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4. 비유(14) – 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 본문 : 눅 8:16-18, 11:33-36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미국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로 여행을 떠나고 역마차들이 많이 이용되던 때입니다. 이 때에 시골 열차 건널목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탄 마차가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마차에 타고있던 일가족이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사건 심문이 일어나고, 그 건널목을 지키면서 기차가 다가올 때 지키는 건널목지기가 소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건이 발생한 날 밤에 마땅히 그랬어 하듯이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그 시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예”
“당신은 등불을 들고 기차를 맞으러 나갔습니까?” “예”
“그리고 기차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등불을 좌우로 흔들었습니까?” “예, 흔들었습니다.”
이 부분이 핵심이었으나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한 사고로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나 건널목지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내면서 “오. 저 불쌍한 사람들” 그러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친구가 그때의 사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었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세밀하게 조사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나. 자네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네.”라고 했습니다. 건널목지기가 이 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한 가지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네.” 등불은 켜 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마차를 탄 가족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빛의 목적은 비추이기 위함입니다.
오늘 두 비유는 말씀이 전개되는 방식이 것이 거의 같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나오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들을 책망하실 때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 비유는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빛이 있기는 한데 숨겨졌다는 그 빛은 의미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등대 만드는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손에 상처가 하나 있는데 등대에 올라가 납땜하다가 딘 흔적입니다. 추운 겨울에 등대 불빛이 꺼져서 빛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리하러 갔습니다. 대개 불이 꺼질 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기 납땜을 해야 하는데 막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닥불을 피우고 인두를 불 속에 넣었다가 빨같케 달아오르면 이것을 가지고 식기 전에 빨리 등대로 올라가 납땜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바람을 불고 인두는 쉽게 식는데 납이 제 손에 떨어져 보글보글 끓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시 참아야지요. 그 때 생긴 흔적입니다. 등대는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등대의 목적이 비추기 위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9-10).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우주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위에”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래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습니다(창 1:2).

이 세상은 빛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있으라”였습니다. 이 빛이 생겼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상태는 물러가고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질서의 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의 모태는 바로 빛인 것입니다. 이 생명의 빛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에게 첫 번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악으로 세상은 영적인 어두움이 빠집니다. 혼란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화와는 서로에게 미루기만 합니다.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빛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고 생명이 충만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던 에덴 동산에 다시 창조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엄습해 왔습니다.

이런 영적인 혼란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밝혀줍니다. 따뜻하게 합니다. 자라나게 합니다.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인도합니다.
빛의 속성이 있습니다. 빛은 직선으로 비추입니다. 빛은 비추게 되면 반사됩니다. 빛은 아름다움(색깔)습니다. 빛은 정직합니다. 빛은 불변합니다. 빛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이런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게되니 어두움이 들어 나는 것입니다.
눅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빛은 어두움을 들쳐 냅니다. 그대로 감추게 하지 않습니다.

등불은 눈입니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등불입니다. 눈이 돈만 바라보면 돈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눈이 산을 바라보면 산으로 갑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주앙” 주님만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등불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자신이 빛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빛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눅 11: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빛을 숨기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서 죽게 만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빛이 있는데 빛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달처럼 해의 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것입니다. 태양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빛을 잃게됩니다.

이 빛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주앙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정신호 집사님,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은 이란과 파키스탄, 중국, 구 소련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십자로”로 알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건조한 산악지대로 비옥한 계곡이 많습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진 후로, 무자히딘(mujahidin) 게릴라와 과도기 정부의 불화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지하드(jihad)라는 이슬람 성전으로 시작했으나, 권력과 종족 분쟁, 종교적 패권다툼으로 잔인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 중 하나이며 복음전하는 것을 핍박하는 박해국가 1위 나라입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도 없는 반면 이슬람 사원은 48,000개가 있는 나라입니다. 북한은 선전용 교회라도 가지고 있는데 아프간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미국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고 있어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하기가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프간의 하자르족과 유사한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아프간인들에게 친근감을 준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앙교회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날 때까지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여성이 혼자 집밖에 나가면 가족에게 매 맞아 죽습니다. 이때 여성을 죽인 가족은 명예살인으로 인정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여성은 숨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누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911이후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어려움 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의 현실은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아프간 여성 가운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5%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내전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데다 경제마저 붕괴되어 있어 실업률, 특히 여성실업률이 지나치게 높으며 전쟁 미망인들은 아직도 여성의 사회활동을 타부시 하는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 구걸로 연명하고 있답니다.

이곳에 우리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스펄전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죠지뮬러는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고 했습니다.

기도로서 우리의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우리 또한 이 빛을 비추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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