 있습니다. 그 오류란 바로 그리스도를 빼 놓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따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 나의 말한 것을 행치 아니하는”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 없이 말씀만 따를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먼저 설계를 합니다. 설계를 한다는 것은 계획을 세운다는 것 아닙니까? 인생을 설계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듣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명령에 순종하면 됩니다. 이미 주님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다 알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진짜 다이야몬드와 가짜 다이야몬드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 ‘수중 감정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이야몬드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인조 다이야몬드는 빛이 사라지고 진짜는 그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마치 이 다이아몬드처럼 역경 중에서도 계속하여 빛을 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초를 단단히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4:8절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 260장 중 에서 318회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빈도로 말하면 매25절마다 한번 꼴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전체에서 1,000번 이상이나 말하고 있는 확실한 것으로 반드시 종말은 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종말이 올 때에도 지혜로운 건축자의 소망은 요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라는 본문의 내용 증간에 원문 성경에는 “그리고”(Kzj)라는 접속사가 4번이나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환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주 숨가쁘게 돌아가는 연속적인 연타의 시험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가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이까? 악한 자들이 나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다가 실족하여 엎드러지리이다. 군대가 진을 치고 달려들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난리가 나서 나를 몰아쳐도 내 마음이 든든하리로다. 고난이 임할 때에 나를 당신의 초막 속에 숨기시고 나를 들어 반석 위에 세우시리도 (시 2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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