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뉘인 예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6. 구유에 뉘인 예수) / 눅 2:1-7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미국 시카고의 어느 마을 아이들은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선물을 받으려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에 서 있던 열 살 난 남자아이가 자기 뒤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발이 더 추워 보였습니다. 남자아이는 모자를 벗어서 여자아이의 발 앞에 던져 주며 “자, 그 위에 발을 올려 놔. 그러면 좀 따뜻 할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기다리는 이 여자아이에게 이 한 마디 말은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194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는 총독부의 지시로 인해 전통으로 내려오던 크리스마스 장식과 카드 교환을 금지했습니다. 기숙사 학생들은 전에 없이 썰렁한 성탄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학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기숙사 사감 김일순 선생에게 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좀 올라오시래요.” 김일순 선생이 미관 2층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 곳에는 몇몇 학생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김옥길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문이 닫힌 것을 다시 확인하더니 커튼을 누군가가 젖혔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여러 가지 카드와 크리스마스 장식품이었습니다. 할말을 잊은 사감 선생은 그냥 학생들만 쳐다보는데 모두들 숙연한 표정 가운데서 유독 김옥길만 웃고 있었습니다. 김옥길은 일제가 씨를 없애고자 무궁화나무를 교정에서 다 뽑아버리자 아무도 모르게 그 중 한 가지를 꺾어 기숙사 자기 방에서 키운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평안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탄절기가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차이가 있는데,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고(마 2:1-12)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가실 사실(마 2:13-15)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만유의 주요 왕으로 오셨으되 자기 백성으로부터 배척 당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를(1-7절), 천사들의 찬송(8-14절), 목자들의 경배(15-20절)를 다룹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땅위의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 왕들에 의해서는 경배 받지 못하시고 배척 당하셨지만 구유에 나신 예수를 영접한 것은 세상 왕이 아니라 목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에 나타난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 때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인데 이 사람은 B.C. 27-A.D. 14년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꿉니다.
로마인 입장에서만 보면 이 황제는 정치를 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한 정치 및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점령지 문화와 풍습을 그대로 보존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며 그 자신이 건축가로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황제로 있을 때 평화가 지속되어서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로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최고의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칭호를 받아들여 자신이 종교의 최고 자리에 앉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피살된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 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호적’이라는 단어는 ‘아포그라포’로 ‘등록하다, 기록하다’입니다. 이 문서는 세금 징수를 위해 만들어진 기록부로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가서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마리의 남편 요셉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이곳을 관할하고 있었던 사람은 B.C. 12년에 집정관이 된 구레뇨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찾은 요셉은 이 동네가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다윗의 동네(삼상 16:1)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동네로 예언된 곳입니다(미 5:2).

우여곡절 속에 전쟁터나 다름없는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동분서주했지만 산모가 거할 방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이 가까워 오는데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이미 로마 관원들과 군인들이 장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미 다 잡아 가지고 숙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집이 없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는 태어나고, 하는 수 없이 밖이 훤히 보이는 그런 장소에 말이 먹이를 먹는 나무통에 뉘였습니다.

예수가족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부자였다면 어린 예수가 이토록 가난하게 태어날리 없습니다. 돈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방을 구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목수일로 지내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이 계집종에게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마 1: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훗날 산상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가난하게 자란 예수님은 가난한 처지의 사람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이나 로마의 관원들이 아니었습니다. 목동들이 양을 치다말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나의 방에 머물고자 하십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비워줄 방이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실 지 모릅니다.
그렇게 어여뿐 아기라면, 그분이 구세주인데 얼마든지 우리 집에, 나의 마음의 방에 머물게 하겠다고 장담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13절까지 열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리고 14-30절까지 주인이 떠나면서 종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의 결론이 나옵니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42-43절 이렇게 말합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 아기 예수는 안 계십니다. 그러나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들이 남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있습니다. 여러분 굳은 일 해야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 마세요.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감옥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는 추위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캐럴이 울리는 화려한 상점 앞에 한 어린아이가 남루한 옷에 다 떨어진 신을 신고 상점 안을 황홀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상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어느 여인이 아이를 보고 손을 잡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새 신발과 따뜻한 옷을 사주었습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렴.” 여인의 말에 아이는 여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아이의 말에 여인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냥 하나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이란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가족인 줄 저는 벌써 알았어요.”
나를 스스로 죄어오는 감옥에서 벗어나 구유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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