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 눅 2:1-20

1) 캄캄한 밤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선지자를 세우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400년 동안에는 선지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 모든 인간이 이와 같이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겔 34:12]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이런 캄캄한 땅에 예수님께서 구원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망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지금 어떻습니까?
모두가 다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소유에 눈이 멀었습니다.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캄캄한 밤에 어둠을 가르고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구원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2)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하도많은 도시를 놔두고 왜 가장 작고 초라한 이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 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베들레헴입니까?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의 표상입니다.
[눅 2: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맏아들을 낳아 구유에 뉘였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이지 침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후일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4) 그런데 메시야 예수님을 누가 만났습니까?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아무도 창조주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자들이 어떻게 메시아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본문 8 절입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다가 천사들에 의해서 가장 먼저 메시야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목자로 이 땅에 오신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양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둠 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렘 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약속의 말씀대로 양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목자가 아닌 선하신 목자로 오셨습니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양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실 때에 백성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또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려고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4.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 본문 :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 ‘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은 창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드셀라와 에녹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인간의 죄의 문제는 그대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죄의 문제도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쫓겨나던 그 때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다시 예언해 주셨습니다.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에서 힌두교 승려한 사람을 알게되어 함께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그만 개미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개미를 밟아 죽였습니다.
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개미들이 우리조상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선교사도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그래서 승려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승려는 한참을 개미굴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개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 4:24 “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히 11: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요 14:27).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셔서 참 평안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다 그만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일은 끝까지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중간에 헤어진다면 그 사랑을 끝까지 한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결론입니다.
사랑도 끝까지 해야 합니다.
복음도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믿음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늘 함께하십니다. 요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함께하신다구요? ‘영원토록’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지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요. 보통 때에는 하나님을 잃고 살다가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느끼지는 않는지요.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귀여운 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아빠, 나 오늘 에버랜드에 놀러 갔게, 안 갔게?” “갔지!” “어 아빠! 어떻게 알았어?”라며 딸을 신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아빠! 나랑 엄마랑, 그리고 친구 엄마 두 명이랑, 친구 둘하고 같이 갔게, 안 갔게?” “같이 갔지! 여섯명이” 아이는 “우리아빠 천재다 천재… 어떻게 6명이 갔다 온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빠, 그 에버랜드에서 5월이 어린이 달이라고 어린이들에게 곰 인형을 선물로 주었게, 안주었게?” “주었지!” 그러자 딸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도 이건 못 맞출 거야. 그러면 그 인형이 검은색이게 아니게?” “검은색이지!”
그러자 이제는 아빠가 아니라 신처럼 생각하고는 “아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에버랜드가 용인에 있게? 다른 곳에 있게?” “용인에 있지!” “아빠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지” 아이는 눈물까지 흘렸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이 딸의 질문을 맞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더 쉬운 일입니다.
이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해 볼까요? 맞혀보세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게 아니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게 안주셨게?”, “참세를 하나님이 기르시게 안기르시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시게 모르시게?” 더 이상 무엇을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임마누엘’은 주님과 同苦同樂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루지 마십시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다닌 것하고 주님을 영접한 성도하고는 다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리고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라고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는 것,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청소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바구니에 예쁜 십대 소녀의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가끔 장난기 있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빼내려고 보다 사진 뒤에 이렇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으나, 나 자신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차례입니다. 절대 후회 없는 삶, 그것은 주님께 우리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3.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1, 계19: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도 보냈었고, 왕도 세웠었고, 예언자도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다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최종적으로 친히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즉 종으로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전에 마지막으로 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서서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을 받고 왔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제사장, 선지자, 왕, 예언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역할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왔던 이분들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켜 제퍼슨은 ‘만일 하나님의 거룩한 도서관이 되어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서 없어지는 날이면 우리는 가장 불행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또 앤드류 잭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서 있다’고 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모든 영토는 버릴지라도 성서는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만 전해주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친히 그의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한 말을 자신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을 지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표현하기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고 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운동경기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렇게 하니까 안되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운동선수는 “그럼 네가 해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가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김장환목사님의 아들 중에 김요셉목사라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서 학교에 가면 혼혈아라고 놀려주니까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아버지보고 미국학교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는 한국 놈인데 왜 미국학교에 가려고 하느냐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결혼문제를 놓고도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고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Korean-American 신부를 얻어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아서 이름을 성경적인 이름으로 지어보려고 애썼는데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다가 에베소서 6장에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읽다가 순종으로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들이 어떻게 순종이냐 잡종이지!’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는 것입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 재물이 되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대요.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러면 그 동안 많은 선지자, 왕, 예언자들이 왔는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그들의 어깨가 으쓱했지요. 얼마나 신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로 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와서 얼마나 좋습니까? 암행어사가 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암행어사가 섬기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벌주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러 온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결코 암행어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잘못을 찾아서 벌을 주러 오셨다면, 또한 그것을 지적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만 했다면 그 전에 왔던 선지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 분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말씀의 핵심
예수님이 전한 말씀이 왜 복음입니까? 한마디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소망이 없는 구제불능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유에서일까요. 어느 나라에서나 꽃과 풀은 아름다운 전설과 이름을 따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밤에 피는 ‘달맞이꽃’을 토속어로는 ‘도둑놈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잠든 밤에 피는 것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자식 이름을 딴 ‘봉선화’나 ‘옥잠화’ 같은 것은 그런 대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 된 꽃 이름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여우오줌’, ‘쥐오줌풀’, ‘코딱지나물’ 이것도 모자라 ‘개불알꽃’, ‘홀아비X’ 등이다. 외국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의 꽃 이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한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꽃’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음을 삭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 어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냉동 창고 회사에서 어느 경비직원이 3교대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 순찰을 돌던 중 엄청나게 큰 냉동 창고들 중에 한 창고의 문에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한 그는 급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창고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만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대형 냉동 창고의 문은 밖에서만 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갇히고 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냉동실의 온도가 떨어지고 몸은 추워오고 산소가 부족해져서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날것같이 생각되었지만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음 근무를 교대하러 온 경비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여느 때처럼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경비는 한 고장난 냉동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장난 냉동고 안에는 얼어죽은 동료 경비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고장난 냉동실 안에서 사람이 얼어죽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시체를 부검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죽여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리고 공기가 부족할리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산소부족으로 죽은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정신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냉동실이 고장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경비는 스스로 온도가 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밀폐되어 있는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공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정말로 그를 얼어죽게 하였고 질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정신적인 세계가 무서운 것임을 이 사실로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은 이렇게 자포자기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주님께서 내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망설이는 자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저는 하도 못하는 집에서 살아서 조금 잘사는 집 사람의 아이들만 봐도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요. 옛날에 시골에서 잔칫집, 초상집, 제사지내는 집에서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떡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권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옆에서 떡 하나 더 가져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동쪽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주위 친구들은 놀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들이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하고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살 되었을 때, 교회 젊은 목사가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벤 후퍼는 새로온 목사님을 보고 싶어 교회에 갔습니다. 가끔 교회에 가도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가 마치기 전에 살짝 빠져나오고 했는데 이 날은 설교에 빠져서 그만 넋을 잃고 있다가 사람들과 함께 나오게 되었는데 벤 후퍼를 본적이 없는 목사는 “네가 누구의 아들이더라?”하고 말했습니다. 순간 주위의 분위기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 벤 후퍼는 도망가듯이 뛰어나갔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 “나는 네가 누군지 안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주변 사람들은 더 얼굴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맞아 너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답게 휼륭하게 살아야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재선되는 영애도 누렸습니다. 벤 후퍼는 말하기를 “내가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러 왔다는 이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무엇을 전파합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줌마들이 모이면 전파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누구누구는 어땠드라 하면서 안 좋은 일들을 들추어 내어 전파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은 그들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이 말씀을 전파할 것을 받고 오신 분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그리고 이 명령을 실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재림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2. 나의 재림주이신 예수님) / 본문 : 히10:37-39

