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0.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 본문 : 요 10:40-42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만 뽑아 말할 때 7대 강화라고 합니다. 이중에 요한복음 10장은 마지막에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장 1절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언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은 예수님의 언어적인 도장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목자와 양의 비유,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해 목숨을 주고 거짓 목자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푸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이것 싸주세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워 주셨어요. 언니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이 목걸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니?”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여기요. 이것이 전부예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목걸이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돈이었습니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소녀 몰래 정가표를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푸른 목걸이를 내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파신 물건이 맞나요?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가게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예쁜 소녀였지요.”
“그 아이에게는 이런 보석을 살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러나 가게 주인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잊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19). 그 중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20).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합니다(31).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는 피신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금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인지는 마태복음 3:5-9에 보면 나옵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편한 장소로 오세요.
당시 유대광야는 모이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치는 은사집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흔히 했던 축복성회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를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는 논리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은 자력 있는 쇠붙이처럼 무섭게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겼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기갈 상태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고있었습니다. 지금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이 되어서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놓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것이 얼마나 묻었는지 보려면 거울에 비쳐보아야 합니다. 또 밝은 빛에 비쳐보면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니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들어가지 않으면 죄를 모릅니다. 마치 빛이 없어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남들 앞에서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극히 가벼운 것들입니다. 내놓아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만 죄라고 인정할 뿐입니다. 진짜 깊은 죄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본인 자신도 무서워서 꺼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의 죄를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깊은 뉘우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고백과 더불어 지난날의 죄에 메여있던 죄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합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가 빠져 나오지 않고는 아무리 은혜 받고 싶어도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죄가 노출되면 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물러가듯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순간 물러갑니다.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그룹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인입니다.
엣세네파는 결혼하지 않고 은둔과 경건주의 삶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를 두었고, 사해 근방에 모여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본 작업을 했습니다. 이 그룹은 예수님때 제일 예수님과 충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은둔과 성경필사에만 매달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자주 예수님과 충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엣세네파와 달리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분리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육체의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과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그룹이면서 공회원 그룹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은 바리새파와 아주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모세 오경만 믿고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타락한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인기가 높고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경나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봐야지! 이것들이 모여서 뭐하나?”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나도 성경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교회에 왜 다녀야 되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경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강한 어조로 이들을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렇게 외친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경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유머입니다.
1등급 = 암소집사….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 양 집사….목사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 막대기집사….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 비행기집사….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
5등급 = 미꾸라지집사….요리조리 잘도 핑계 대며 빠지는 사람
6등급 = 개구리집사….아무 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구,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 염소집사….질투하는 자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 서서잡사….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등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러분! 사람이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장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어도 안됩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본성 나올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사람들은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당시 유명한 세리들이 또 질문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억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군인들이 또 묻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강포하지 말라”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나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가 할 일입니다. 더 할 수도 없으며 더 한다고 말해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례요한은 매우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똑 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슷한말을 다른 성인들도 했습니다. 타종교에도 사람의 근본과 윤리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1절 …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바로 이 장면 때만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치고 교육시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선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으로 피신 오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에 세례요한에 의해서 뿌려졌던 복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동내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신 어떤 설교나 능력 행하심이 없습니다. 본문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는 바로 마 3:1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 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우리 옆에 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눈만 뜨면 아일리쉬 옆에는 캐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큰 충격이 있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요 나는 몸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네가 샴 쌍둥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