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신부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0. 비유(10) – 준비하는 신부들) / 본문 :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준비된 신부를 맞이합니다. 신부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세계의 풍습은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신부가 신랑을 위해 준비해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신랑집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시집가지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시집가는 것을 대충 생각하고 성의 없이 준비하는 것은 신랑을 모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물이나 패물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을 존중히 여긴다면 신부는 단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이 되면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제일 아름답게 꾸미고 결혼식장에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재미있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부와 신랑,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본문(엡 5:25-30)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부부 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를 교훈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가르치면서 바울은 부부의 관계, 신랑 신부의 관계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빗대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관심은 부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예수님, 예수님과 교회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윌리암 바클리’라는 유명한 성경 주석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40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한 다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사람들 눈에 허물 투성이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때 좌절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백 만인의 애인이라고 불리웠던 노만 빈센트 목사는 ‘교회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고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합니다.
왜! 교회에 그런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도 21세기에는 교회에 희망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서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준비된 신부(교회, 나)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전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많은 곳에서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버지 다음으로 전능자로 왔으니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고만 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 “배워서 남 주냐?”그랬습니다. 너 자신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착각을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주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입니다.
태국에서 코끼리가 눈물을 흘렸답니다.
코끼리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걸고 코끼리 울리기 대회가 있었답니다. 발로 차고 간질러 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지만 코끼리는 눈만 깜박거릴 뿐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코끼리 귀에다 데고 뭐라고 하고 오니까 코끼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코끼리 귀에다 뭐라고 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코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한국 가서 목회 할래!”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론 목사님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목회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제 동기 목사님이 한 분계십니다. 이분하고 이야기할 때 목사가 참 좋은 직업이야! 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보통 직장생활해도 그만한 어려움과 고통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목사만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살기가 힘듭니까? 제가 일산에서 협동목사 할 때 그곳 목사님은 부교역자들을 주일, 월요일 날도 모두 출근을 시킵니다. 보통 교회는 월요일에는 교역자는 휴무입니다. 이유인 즉은 모든 성도들이 평일날 일하고 교회 와서 봉사하는데 왜 교역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선교회 일하는 것은 제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제가 다른데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고 저도 좋으니까요? 문제는 나를 위한 것이냐, 주님을 위한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열처녀 비유’는 성경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하나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부분입니다. 이 비유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비유임과 동시에 읽고 의미를 새기면 새길수록 다양하고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열 처녀가 있는데 다섯 명으로 구분합니다. 딱 절반입니다. 반은 지혜롭고 반은 지혜롭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섯 명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었기 때문이고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지만 모자랐고,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집의 문이 닫힙니다.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호소입니까?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으며 신랑은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주님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이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열 처녀는 처음에는 비슷해 보였습니다. 동일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은 함께 갑니다. ① 먼저 열 처녀들은 모두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초청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열 처녀는 모두 초청을 받았습니다. ② 그리고 모두 이 초대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초대했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마 22:1-14) 이 여인들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③ 신랑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1절)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똑 같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신랑이 오자 순식간에 유사점들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차이점이 들어 납니다. 다섯 처녀는 등잔에 기름이 있었고 다섯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8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장면입니까? 여러분! 아주 처음부터 없었다면 별로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더 기다리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는데 떨어져 가는 것을 눈으로 보아야 하는 처녀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를 한번 낸 적이 있는데 대전에 가서 사거리 신호가 파란색이 되어서 악세레더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코란도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면 계속 달리거든요. 그래서 저도 빨리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밀리고 밀려서 계속 앞으로 차가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차가 서야 하는데 안서는 겁니다. 꽉 브레이크를 밟고 눈으로 보면서 앞차를 쾅 받는데 너무 너무 안타깝더라구요. 바로 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데 알고도 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중에 제일 경계해야 하는 말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름이 떨어져 가는 이 처녀들에게 예수 믿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갔습니까?
분명히 예수 믿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록 떨어져간 기름이지만 그것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에 있었습니다. 초저녁까지는 당연히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기름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종종 기름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이 기름이라면 성령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또 성령을 사러가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름은 내적인 표현입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 이 변화는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본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준비가 안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등잔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등잔은 하늘의 기름으로 채워져 계속해서 밝게 타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덜된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자녀들은 빛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두움으로부터 하나님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혼인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준비하는데 넉넉한 기름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와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기름이 떨어져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속히 안 오시기 때문에 초저녁에 금방 올 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쳐갑니다. 기름이 떨어져 갑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IT시대에 맞게 빨리빨리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요즘 성장하는데는 참 좋은 성격입니다. 그러나 쉽게 지칠 수 있다는 데는 맹점입니다. 교회도 다녔던 사람이 많습니다. 나가서 전도해 보면 교회에 한번도 안 다녀 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교회에 가서 쉽게 축복 좀 받아보려고 했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상 형편의 때를 맞추어 기도회도 해야되는 것도 있지만 입시철만 되어서 자녀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보면 저는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더 많습니다. 건강해야 되구요. 하나님이 늘 지켜 주셔야 됩니다.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나의 복을 빌기 위한 무속 적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첫째, 우리 안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8-9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그랬습니다. 기름이 준비되었던 여자들이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 여인들이 인정이 없는 그런 여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준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해야 할 그 날에는 너무 늦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셋째, 신랑(주님)은 예고 없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고 없이 오시기 때문에 주님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제 장모님을 모시고 우리 집에 계신데 심심하시니까 경로당에 가시라고 했더니 경로당에 가기 싫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제 아는 사람이 다 죽어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모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함께 공부했던 분들 중에서 여러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제 핸드폰 번호에서 더 이상 전화 받을 사람이 없어 제가 지우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나도 이 세상 사람에게 그렇게 되겠지요.
여러분!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그 때에 주님을 등불 들고 맞이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참고 –
1. 그리스도의 신부를 단장시키는 영적 미장원이다 (고후 11: 2-3).
가) 목욕시킴 (행 2:38).
나) 향기로 단장함 (계 5:8).
다) 세마포를 입어야 함 (계 19:7-8).
라) 단정한 성품으로 단정함 (벧전 3:4).

2. 교회는 믿음의 가정이다 (엡 5:23-24).
가) 아내는 가장에게 순종함 (24).
나) 신랑은 신부를 사랑함 (25).
다) 정결함으로 (27).

3. 그리스도의 군병을 무장시키는 훈련장이다 (엡 6:14-17).
가) 머리에 구원의 투구.
나) 가슴에 의의 호심경.
다) 허리에 진리의 띠.
라) 발에는 복음의 신.
마) 왼손에 믿음의 방패.
바) 오른손에 성령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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