어린아이들은 부모님과 헤어지면 불안해합니다. 어린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고 누구나 가까운 사람과 헤어진다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헤어짐의 슬픔이 작아집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떠날 때는 반드시 자녀에게 언제 온다고 말하고 떠납니다. 다시 만나기 때문에 그 때까지만 참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오늘 본문 히10:37절에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플로리다해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바캉스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 틈에 한 중년의 사나이가 몸을 잔뜩 움출인체 앉아 있었습니다. 허술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과 굳게 닫힌 입술의 사나이에게 한 소녀가 접근해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아내가 나를 맞아줄 것인지 불안하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오늘 출소할 것인데 나를 받아주겠다면 집 앞의 커다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으라고 했소. 만약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오”
승객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참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참나무에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먼저 그분이 우리를 다시 만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혹시 나의 욕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교회가 주앙교회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만 보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눅18:1-6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이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한 과부는 그에게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으로 호소했습니다. 재판관은 계속해서 이 과부가 찾아와 자신을 괴롭힐 것을 생각하고 처음에는 그 여인의 간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들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8:7-8)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지 명확히 하셨습니다. 우리의 원한,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가 다 용서했는데 우리의 원한과 억울함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개인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기주의적인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고 자신만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는 하지 않으십니다. 미국의 16대 링컨 대통령은 당시의 남북전쟁이 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참모가 와서 “하나님이 우리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북쪽이나 남쪽이나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그 참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는 구원을 받으나 사단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 값으로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까? 죄의 뿌리는 아주 깊어서 서로가 의심하고,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그리고 인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 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죄를 가져다준 사단을 멸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재림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13:40-43, 마19:28, 마24:30, 막8:38, 막13:6-7, 눅12:35-40, 눅18:8, 요5:28, 요12:48, 요21:22-23). 천국이 싶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도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318번 언급되어 있는데 특히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재림에 대한 예언이 거의 8배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기초하여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소망을 그의 모든 서신에서 증언했습니다(롬8:19-24, 고전15:22-28, 51-57, 고후5:9-10, 엡4:30, 빌3:20-21, 골3:4, 살전4:13-17, 5:1-11, 살후1:7-10, 딤전6:14, 딤후1:18, 딛2:13).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의 핵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벧전1:7, 4:5, 13, 5:4-10, 벧후3장). 베드로전서는 마지막 때 임할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고 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1:10-11에서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재림을 믿지 않으신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거나 기독교인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두 믿느냐고 문답을 합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만 기록된 책입니다. 21장 중에서 18개장들이 구체적으로 재림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재림에 앞서 있게되는 교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4장부터 18장까지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19장은 재림 자체를 묘사한 것이고, 20장은 천년 왕국에 대한 것이고, 21장과 22장은 우리가 가게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토록 정확하게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헬라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은 필립 2세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상한 신하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꼭 한가지만 맡아서 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이 신하는 왕의 침소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큰소리로 왕을 깨웁니다. “대왕마마! 오늘이 어쩌면 대왕마마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왕이 깜짝 놀라서 깨어난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오늘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지. 내가 이렇게 잠에 취해 있을 수 없지.”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아침 식탁에 앉으면, 이 신하가 이번에는 아주 흉측하게 생긴 해골을 갖고 식사를 하고 있는 왕의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왕은 연신 그 해골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결국 썩어질 육신,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야지. 먹고 마시는 일에 귀중한 인생을 낭비할 수 없지.” 왕이 식사 후 집무할 때 이 신하는 그 해골을 들고 이제는 왕이 집무하는 책상머리에 갖다 놓습니다. 왕은 틈틈이 해골을 바라보면서 집무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 맞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어차피 썩어질 육신, 청렴결백하게 살고 공평무사하게 일해야지.” 왕은 어디를 가든지 그 신하가 가지고 온 해골을 보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성전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1. 나의 성전이신 예수님) / 본문 : 요2:13-22

