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벧전 4:7-10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 사람입니다. 이 장군이 멕시코를 점령하러 와서 바야흐로 싸움을 걸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멕시코 군인은 많고 자기네 군대는 적고, 정세가 불리해요. 그러자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는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기네가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외쳤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래놓고 진군을 명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이겼습니다. 중국 속담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넘는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이제 하루도 아닌 12시간정도만 남았습니다.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나 평가하고 결산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때에 가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꼭 한해가 끝날 때쯤에 가서야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 때가 되서야 그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가서야 인생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항상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에서 ‘항상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긴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끝나게 되는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천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알고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재림의 때를 사도들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다만 언제 그 날이 올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긴장을 풀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인 삶’ 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이 그토록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러한 종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천년 전에 살았던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가까운 것입니까?
설령 우리 세대에 우주적인 종말이 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길어야 몇 십 년 안에 우리 삶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 삶을 결산할 날이 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 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말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해야하겠습니까?
한해의 마지막이 다 가고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기도하라.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루가 가고 어떻게 일주일이 가는지 정말 정신 없이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절대로 정신 없이 쫓기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부지런 한 것과 조급한 것은 반대입니다.
잠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시지만 마귀는 뒤에서 우리를 몰아갑니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있어도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살면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도를 놓치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든 맥도날드는 ‘따르는 삶’이 있고 ‘쫓기는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쫓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살면서도 조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사람이 기도하면 부지런해집니다. 기도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기도하면 목표가 생기고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사니까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이 세상의 압력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조급해집니다. 평소에 기도생활을 잘 하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기도생활이 흐트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져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기도가 삶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도가 언제 더 필요합니까? 큰 일이 터질 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사울 형의 그리스도인이 있고 다윗 형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건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항상 조급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인간적인 생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은 다윗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기도할 때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새해를 잘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Ⅱ. 사랑하라.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열심히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열심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A.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진정한 사랑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교회에 마마를 앓아서 얼굴이 심하게 얽은 여자와 결혼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금슬이 좋은지 잉꼬부부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집사님에게 ‘결혼을 결정할 때 부인의 얼굴이 얽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사랑스럽다 보니 속속 들어간 곰보자국에 복이 소복소복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단점이 있고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단점 때문에 오히려 더 마음이 애틋해지고 감싸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허물이 눈에 보이고 거슬리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허물이 잘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것을 꼭 들추어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모임에 데려다 놔도 거기서 허물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단순하게 기뻐하며 축복을 누리는데도 자신은 축복이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것도 병입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확실한 치료약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대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을 보면, 자기 안에서 모순을 느끼고 스스로 죄책감과 정죄감이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죄인중의 괴수니라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쳤나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이런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절대로 남의 허물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초대교회는 교회 건물이 따로 없고 가정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온가족이 믿는 가정들은 대개 자기 집을 개방해야 했습니다. 수시로 성도들이 와서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합니다. 또 교회안의 과부들, 고아들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섬겨야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어느 곳에 가든 그리스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정이라면 사역자들이 언제 오든 방을 내주고 대접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대접하고 섬겨야 할 일들이 많겠습니까?
여러분, 열심히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대접을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대접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식사 준비하는 것을 비롯해서 사람들을 가정으로 초청하여 대접하고,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는 일들이 다 대접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접을 하되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원망 없어야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는 원망이 안 생깁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고 계산이 앞서니까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은 대접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접을 열심히 하면서도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원망 없이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대개 세 가지를 후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더 참을 수 있었는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좀 더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하는 것입니다.
결국 더 용납하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후회로 남게 될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도 남의 허물을 들추고 비판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종말이 가까웠는데 내 것을 주장하고 베푸는데 인색하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이제 한해가 다 가고 있는데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을 넘기기 전에 용서하고 용납합시다.

Ⅲ.봉사하라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은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곧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내 몸도, 내가 낳은 자식도, 나의 아내도 남편도 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시간도 물질도 내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해를 보내면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일년동안 맡겨주신 것들을 얼마나 잘 관리해왔는지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나라의 부흥을 위해 사용하라고 공적자금을 맡겨주셨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유용하지는 않았는지 계산해보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삶을 마치는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계산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날 마나 결산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청지기로서 살고 있습니까? 한번 점검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관리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그래서‘일 주간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날들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의미로 일주일 중 하루를 떼어 주님께 드립니다. 주의 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가 하나님의 날임을 인정하는 표로 경건의 시간을 구별하여 드립니다. 만일 주일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경건의 시간도 가질 수 없이 바쁘다면, 틀림없이 주님과 관계없이 바쁜 것입니다.
또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물질이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었지만 내게 일할 수 있는 몸을 주시고 힘과 재능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생명을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과 십일조생활은 청지기로서의 기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되어야 다른 영역에서도 청지기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청지기로서의 삶을 점검해보시고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찬송가 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찬송을 작사한 사람도 참 여러 종류입니디다. 저는 수도원 같은데서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찬송가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341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게오르그 노이마르크(1621 ~ 1681). 독일 태생.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을 가지고 가던 중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완전히 털리고 빈털털이 신세로 몇 년 동안 유리 걸식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궁중 시인, 사서, 문서국 장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후에 또 한 차례 실명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결코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신앙 안에서 주옥같은 찬송시를 많이 남겼다.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찰스 스페드릭 웨이글(1871 ~ 1966). 미국 인디아나 주 태생의 목사. 원래 음악 아카데미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나 전도자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순회 전도자로서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였다. 한편 그는 순회 전도 사역 때문에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는데, 본 찬송시는 바로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 <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다”는 뜻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갔다가 상을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파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남은 6개월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대개 이런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소홀했던 관계를 돌아보겠다’ ‘등지고 있는 사람과 화해하겠다’ ‘꼭 해야하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하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청지기로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만 마지막 날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게 될 때 후회 없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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