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관한 비유(2) 포기하지 않는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5. 비유(15) – 삶에 관한 비유(2) 포기하지 않는 기도) /
본문 : 눅 11:5-13, 18:1-8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57-1859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기도의 부흥’은 미국 역사에서 그 어떤 영적 각성 운동보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당시 백만 명 가량이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레미야 랜피에르라는 사업가가 월 스트리트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어느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수요일에 정오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첫 주에는 6명, 다음 주에는 20명, 그 다음 주에는 40명이 참석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광신적인 행위도 신경증 적인 모습도 없었으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회를 시작한지 4주가 흘렀을 때, 미국에 경제 대공황(1857년)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 사이에 1,400개가 넘는 은행이 파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뜨겁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랜피에르의 교회에서 시작된 기도회는 보스턴, 뉴 헤이븐, 필라델피아, 워싱턴, 그리고 남부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2천 명의 시카고 시민이 매일 정오에 메트로폴리탄 극장에 모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카고에서 갓 이사 온 21세 청년이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라는 소명을 느꼈는데, 그가 바로 드와이트 무디였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이나 한국인들에게 설교자나 책이나 성경 번역이나 깔끔한 교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까?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실 때까지 그분께 부르짖는 열정입니다.

오늘 두 비유에서 예수님도 끈질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제목이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믿는 우리에게 포기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 째 비유는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밤늦게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합니다. 친구는 주고 싶었지만 여행을 하고 막 돌아온 터라 피곤하여 누웠습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눅 11:5-6). 그러나 계속해서 음식을 좀 달라고 간청합니다. 친구가 생각하기를 이러다가는 밤잠을 다 자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귀찮아서 떡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기도의 대헌장(Magna Charta)처럼 여겨지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9-10절)

두 번째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잘 먹는 그런 재판관이었을 것입니다. 올바른 재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돈만 아는 그런 재판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적인 재판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을에 한 불의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신의 일을 탄원해줄 남편이 없었으므로 직접 재판관을 찾아와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눅 18:2).
재판관은 오랫동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4-5절)하고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너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7-8절)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 역시 핵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로만 보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사람은 참 염치없는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여행에서 막 돌아온 친구 집에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까? 저 같으면 하나님 그렇게 염치없는 짓은 못합니다. 그냥 굶고 말지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은 대개 내성적인 성격으로 온화하신 분입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을 이해가 되지만 이야기는 너무 심합니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유만을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잠자리에 누워 일어나기 싫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궁핍을 보고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왕상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엘리야가 우상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상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늘 깨어 계시며 우리를 지키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도 아니십니다. 솔로몬은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대하 6:30)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이유는 유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조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나오는 비유에서 그는 악하다고 나옵니다(눅 11:13).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요구하는 자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가 선하기 때문에, 또는 그가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간청으로 견딜 수 없게되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하물며 악하지도 아니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듣기 싫어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잘 들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어떻게 강청해야 합니까?
9절이 가르쳐 줍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나병 환자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저를 깨끗케 해 주십시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구한 대로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0:46-52을 보면 맹인 바디메오가 눈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소리질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그는 구한 대로 눈을 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구한 사람이 받습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그뿐입니까? 찾으면 반드시 찾습니다. 누가복음 15:8-10을 보면 은전을 잃어버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쓸며 찾았습니다. 결국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습니다.

닫힌 문을 여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열쇠로 여는 것이고, 하나는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문밖에 서 있어도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닫힌 문을 열려면 열어줄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은 반복해서, 힘을 다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13절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기도의 동기를 주시고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사이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영적 파고가 세 차례나 계속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로 대변되는 제1차대각성운동도 1734-36년, 1740년-1742년 두 차례에 걸쳐 부흥운동의 파장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운동을 이 땅에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사경회’ 기간 중에 일어났습니다. 그 부흥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조지 매큔(George McCune)은 이 때 임한 성령의 역사가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성령의 역사보다도 더 강력한 놀라운 성령의 현시였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인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곧 교파를 초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한 평양전역으로, 그리도 거기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1907년 1월과 6월 사이 한반도 전역에서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습니다.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경험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코리아 미션 필드(Korea Mission Field)에 이것은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각성의 모체였습니다. 초기 부흥운동의 모든 자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산부흥운동이 그 시작입니다. 원산부흥운동이 시작되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출신 여 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차제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3번의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명문 토론토대학, 그것도 그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한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 우월 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마음을 부셔버린 것은 주님의 성령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습니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집회에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참석했습니다. 하디의 메시지는 어린 셔우드 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습니다. 본래 서양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하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 역시 부모님들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도 하디 선교사가 졸업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폐결핵으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실’도 그가 처음 만든 것입니다.

저는 1970년대 말에 한국교회 기도원이 막 생겨나기 시작할 때 감리교 목사님 부흥 사경회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부흥회와 기도원을 다녔습니다. 정말 뜨거운 현장이었습니다. 비가오는 여름산상부흥회 때는 좁은 창문으로 고개만 들이밀고 은혜 받아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의 부흥은 신학이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목사님들이 잘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의 운동이 약하고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기도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부흥케 합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구절은 284구절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도에 관한 구절과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설명하는 여러 단어들 가운데 ‘프로슈코마이’가 있습니다. 이 뜻은 “간청하다. 예배하다”라는 것입니다. 단어 하나 속에 기도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간구만이 아닙니다. 예배행위인 것입니다. 기도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를 외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마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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