우리는 가끔 어부출신들인 제자들만을 기억한 나머지 제자들이 무식한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17절은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69편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를 떠올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말씀을 기억하여 연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연상하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는 산헤드린공의회 회원들이나 대제사장이 가만히 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장차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때마다 제자들은 정확히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청결사건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이상한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예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데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 자체를 문제삼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을 트집잡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목숨을 건 성전청결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초기부터 왜 이토록 부담스러운 언행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며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이제부터 복음을 전하시면서 만나게 될 모든 일정을 미리 확정지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준비하시고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고 하셨습니다. 목숨을 이미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도둑이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상벨? 경찰? 아닙니다. 할머니라고 말합니다. 할머니가 ‘그래 나 죽여라, 나 죽이고 훔쳐가라!, 나 죽이기 전에는 못나간다.’ 소리를 치시면 도둑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죽음을 겁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금요일 저녁에 체포하여 밤 세도록 심문을 했지만 죄목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전청결사건 때 하신 말씀을 책잡고 나왔습니다.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마26:61),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라고 고소했습니다. 죄를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던 가야바에게는 더 없는 죄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과 이 때 하신 말씀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교부 폴리갑은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장에 끌려가서 마지막 죽음을 당하기 직전, 핍박자들은 지금이라도 신앙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늙은 폴리갑은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80여 년간 살아오는 동안 우리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일이 없었거늘, 지금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리요. 나는 이대로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순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셨습니다.

왜 성전을 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처음 만든 것은 광야생활 가운데서 였습니다(출25-30장). 이 때는 정확히 성전이라고 사용하지 않고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외형적인 모습을 성막이라고 부르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속죄제와 각종 제사가 드려질 때 비로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실 성막을 만드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한대로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이 일러 주신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언약궤와 진설병상, 금 촛대 등 성전 안에서 제사드릴 때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방법을 가리켜 주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6장에서 성막과 휘장 만드는 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성막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 제사드릴 때 필요한 물품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 또한 하나님이 시키신 방법대로만 해야지 조금도 임의로 드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러한 제사드리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된 책입니다. 아론은 레위기 9장에서 첫 번째 제사를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론은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흠 없는 수송아지와 양을 잡아 드린 것입니다. 첫 번째 제사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번제물과 기름을 하나님께서 불로 사르셨습니다. 이를 보고 온 백성이 소리를 지르고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광경을 보고 너무 흥분할 탓일까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다가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이 땅에 임재하실 때 이렇게 엄격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민수기는 왜 이스라엘민족의 숫자를 세었습니까? 성막을 보호하고 행군할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성막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셨는데 하나님은 만일 누구든지 성막의 근처만 와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민3:38).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은 이 땅의 중심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곳은 죄인인 인간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을 더럽히고 망가트린 그곳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격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 갔으면 여호와의 불이 나와 모조리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마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이때부터 예수님을 잡아죽일 궁리만 하게된 것입니다.

사흘 동안에 일으킨 성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성전’은 ‘나오스’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성전’을 말하는 ‘히에론’과 다른 뜻입니다. 즉 구약의 성막을 ‘히에론’이라고 한다면 성전은 ‘나오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 ‘나오스’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고전3:16, 17, 계3:12)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예배할 참 성전이셨던 것입니다(요4:20-24).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건축 중에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바른 자세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헤롯이 건축 광이었고 유대인의 민심을 잡으려는 마음에서 건축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B.C.20-19년에 성전 재건에 착수했고 그 후 헤롯이 완공하지 못하고 알비누스 총독 시대(A.D.62-64)년경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13:1)대로 A.D. 70년에 철저히 부서졌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재건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내면적인 성전을 말씀하신다면 이들은 장막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습니다.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당시 헤롯에 의해 동원된 인원은 약 18,00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많은 인원을 가지고 46년간이나 공사를 했는데 아직까지 마치지 못한 성전을 어떻게 사흘만에 세운다는 것인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황당무계한 조롱의 말로만 들렸던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이 말씀을 이해하고 믿었습니다(요2:22).

