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중보 기도(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7. 예수님의 중보 기도(1)) / 본문 : 요한복음 17: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절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잠시나마 함께 하셨던 이 세상의 추억을 안고 하나님께 가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는 너무 젊습니다. 이제 한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죽음의 길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셨던 때는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하실 일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왔다는 것을 이미 세 번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점점 강도가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해산을 인해서 근심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되면 기쁨이 있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림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되기보다는 부활을 인하여 더 큰 기쁨이 다가올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L. Morris)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요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당시의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입니다(요 6:35, 37, 44, 65). 우리도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들에게 주신 자가 뫘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 제가 이 어려운 설교를 여러분에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거하기를 원합니까?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산타크로스의 선물 보따리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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