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1. 비유(11) – 진정한 부요) / 본문 : 눅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소크라테스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희랍이 낳은 세계적 철학자인 플라톤(B. C. 427-347)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약관 28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 하던 플라톤은 스승을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가장 정의로우며, 가장 선한 사람이었다!”라고 찬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에 그는 12년이나 긴 세월을 실의와 절망과 허무에 싸여서 이집트로, 시실리로, 이탈리아로 돌아다니며 방황하였다. 나이 40이 되어서야(B. C. 387)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철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감사합니다. 첫째는 내가(야만인이 아닌) 희랍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보다도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소크라테스 시대(age of Socrates)’에 태어난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한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요,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너무 빨리 태어나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 더 말세 때에 나지 않은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휘테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일 설교할 때마다 그 주에 있었던 일 중에 꼭 한 가지씩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 지역에 큰 태풍이 몰아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최악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자 성도들은 오늘 아침만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날 아침에도 여전히 감사기도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과 같은 최악의 재난이 항상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 합니다”

제가 선교회하며 주앙교회를 개척한 것을 아닌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분들이 물어보는 것이 “성도가 몇 명인가요?”입니다. 저도 다른 분들에게 똑같이 물어본 경험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야! 너네교회 몇 명 나오냐?” 그렇게 물어보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는 정말 나의 뜻을 전달했느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느냐?”라고 질문하실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찬사람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한 사람이 무례하게 말씀을 가로막고 자기 형이 자기와 유산을 나누려 하지 않으니 형에게 명해 재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1-12)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형과 제산분배 문제로 예수님께 자기 일을 해결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잡혀가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비장한 각오로서 전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이 사람의 부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탁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의 부탁이 배경이 되어서 예수님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비유로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부자가”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풍년이 들어 곡식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출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나누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곡식을 쌓아둔 부자의 생각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와 똑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오늘 밤이라도 거두어 가면 그렇게 쌓아둔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입니다.

재산의 오용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시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시 14:1, 53:1).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자는 재물에 사로잡힌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구약의 어리석은 사람과 신약의 물질에 빠진 사람을 똑같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재산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이 사람도 무신론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실질적인 무신론자인데
마치 이 사람처럼 자기 재산 찾으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축복만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어리석습니까?
자신의 물질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 주신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6)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재산을 오용합니까?
재산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우리를 자기 몰입, 물질주의, 다른 이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빠뜨립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의 일(선교)을 못합니까? 바로 이 물질 문제가 대부분 영향을 미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너뜨린 다음에 작은 아이성에서 참담한 패배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일로 옷을 찢으며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유를 찾아보니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쟁에서 얻은 것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대패한 것입니다(수 7장).

솔로몬을 망하게 한 것 역시 사치하다가 삶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드리려 한 것을 드리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물질로 하나님을 속인 결과입니다(행 5장).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돌아간 한 형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 갔고”(딤후 4:10). 바울은 이후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성경은 돈 자체가 악이라거나 재산 그 자체가 악을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잘못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성경을 오해하여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처럼 행사하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공유 재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사유 재산을 존중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제 팔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고 합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임의로 취하면 안 되고 다른 사람도 나의 재물을 임의로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에게서 재산에 대한 해결책은 재산의 축적이나 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재물을 온전히 평가하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어리석은 이유
예수님께서 어리석다고 하신 진짜 이유는 단순히 재물의 남용에 잇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어리석은 주된 이유는 재물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재물 때문에 잊어버린 그의 영혼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결국 없어질 것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가치와 내 물질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랍비 한 사람이 나귀등에 닭 한 마리와 천막 그리고 등불을 싣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할텐데 이미 날이 어두워 길가에서 유숙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가는 한참 떨어진 것 같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커다란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서 자리를 잡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을 읽고자 등불을 켰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잔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는 성경을 덮고 기도를 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천막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을 깬 랍비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날마다 꼬끼오 소리로 나를 깨워 주던 닭이 어찌 오늘은?’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 랍비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나무에 묶어 두었던 닭과 나귀는 맹수에 찢겨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행 중이라 지치고 피곤한 자신에게 왜 이런 변고가 생겼는지, 은근히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했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생각하니 이젠 화가 났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닭과 나귀가 참혹하게 찢겨 주는 그때에 자신은 곤히 잠을 잤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살아 있구나 내가 살아 있어 하나님은 내게서 닭과 나귀를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 살려 주신 것이었구나! 하마터면 난 감사해야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불평을 할 뻔했구나. 난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게야. 노아처럼.”

하나님께 대한 부요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이 세상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물질문명에 도취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별로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는 생각은 현대인의 향락적 가치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진 성공한 사람처럼 살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평가해 볼 때 어리석은 삶은 아니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1) 어리석은 부자는 마지막 종말과 결산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고 현실만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하고 부유한 삶을 살 때 마지막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고 살기 쉽습니다. 우리가 일회적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값있게 살려면 언제인가 종말이 찾아오고 그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어리석은 부자는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부자는 삶의 목적이 겨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동물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였습니다. ‘나’란 말이 무려 6번 반복됩니다. “내가 어찌할꼬.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2 이하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3) 어리석은 부자는 사명이 없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왔다가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삶이 가장 고독하고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만이 참으로 길이 남을 값진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떡과 잔을 가지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나의 살이요,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상에서 자기 생명까지 남김없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고독하고 비참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고상하고 행복한 사람은 남을 섬기고 봉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선교사 왕 박사는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에 자기의 소유물을 도둑에게 모두 잃었다. 잃어버린 물건들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신문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코트와 양복과 셔츠를,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나는 예수님의 의의 옷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돈을 다 잃어 버렸지만 하늘나라 은행에 예금해 둔 나의 재산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책도 잃어 버렸지만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넣어둔 성경구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설교 원고를 다 잃었지만 아무도 나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는 절대로 도적해 갈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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