6.25전쟁 중 우리 나라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고,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 나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라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 땅에 임재하신 곳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창3:8). 그리고 아담의 범죄 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에덴동산을 아담(사람)에게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에덴동산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에 아담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떠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광야에서 모두 죽일 수 없어 모세의 간곡한 기도로 이 땅에 임재하시기를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출25:8)을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방법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임시거처로 이 땅에 머물러 계시던 하나님은 친히 성전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안에서만 속죄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된 것입니다.

AIDS에 걸린 어느 여인의 병실에 목사님이 문병을 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목사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병실의 침대 옆에 예쁜 여자아이 사진을 발견하고 “저 아이가 누구지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제 딸인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그럼 저 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대답하기를 “저는 제 딸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어떤 죄도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가 필요할 뿐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성도들을 모두 성전인 것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다시는 더럽히면 안됩니다. 더럽히는 그 자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회개한 성도는 하나님이 친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임재하셔서 거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0. 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1-11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에서의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대륙에 상륙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주(移住) 후,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첫 번째 추수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처음부터 감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사실 추수한 것이 풍족했던 것이 아니라 겨울을 나려면 어림없는 곡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이제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이 부족한 것으로 어떻게 겨울을 날수 있냐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한 소녀가 많은 사람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그 부족한 상태의 추수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곡식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그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 때였던 1789년도에는 11월 25일로, 1863년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추수감사절 날에는 전쟁을 쉬자’라고 제의한 링컨 대통령 때에는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지켜 오다가, 1941년 미국 의회에서는 11월 넷째 목요일로 지키자고 결의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시험을 받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서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욕심이 감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황소의 거대한 몸짓을 본 개구리가 황소처럼 되어보겠다고 바람을 마셔 배를 부풀게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고깃덩어리 하나를 훔친 개가 다리를 건너다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 고기를 빼앗겠다고 짖다가 그만 물고 있던 고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만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과 병자, 불구자는 감사하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이상하게 그분들이 더 감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농사짓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만 바라보다가 자신이 농사지은 것이 없어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고,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악착같이 노력하여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북사람이 부자가 많다고 합니다.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씨도 북한에서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내려왔던 분입니다. 미국에는 유대인들이 재계, 정계, 예술계의 중요한 위치는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교육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총학생수 16,700명 중에서 4,500명, 26.95%가 유대인이고, 예일대학교 총학생수 10,000명중에 3,000명이 유대인이며, 보스턴대학교 25,000명중에 5,000명이 유대인 재학생이 있습니다. 미국 6개의 명문대학의 20%을 유대인이 차지합니다. 자식 농사는 역시 교육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강태공도 “좋은 전답을 많이 가졌다고 자랑 말라! 그것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것보다는 적더라도 기술을 하나 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견고한 보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농사를 잘 짓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확실한 방법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주어도 그것만으로 추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비가와야 하고 햇빛이 비추어야 하고 밤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농사만를 짓던 시절의 풍습은 풍년이 되게 해 달라는, 사실상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지으신 아버지가 농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난주에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만일 시험문제를 낸 분이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묻는 제가 이상하지요. 당연히 100점 이상일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이면 이제 농사는 100% 보장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절대로 농사를 망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농사는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농사는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주인이신 그분이 농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부터 이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날씨가 맑고 늦여름 밤에 이슬이 내리는 기후이기 때문에 포도재배에 알맞은 곳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수세기 동안 자라왔습니다(렘31:5, 암9:13). 그런데 왜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참’이라는 말을 강조 하셨을까요? 참 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성경시대에 사람들에게는 번영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논 몇 마지기 가지고 있느냐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미4:4) 한것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말한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 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회복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 상품의 포도나무는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3),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하였습니다.
들포도는 머루와 같이 작은 알맹이의 포도를 말합니다. 아주 형편없어진 포도입니다. 이런 포도는 돼지나 들짐승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것은 영적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들 포도처럼 되어버린 하나님의 영혼들을 참 포도나무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대로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들 포도나무 같이 제멋대로 엉킨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더불어 쓸모 없던 내가 쓸모 있는 모양으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mevnw(메노) “거하다”의 이 단어는 오늘 본문 안에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알 수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가지에만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지만, 떨어져 나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가지는 잘라내는 것입니다. 과수원 농사를 해본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봄에 가지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잘 보존하여 열매를 더 잘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열매가 없는 가지는 잘라냅니다. 다른 나무는 목재나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데 반해 포도나무는 오직 포도열매를 맺기 위함이기 때문에 열매가 없으면 잘라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거할 수 있는 수액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이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붙어있을 수 있는 비밀은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고 하셨습니다.
지난 8월 영국에 갔을 때 브리스톨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시는 분이 차를 몰고 따라오는데 참 운전을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목사임은 ‘영국에 오신지 얼마 안 되는데 운전을 잘하십니다.’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저는 영국 길을 몰라서 그 때 목사님 잃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쫓아간 것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미 있는 두 가지 예식을 행합니다. 세례식과 성찬예식은 모두 예수님과 이제부터 하나가 되는 거룩한 성례식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우리이제부터 이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예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헬라어에는 말씀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로고스’와 ‘레에마’입니다. 로고스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이고 ‘레에마’는 로고스가 역사하여 내 안으로 불같이 들어오는 뜨거운 말씀을 의미합니다. 성경책에만 기록된 말씀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속으로 그 말씀이 찬란한 햇빛처럼 밀고 들어올 때, 바위를 깨뜨리는 빗방울처럼 스며들어올 때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대예배에서 헌금위원을 맡은 한 집사님이 헌금바구니를 돌리는데 초라한 차림의 한 맹인이 10만원 짜리 수표를 세 개나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깜짝 놀라 나중에 그 맹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라고 헌금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지난번 이 교회 사무원한테 한달 전기료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30만원 내외라고 하더군요 보시다시피 저는 소경입니다. 볼 수 없으니 전깃불도 필요 없죠 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육신의 어두움보다 훨씬 심각한 영적 어두움을 밝혀주는 교회사역을 위해서 조금씩 절약해 모은 돈으로 매달 그만큼이라도 하려구요”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모두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밖에 버려 불태워지는 가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있어 절로 열매를 맺는 축복된 가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9.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1-13

