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8. 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 본문 :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인도북부에 라자스탄주(Rajputana)가 있습니다. 196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복음의 황무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몇 백년 동안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사역을 했으나 진정한 교회 토착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양선교사들이 중심을 이룬 중부지방 뱅갈로르와 함께 인도가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열왕의 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인도 시골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박한 어머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아치아마’입니다. 어느 날 아치아마는 부엌에서 일을 하다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화덕의 연기나 매운 양념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치아마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아들 중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기미가 보이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치아마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 중 하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그리고 이 때부터 매주 금요일이 되면 비밀리에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지 3년 반이 지났습니다. 기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리고 병약한 막내아들(K.P. 요하난)만 빼놓고 아들들은 남인도 케랄라 니라남 부근에서 평범하게 사는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막내는 수줍음을 잘 타는 소심한 아이여서, 교실에서 책 읽을 순서가 되면 항상 떨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혼자 놀았습니다. 구석진 곳이나 집안에 있는 곳이 더 편했습니다. 운동이나 학교활동은 회피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막내가 남들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요하난이 16세가 되던 해에 아치아마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OM선교회 전도팀이 이 지역 교회를 방문해서 멀리 있는 인도 북부에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요하난은 40kg밖에 안 되는 작은 몸은 전도팀이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말할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인도 북부(라자스탄, 비하르)에서 복음을 전하다 구타당하고 돌에 맞았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도에서 오래된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인도는 페르시아만과의 해상무역 덕택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주후 52년에 크라나고어(Cranagore) 근처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는 도마보다 200년 먼저 살고있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인도의 60만개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요하난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해 여름 단기선교 여행팀에 자원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통비를 넉넉히 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해 수련회에는 참석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련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안에 홀로 있었지만 홀로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온 몸을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는 침대옆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 일생을 바치겠나이다.”기도했습니다.
K.P. 요하난은 영국인 아내 기젤라(Gisela)라와 결혼하고, 현재 아시아복음선교회(Gospel for Asia) 설립하여 10,000명 이상의 인도내 자국인 선교사를 돕고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누군가 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자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아치아마처럼 나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앙교회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멀리서 온 분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던지 아니면 우리들의 자녀가 가야합니다. 바로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는 못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지옥불의 경험을 단 1분만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일 것입니다. 일단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정해놓은 예배와 기도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김상호라고 하는 공군 중령의 자기간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실수로 인하여 하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여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꼼짝 도 못한 채 누워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대로 제일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합니다. 이 가죽이 다 벗겨지고 이 말초신경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아들은 지켜보면서 귀에다 대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천번 죽고 천번 사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픔이 있다는 걸 몰랐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내게 주십사고, 너희들의 고통을 다 내가 걸머지고 그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기를.” 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지옥 불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신다면 반드시 복음을 전하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0:9-15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전해야할 긴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은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우리의 힘으로 변경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지옥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아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사단의 소리를 듣게됩니다. “사실 예수 믿고 죽어도 지옥가지는 않아! 그리고 길이 있어…” 그러나 성경은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토저(Tozer)라는 신학자는 예언자적인 말을 했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수준 이하에 머물고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
교회의 지도력이 주 예수로부터 멀어질수록 이 세상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은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운동을 시작하며 가진 이상은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 구호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우리 주앙교회에 “주앙교회 성도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진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다.”는 책망을 들으면 큰일입니다.
1983년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을인줄 알았던 40개 마을이 힌두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궁금하실 겁니다. 누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을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해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표면상 그리스도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그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선교용어로 “쌀 그리스도인”(rice Christian)이라고 말합니다. 먹고 살 수 있는 쌀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바꿉니다. 이런 일이 인도에서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럽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은 유럽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습니다. 쌀 교인이 다 나간 것입니다. 그나마 명목상 그리스도인까지 합해서 유럽은 17.84%만이 개신교인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아프리카는 24.90%입니다. 이런 일은 인도나 유럽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도 1995년도에 19.6%이었는데 2005년에는 18.3%로 줄었습니다. 쌀 교인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떡과 고기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500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요 6:1-13). 이들은 몇 날이 못되어 그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쳐대었습니다. 아무도 목숨을 내걸고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현장에 없었고 나중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에게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장사지낸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입니다.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임으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6: 42-43, 46).
그러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한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끌기 위해서 먼저 먹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전하고 나중에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 6:26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릇된 동기에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리들이 영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광하는 무리가 아니라 진정한 제자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모두는 하나님께 파송받은 선교사입니다. 자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지난주에 뭐하셨나요?” 선교사가 되어서 기도하지 않고 선교할 수 있나요?
요하난이 8살 된 북인도 소년에게 예수를 전할 때 했던 질문입니다.
“너 학교 다니니?”
“네 다니고 있어요.”
“학교에는 왜 다니지?”
“공부하러요.”
“공부는 왜 하니?”
“똑똑해지려고요.”
“똑똑해져서 뭐하려고?”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잖아요.”
“왜 좋은 직업을 얻으려고 하니?”
“그래야 돈을 잘 벌지요.”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먹을 것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지요.”
“왜 먹을 것을 사니?”
“살려고요.”
“너는 왜 사니?”
그 질문에 어린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더니, “아저씨, 내가 왜 살지요?”하고 되물었다. 그런 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아니면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채우는 것인가? 아니면 그럭저럭 살다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던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의 제자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체적으로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그분의 입술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눈은 그분의 눈이, 우리의 손은 그분의 손이, 우리의 소망은 그분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아내와 자녀들도 예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의 돈과 재능, 교육 등 모두 그분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받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본문 19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와 누가도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
(막 16:15)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 24: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은 전체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일체를 설명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또한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제자를 삼았으면 해야될 일이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를 주고”입니다. “세례”란 이전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옛 사람은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엔 나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 복음)”입니다(막 1:15, 16:15, 마 4:23).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로 나타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5:39, 20:31).
이 두 가지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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