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9. 비유(9)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본문 :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가장 유명한 비유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간혹 잘못 전달되어지곤 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두 남자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의 비유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는 개인의 선행을 통해서 나아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통해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결론은 오직 두 번째의 방법뿐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임을 말해줍니다.

극단적인 대조
10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몇 번의 일을 통해서 바리새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게 되어있지만 당시 바리새인은 그렇게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평가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수효는 많지 않습니다. 한 시대에 약 3,000명 정도입니다. 특별한 계급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자랑거리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높은 계급과 사회적으로는 랍비(선생)의 반열에 있었으며 율법적으로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지키는데 주력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바리세인이었고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리를 가리켜 “악하며 돈만 밝히고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며 로마의 앞잡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리는 가능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로마가 고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국가도 팔아먹는 파렴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를 언급한 것은 우리로 보면 마치 독립군과 친일파를 비교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가 11-12절에 나옵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아주 당당하게 따로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장로님석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처음에 왔는데 잘 몰라서 교회 앞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안내원이 오더니 “이곳은 장로님 석인데요” 그래서 다른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또 오더니 “이곳은 성가대 석입니다.”그리고 또 옮겼더니 그곳도 지정된 자리라고 하여 교회를 그냥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정된 자리가 있는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스펄전의 한 제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해 스펄전 앞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극화시켜서 갑옷을 입고서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이제 마귀는 어디 있습니까?” 이에 스펄전은 “마귀는 그 갑옷 안에 있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이 거짓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다른 사람들의 것을 물래 훔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일주일에 두 번씩은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 평가에 동의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장 뛰어난 인물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과 사람들은 친분을 맺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집에 초대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 중에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대법관이나 판사를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들을 위한 기도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세리가 볼 때 이들은 멀리 서서(13절)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히 세리는 이들 옆에도 갈 수가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가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을까요?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슴을 칠 일을 많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심한 대조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신분으로 볼 때는 귀족 대 천민이요, 행동으로 볼 때는 자랑스러움 대 수치스러움이요, 자기 평가로 볼 때 자부심 대 위축감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판단은 같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정 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론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결론을 맺고 계신 것일까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상반되게 나왔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두 번째 사람은 세리입니다. 누가 보아도 표면적으로 쉽게 결론을 낼 것입니다. 우리보고 판사와 도적을 비교하라면 결론은 다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표면적인 것만 보고있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의 판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말만 십일조이지 자신들이 드린 제물을 자기들이 관리하며 사용목적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속임수인지도 모릅니다. 간음의 문제도 속임수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도 세리라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어쩔 수 없이 세리노릇을 하고 있지만 병이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도 있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좋은 일을 하는 세리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또한 세리를 무조건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도 안됩니다. 분명히 세리는 유대민족 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세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중에 누가 스스로 의로우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이 기도는 성경에서 제일 짧은 기도중의 하나입니다. 한글로는 딱 다섯 마디, 헬라어로는 여섯 마디입니다. “@O qeov”, iJlavsqhtiv moi tw’/ aJmartwlw’/.”(호 데오스 헬라스데티 모이 호 하말톨로오)

언어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품사 : 동사, 명사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장의 형식 : 1형식 (주어 + 동사)
예문 : 나 배고파
여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품사 : 부사, 형용사, 부사구, 형용사구, 부사절, 형용사절..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장의 형식 4형식, 5형식 (주어 + 동사 + 목적어 + 목적어 + 또 목적어 + 많은 목적어) 그리고 (주어 + 동사 + 목적어 + 목적 보어 + 또 보어 + 무지하게 많은 보어. 보어.. 보어.. 그들은 하도 보어를 많이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주어와 동사를 잊어버린다. 이걸 보통 치매라고 부른다.)
예문 : 밥 달라면 항상 밥이 나오는 줄 알아요? 내가 무슨 식당이에요? 주문한 대로 나오게.. 슈퍼마켓인 줄 알아요? 아까 밥을 하기 시작한 것을 못 보았어요? 아직 한 시간 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까짓 밥 몇 끼 굶으면 죽을 것처럼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여성들은 주로 의문문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답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들은 아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꼬박 꼬박 대답하다가는 정말 맞아죽는 수가 있다.)
조언 :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디 조심할 것.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해 봐’ 했을 때 말을 잘 못 알아들은 줄 알고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하다가는 어디가 부서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전화를 왜 했어요?’ 했다고 다음에는 전화를 안 한다면 그 때는 정말 죽는다. 아… 남자가 여성에게서 살아남은 길은 무지 험난한 길이다.

이중에 핵심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모이 호 하말톨로오)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a sinner”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the sinner”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moi tw’/ (나와 그)라는 말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함께 번역하면 문법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나 원문은 이러한 문제를 개의치 않고 사용합니다. 이 뜻은 나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그”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죄인이며 나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어설픈 의를 나타내 가지고는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께 나타내어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완전한 죄인임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의인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함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최초의 인간이자 죄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에 자신들의 생각을 어설프게 하나님께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들은 주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성경에서 의인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딱 한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직접 칭찬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0:4, 42:6)
이사야 에게서도 비슷한 장면을 보게됩니다. 그는 환상 중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고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랑이나 자부심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오히려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이사야에게 천사가 제단 숯불을 가져와 그의 입술에 대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주변의 세계를 보고 불 경건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망대에 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나타나시자 하박국은 아무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 촛대 가운데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발 아래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고”(계 1:17)라고 말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시은좌(施恩座)의 은혜를 통해서만
세리의 기도 여섯 마디 중에 “@O qeov”, iJlavsqhtiv moi tw’/ aJmartwlw’/.”(호 데오스 헬라스데티 모이 호 하말톨로오) 첫 번째 ‘하나님’과 마지막 단어인 ‘죄인이로소이다’ 사이에 “불쌍히 여기옵소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번역된 헬라어 ‘헬라스데티’는 언약궤 위에 놓은 “시은좌”를 가리키는 동사형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시은좌를 이리로 돌리소서”입니다. 이 뜻은 “나를 속죄제로서 시은좌 위에서 흘려진 피를 통해서 나아오는 자로 여기소서”입니다.
파스칼은 “나는 의인, 위인, 성자의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림으로써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시온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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