오늘 본문 요한복음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자신의 복음서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까?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시작하고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며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로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라면 바로 예수님도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0)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 이적의 사건을 2장에 기록하는데 이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표적)인 것입니다. 요2:1-12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갈릴리 가나 지역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곳에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잔치인지는 모르나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제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일가나 친척의 결혼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잔치에 충분히 있어야할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하객들이 많이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예수님은 이적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켜 준다고 믿고 예수님께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 없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가까운데 가서 포도주를 사올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예수님께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하인들에게 직접 포도주를 사오라고 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난감한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처음에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 여섯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보시고 그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히 채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은 아구까지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2:8)고 하셨습니다. 흔히 ‘물이 변하여 보도주가 되어라’는 기도나 주문 등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퍼다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포도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의 맛은 다른데서 구할 수 없는 맛을 내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적(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신 것을 첫 번째 이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분은 창조주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 많은 인도자, 제사장, 선지자, 예언자 등이 왔다 갔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은 예언을 한다든가 교훈을 주거나 인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을 말하다가는 오늘밤을 세워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 동안 설교한 목사로 남겠지요?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저에게 신앙 상담으로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편지를 종종 받습니다. 제가 왜 주일날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는지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그분이 누구 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저에게 온 메일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 목사님께 e-mail로 문안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충남에 사는 김.. 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문의 드립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성경은 예수님을 기록한 것인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또한,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되는데, 아니 공관복음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에 의심이 갑니다.
과연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인가조차 이해가 안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가 과연 단순히 god을 의미하는 것인 지요? 외국에서나 학계에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설은 정말 신화로서 받아드리는 것인 지요? 우리가 아담과 하와로 인해 죄인인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나요?
저는 하나님은 존재하고,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이든 신앙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님이 인간이었기에 불자들이 믿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러나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 신학으로서의 견해로서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사실을 안다는 것은 무리지만요. 저는 안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제가 교회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단지 저희교회 목사님께 누가 될까봐서 입니다.
이영제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다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제가 자꾸 이런 갈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으며, 제가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또한 소개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이분뿐이겠습니까? 우리 또한 이러한 궁금증과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 나는 아닌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저 교회에 와서 고개나 끄덕이다가 평생을 지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서 확실히 믿음이 있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1)고 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아닙니다.
위의 분의 글에서 한가지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신학으로서의 견해’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신학이 예수그리스도를 창조주로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처럼 그런 성인의 한 분으로 예수를 믿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믿음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언 듯 볼 때 신앙이 깊으신 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이 꼭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그분만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신앙으로서가 아닌 신학으로 대답해 달라는 이분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의도 속에 나타난 생각은 ‘신앙’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을 신앙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설교했다고 해도 만일 그런 식의 설교를 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상담을 하신 분이 미리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로서가 아닌, 즉 배운 대로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대답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한 개인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셨고 그분과 동행하셨습니다. 다음 성경의 구절들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3:35)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요8:26)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8:2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5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
이 정도면 믿으시겠습니까! 요한복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나타납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42번이나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장으로 되어있는 요한복음 중에 17장에 걸쳐 나타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한이 자의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께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 비밀은 하나님께로 오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에게 생명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6일만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1850년 12월 6일 주일,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 때문에 교통이 두절 됐습니다. 한 소년이 날씨 때문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따라 그 교회목사가 출타하여 한 평신도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을 앞에 두고 그 평신도는 더듬거리며 이사야 45:22의 말씀을 봉독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서툴렀습니다. 그런데도 소년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문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내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소년은 괴로웠습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평신도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그대는 매우 곤고해 보이는 구려. 그럴수록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의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소년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일평생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후일의 위대한 설교자가 된 ‘찰스 스펄전’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그 자체로도 힘이 생깁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 구원시키는 것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생명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우리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고 말합니다. 천지의 창조와 천사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은 육체로 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사용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없는 것도 창조되는 힘이 나타납니다. – 할렐루야 -

