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1) 씨와 결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1. 비유(1) – 천국비유(1) 씨와 결실) / 본문 : 마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 마음속에 별 하나를 갖고 태어난 데요.
반짝반짝, 뾰족뾰족 예쁜 별이요.
우리가 자랄수록 별도 무럭무럭 자라죠. 그런데 그 별은 …
우리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맘속에서 핑그르르 돈 대요. 왜 나쁜 짓을 하면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마음속의 그 별이 돌기 때문이래요. 별의 뾰족한 부분이 맘을 찌르는 거죠. 그렇게 우리가 나쁜 일을 할 때마다 별은 계속 돌아가요. 그런데,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한 사람은 하나도 안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맘속에 사는 별이 계속 돌면서 뾰족한 부분이 다 닳아서 그런 거래요. 닳고닳은 별은 조금씩 작아져서, 그렇게 우리 맘에서 죽는 거래요.
별은 사람처럼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착한 일을 하면 별은 다시 자라난 데요.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별은 잘 자라고 있나요?

복음서에서 이적과 표적은 약 30여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자세히 나누면 49개 주제별로 크게 분류하면 27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적 중에서는 병 고침이 약 22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납니다. 다른 표적으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 오병이어 등의 이적입니다. 이 모든 이적사건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비유의 말씀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에 오르시고 사람들은 해변에 둘러앉았습니다. 당시에는 음향시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예수님은 등지고 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람을 타고 해변에 둘러 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천국의 비유
이렇게 많은 비유들 중에 첫 비유의 말씀을 만나려면 신약성경을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읽기 시작하여 12장까지 4분의 1을 읽은 다음에 비로소 오늘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13장에는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데 13장에는 한 두 개의 비유가 아니라 무려 7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천국비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라도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전달하러 오신 것인 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 앞에 왔던 세례요한도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마 3:2).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 5-7장은 천국윤리로 8-12장까지의 이적들은 천국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국복음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씨 뿌리는 비유’로 잘 알려진 오늘 본문입니다.

씨와 결실의 비유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의 비유제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또 어떤 분은 “씨와 밭”으로도 말합니다. 모두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씨와 결실”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지는 목적은 결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결실이 없다면 씨뿌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위해서 우리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늘 첫 비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친절하게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 설명 부분은 10절부터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즉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집나간 둘째 아들,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기뻐했을까요?
“아버지”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싫어했을까요? 큰아들?
아닙니다. “살진 송아지!”
딱딱해진 마음을 풀고 말씀에 열중하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마음의 유형은 길가인 사람입니다.
4절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입니다.
길가는 씨를 뿌려서 결실 치 못하는 땅입니다. 길가는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땅입니다. 순수했던 마음위로 세상 철학이 지나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배웁니다. 잘못된 지식이 지나갑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폭력과 상업주의 적으로, 물질 만능의 세계로 흩고 지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딱딱한 마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완악한 마음은 죄입니다. 로마서 1장은 이런 사람들을 잘 나타냅니다. 로마서 1장 22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으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새들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 죄의 결과입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탈진하여 초죽음이 된 갈릴리 나사렛의 한 목수를 둘러싼 채 마구 구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채찍질은 명령이었습니다. 이 나사렛의 목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죽어 가는 자에게 침을 뱉으며 쾌감을 맛보는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군병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군인들은 마음이 딱딱한 길가인 사람입니다.

두 번째 마음의 유형은 얄팍한 사람입니다.
5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씨가 떨어지면 묻히기는 하는데 깊이 묻히지 못하고 살짝 덮이게 되어 해가 나면 쉽게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설명에서 20-21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선교회를 20년 이끌어 오면서 선교하겠다고 온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까지 온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교하겠다고 나름대로 작정하고 왔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정말 참 사람은 얼마 못 만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없으면 가버립니다. 선교는 하되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 때문에만 교회에 오는 분들은 위험합니다. 처음 접근은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끝까지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선교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가 즐겁게 해주면 많이 오고 주는 것이 없고 재미없으면 안 옵니다. 우리 주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해야하지만 자신의 기쁨만을 구하면 안됩니다. 얄팍한 신앙은 결국 무너집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마음의 유형은 세상에 빼앗긴 마음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있는지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심지어는 교회 나오는 목적도 재물을 얻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도 잘 들어보면 그 내용이란 자신의 재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문제는 재물을 위해서 아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도 교회도 이 일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마 19:23),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저는 처음에 ‘바다 이야기’가 텔레비전을 통해 나왔을 때 잘 몰랐습니다. 우리 집에서 교회 오는 길에 보면 ‘바다 속으로’라는 음식 집이 있습니다. 바다의 계를 파는 작은 음식 집입니다. 그래서 바다 계가 또 무슨 음식감염처럼 문제를 일으켰나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성인오락실에 있는 사행성 게임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래가 나오면 아마 대박인 것 같습니다. 제일 높은 점수로 딴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데 그 고래라는 놈이 나오기 전에 상어가 먼저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상어가 나와서 왔다갔다하면 이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자꾸만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자꾸만 더해집니다. 지금 가게가 잘 되기 때문에 주일에 비우는 것을 염려하신다면 조심해야 됩니다.

네 번째 마음의 유형은 열린 마음입니다.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은 열린 마음으로서 옥토가 씨를 받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 함과 같이 복음을 받아들여 이와 같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수고를 해야 열매를 맺는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열매맺는 조건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도자에게 완전한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말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겠어요. 그분이 비참하게 될지도 모를 선교지로 나를 보내 실까봐 두렵거든요.”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춥고 눈 오는 날 아침에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반쯤 얼어붙은 채 당신이 있는 유리창을 쪼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어린 새가 당신에게 붙들려 자신을 먹여 주도록 완전히 당신의 통제하에 그를 맡겨 버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 손안에 움켜쥐고 눌러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피난처와 따뜻함과 먹이와 보호를 베풀겠습니까?”
전도자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가씨의 두 눈이 빛났습니다. 여러 해 후 그녀는 다시 그 전도자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교지에서 일하게 하셨어요. 이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열린 마음만이 복음을 받아 결실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 문이 열려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옥토와 같이 열린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땅이란 그 본성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딱딱한 땅을 갈아엎으시고 바위를 들어내시고 가시떨기를 뽑아버리십니다.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눅 18:20-27).
이 광경을 보고있던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가 엄청난 것을 인식했습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같은 표현을 마태복음 19:26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들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되는 일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열매는 절로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절로 되는 것입니다. 나무 자신이 피고 싶고 맺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만을 바라보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됩니다.

미국의 카놀 산도스씨는 60세에 파산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산도스씨는 자살할 생각으로 밤늦게 병원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찬송가 432장이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 주 너를 지키리 / 주 날개 밑에 거하라 / 주 너를 지키리 ~~”
찬송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꿇어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산도스씨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새 출발에 대한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에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통닭 집을 운영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도스 치킨입니다.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시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고있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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