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7. 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히 2:14-18

오늘은 486주년이 되는 종교 개혁주일 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스스로의 모순 속에 접어들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이 낳은 신학자요 천주교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당시 천주교의 부패성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걸고 어두워진 영적 암흑기 속에서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때를 기념하여 드리는 주일예배(10월 마지막주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상태에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 된 종’ 즉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종이란 의미는 “노예”를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종의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로부터 구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곧 유대인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된 종 외에 정말로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종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때로는 개나 짐승만도 못한 것이 종입니다. 그래서 종은 사고 팔 수 있는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25:44-46).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5장, 신명기 15장에는 노예에 관한 제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전을 섬기는 종의 제도에 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진짜 노예는 어떤 것입니까?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그런 법이 있었겠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할 때 그런 법이 통했겠습니까? 이런 혹독한 노예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노예가 됩니까?

1. 전쟁의 포로입니다.
성서시대 근동지방에서의 최초의 노예는 전쟁에서 졌을 때 한꺼번에 거의 모든 부족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 까지 모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적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이에 비하면 노예로 삼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개선된 상태로 말했습니다(민31:7-35, 신20:10-18, 왕상20:39, 대하20:8-15).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20)고 했습니다. 죽일 것을 살려준 것이니 이들이 인간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노예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단에게 지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우리를 죽여야 하는 것인데 잠시 살려둔 것뿐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종으로 삼아 부려먹기 위함입니다. 이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비참한 것이 노예이며 종입니다.

2. 채무 노예입니다.
성서시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어서 노예가 되는 주요 원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출21:2-4, 신15:12). 만일 도적질을 하다 걸리면 노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물건을 변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출22:2). 빚을 값기 위해서 노예가 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과 같이 합세한 사람들도 빚진 자들이었습니다(삼상22:2).
우리들은 하나님께 빚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값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노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출애굽기 21:32에 의하면 30세겔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우리의 빗을 대신 값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고 하셨습니다.

3. 상속된 노예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고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비참한 것이 노예상속자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해결할 수 없기에 노예가 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예는 상속되었습니다. 노예가 주인 소유이기 때문에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역시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후에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출21:4, 레25:54).
이와 같이 우리가 죄에게 노예 된 것 역시 아담으로부터 상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적인 죄에 매여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8)고 하십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지난 (2000년) 9월말 교황청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전통성을 지닌 교회이며, 개신교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츠 라칭거 추기경이 발표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 이란 36쪽 분량의 선언문은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교감을 가진 주교들에 의해 주도되는 카톨릭교회만이 유일한 참된 교회”라며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의 법통을 이어온 교황의 지위, 사제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찬의식을 개신교회는 인정치 않고 있기에 개신교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회가 아니라 “교회적 공동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은 그동안 “자매교회”로 불러온 개신교를 “교회적 공동체”로 부르라는 지침을 각 국 카톨릭 주교회 의장들에게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할 당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당시의 내용은 현재까지 대부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변했다고 하는 것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그런 정신이 남아있습니다.

1.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 성경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되자는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교황이 성경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10세가 베드로 대 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이것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지요.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 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 것 같아 염려됩니다.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교회인데 그곳에서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려면 돈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게되면 얼마를 헌금할 수 있는지 미리 써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를 한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교회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속죄권을 판 로마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할 일입니다.

2.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 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는 불교나 힌두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H 대학에서 “사이버시대의 문화와 종교”라는 세미나를 하는데 저에게 기독교 쪽 발제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불교, 천주교 등에서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단순히 학문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여 참여해도 그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타종교 지도자들과 한자리에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인데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저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목사입니다.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고 했습니다.

3. 종교개혁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으로 된 일이지 마리아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할 여인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는 성도에게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 몰라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 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합시다. ‘돈’아닙니까? 그리고 또 솔직해 집시다. 그 돈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돈으로 천국을 살 수 있습니까? 잠시 이 땅에서 편안하게는 살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지 모릅니다. 너무 많으면 그 돈 때문에 오히려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유대인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떤 유대인 노인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이 옴을 알자 자신에게 있는 3만불을 어떻게 사용할까 걱정하다 유대인 선생인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만불을 헌금을 하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랍비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유대인 노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주교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내 비록 유대인이지만 신부님께 천국가기 위해서 기도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천주교 신부도 응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확신이 오지 않아서 더 안전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개신교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현재에도 로마 카톨릭이 범했던 위험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카톨릭처럼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일먼저입니다. 성경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건물이나 선행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앞서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도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한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진정 내 신앙은 그들의 모습을 닮고 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준 이 고귀한 해방의 자유를 다른 것으로 막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올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8.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 본문 : 출12:13, 고전 5:7-8

“내가 애굽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유월절(逾越节)의 ‘유월’이란 말은 원어의 ‘페사크’인데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 즉 ‘넘어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이 절기는 니산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이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부터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습니다. 이 절기가 무교절입니다(출12:1,27, 레23:4-14, 민9:2-14, 신16:1-8). 그러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습은 세계 최고의 절기로 기억되어 남아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3천년이나 지켜온 절기로 이렇게 오래 된 절기는 세계에서 유월절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후에 유월절은 국가적 축제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중에 20세 이상 된 남자는 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 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일년 내내 유월절에 가기 위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습관화되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인 남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역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 중 제일 먼저 오는 절기로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로 이어집니다(출12:2).
유월절이 생겨난 것은 애굽 왕 바로가 9번째 흑암 재앙을 만나고 모세에게 양과 소 떼만 남겨 두고 다 가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짐승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쫓아내면서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림으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내듯이 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는 무서운 장자 재앙이 임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9가지 재앙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는데 이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이 마지막 재앙을 내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이 내릴 때에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통곡이 있을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바로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찌니라”(출12:13-14)
유월절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발랐습니다 천사가 그것을 보고 유월(넘어감)하였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유월의 ‘페사크’는 ‘지나간다, 넘어간다’의 뜻도 있지만 ‘용서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가 있는 집은 유월하신 것은 곧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나라 가운데 처음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1-13)
이 날의 밤은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는 긴 밤이었습니다. 장자가 있는 집들은! 아니 장자가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신,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다음 집으로 넘어갑니다. 만일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으면 그 집의 장자는 사람과 동물 모두 죽는 것입니다. 비록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있었다고 해도 뜬눈으로 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 날밤 애굽 전역 집집마다, 왕의 아들부터 종의 아들까지 장자는 모두 다 죽임을 당했으므로 집집마다 초상이 났습니다. 옆집에서 나는 죽음의 통곡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피해간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찌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세계최초, 최고의 절기가 된 것입니다.

둘째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430년 간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감격의 날입니다. 유월절에 해방된 것이 아니고 해방된 날을 유월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어린양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 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우리 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36년의 치욕적인 강제 통치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방 운동의 불씨를 집힌 3월 1일과 드디어 광복한 8.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입니다. 36년의 강제통치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430년간입니다. 올해가 루터가 개혁한지 486주년 됩니다. 우리가 그 때를 지금 제대로 기억이나 합니까? 사실 전해들은 이야기로 약간 알고 있을 뿐 잘 모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이렇게 오랜 기간을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된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셋째 언약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 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양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양은 흠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가다 해 질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묵을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3-7)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의 수효에 따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피 흘려야 되는 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 된 양, 가장 힘이 좋을 때 드려야 합니다. 가장 살이 찌고 완전할 때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씨와 힘을 상징하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미리 선택한 양을 14일간 두었다가 저녁에 잡았습니다.
죠세프스에 의하면 14일 해질 때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인 오후 3시에서 5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시뻘겋게 발랐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집집마다 피 색깔이었습니다. 이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야 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넷째 유월절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에 먹을 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에 그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8-11)
1)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는 떡입니다. 누룩을 넣어서 맛을 즐기며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여유 있게 맛을 즐기면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려고 먹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룩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제안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고 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은 누룩입니다. 너무 배부르면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날의 복음도 자꾸만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누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노예 시절을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당했던 고통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7일간 먹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이 쓴 나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노예생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허리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을 출발할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는 아침까지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급히 애굽을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12:22). 죄의 고통에서는 조금도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회개하는 것은 급히 해야할 일입니다.

다섯째 고백을 드립니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행하는 가정예식을 ‘세다’라고 부릅니다 ‘세다’에서는 네 가지 질문이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질문은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출13:8)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이스라엘 대대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한번 써 볼까요? ‘(義)’는 어린양(羊) 밑에 내 아(我)가 있는 글자입니다. 내 머리 위에 양을 올려놓으면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자를 만든 사람은 옛날 유월절을 아는 유대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을 일컬어 구약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시14:1).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했습니다. 의인은 많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기한 물건 한 가지씩 갖고 있는 삼 형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에겐 망원경, 둘째에겐 요술 담요, 셋째에겐 만병을 다스리는 사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은 망원경을 통해 왕의 담화문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낫게 해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둘째가 즉시 요술 담요를 타고 삼 형제는 공주에게 갔고, 막내가 사과를 줌으로써 공주는 나았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했을까요? 막내였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으나 막내의 사과는 줌으로써 없어졌습니다. 왕은 이 ‘희생’을 택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속죄의 양으로 드려질 때는, 사도 요한에 의하면 유월절 첫 날이었습니다. 애굽의 탈출을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 흘림과 문설주에 바른 것이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갔다면,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6.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0:1-18

성경에는 양이라는 말이 약 500번 넘게 나옵니다. 양은 창세기 4장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벨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때는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쳐 팔아먹고자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기에 떳떳하게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목자들이 오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목자는 들어가 각각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얼룩아, 순둥아, 말썽아” 그러면 양들은 신기하게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이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도매금으로 부르거나 번호를 붙여 부르지 않습니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살피며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고, 양도 목자가 자기에게 붙여준 이름을 알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우리에서 내어놓은 후에 양들 앞서 갑니다. 보통 돼지 같은 짐승들은 뒤에서 회초리로 때리며 몰아야 꿀꿀거리며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앞서가야 따라갑니다. 양은 앞을 잘 보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기에 뒤에서 몰면 오히려 두려워서 절대로 앞서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앞서가며 본을 보이면 목자를 깊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따라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제의 풍경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양의 특성을 이해하면 왜 예수님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개와 고양이 등은 쉽게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의 시력은 3m앞도 잘 보지 못한답니다. 충성스런 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울산에서 살던 분이 가끔 개에게 돈을 입에다 물려주고 푸주간에 가서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영리하여 자신이 먹고싶은 고기를 먹지도 않고 심부름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서울로 이사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깜박 잊고 개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돈을 물고 울산까지 내려가려고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탈진하여 그만 고속도로에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비나 연어 같은 동물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여행하고도 자기의 본향을 찾아가는 놀라운 방향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양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의 방향 감각에 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2.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겨서 구분이 잘 안되고 잘못 접근하면 찔리기만 합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아니면 스컹크처럼 가스를 내뿜는 다는가,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 아니면 덩치가 있던가 합니다. 그러나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달리기도 상대에게 치명적을 가할 수 있는 독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할 때의 방법이 총칼을 앞세우고 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주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3.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4.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십니다(요일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라고 하셨습니다.

5.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교훈 이단의 유혹과 타종교의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양의 주인은 자신의 양들이 알아듣는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사람과 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소리를 구분합니다. 목자가 아니면 양들은 순간 흩어져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한 상황을 피합니다.
한국사람이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데 “귀의 문화”가 있어서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의성어, 의태어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모두 시각적 언어가 발전했는데 우리만은 청각적 언어가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다(청색)’고 하고 나무도 ‘푸르다(녹색)’고 하여 시각적으로 색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청각에 대해서는 잠잘 때 나는 소리가 젖먹이는 ‘색색’,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콜콜’, 아버지와 어머니는 ‘쿨쿨’입니다. 현미경을 발견한 서양인들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숨소리를 ‘제트(z)’ 자로 나타낼 뿐입니다. 종소리도 그들은 기껏해야 ‘딩동’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땡그렁’, ‘댕그렁’ 뿐만이 아니라 아주 개인에 따라서 소리는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통합니다. ‘맴맴’울어서 ‘매미’가 되었고 ‘개굴개굴’울어서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뻐꾸기’, ‘뜸북이’, ‘부엉이’, ‘꾀꼬리’가 모두 그렇습니다. 숫제 ‘징’이란 말은 음 자체가 그대로 사물명이 된 것입니다. ‘細雨(세우)’란 말도 우리는 ‘보슬비’와 ‘부슬비’로 구분하고 제트기는 ‘쌕쌕이’ 배는 기선이나 화륜선으로 기능별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대로 ‘통통배’나 ‘똑딱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귀(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양만큼이나 귀가 밝은 민족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의 음성이 아니면 양처럼 피해야 합니다. 저는 이 땅에 아무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 생활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그리스도,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속히 떠나야 합니다. 지체할 겨를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부족한 종이 원하기는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도의 세 힌두교 학자들이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아 어느 날, 강을 건너려고 나루터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나룻배를 타자 늙은 뱃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학자1 : 천문학에 대하여 좀 알고 있습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힌두교의 철학은 아십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허! 당신은 반평생을 잃었군요.
학자3 : 당신은 힌두 경전이나 생물학, 심리학도 모르겠군요.
사 공 : 글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노만 저었다니까요.
세 학자들 : 딱하군 딱해 쯧! 쯧!
바로 이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룻배가 뒤집혔습니다.
세 학자들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사 공 : 당신들은 수영도 못 배웠소. 참 딱하기도 하군요. 당신들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소.

양은 아무능력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 같지만 삯군목자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고용된 목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닙니다.

삯군목자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양이 300마리 이상일 경우 대규모 목축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로 양을 칠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렇게 고용된 삯군 목자는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경계해야 되는 것은 이리떼나 맹수들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킵니다.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와 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17:34-37). 이런 위협이 있을 때 삯군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목자의 책임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부터의 공격은 막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2마리 이상의 이리떼나 다른 맹수들로부터 지킬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삯군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12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단순히 직업으로 택한 목사와 사명으로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교회선택이 한 목회자의 고매한 인격, 뛰어난 지식, 교회의 아름다운 건물, 집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그리고 18절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본문을 통해서만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세 번 언급하시고 18절에 다시 생명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선한 목자로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는 십자가 대신에 양이 한 마리가 올려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를 건축할 때 지붕에 한 인부가 떨어져 죽을 뻔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양떼 위에 떨어져 다행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죽으신 속죄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죽은 양하고는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서 양 자신보다 목자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① 양의 필요 ② 양의 건강 상태 ③ 양의 요구 등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기자는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으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선 여러분들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고 하셨습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기도하며 양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