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5. 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 본문 : 요20:1-18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슬람교도는 뽐을 내며 자랑합니다. 우리의 성지 메카에 가면 으리으리한 마호멧의 묘지가 있소, 당신들 예수의 무덤은 있소? 그러자 기독교인이 대답합니다. 그렇소 우리 예수님은 무덤은 없소, 예루살렘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빈 무덤이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들과 우리의 차이점이요, 마호멧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였다오,
그렇습니다. 한 종교의 교주, 성인군자,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죽었습니다. 석가도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의 가르침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도 죽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만 1년 동안 설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그 때의 제목을 보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주제나 제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으셨다고만하면 아마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패의 종교일 것입니다. 제가 어느 유대인이 쓴 글을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까지 부분적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유대인들은 밤에 죄인을 체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법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밤에 혈기가 등등한 산헤드린공의회의 수비병들과 함께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캄캄한 밤에 예수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예수께 다가가 입을 맞춤으로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을 분명히 밤에 체포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 체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말할 때 부활의 장면을 제일 처음에 목격한 마리아들과 제자들이 환영을 보았다고 부정합니다. 정말 이 부활의 사건이 제자들에 의해서 꾸며지거나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환영을 본 것일까요?
지금부터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부활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미리 계획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이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즉 우리와는 다른 그분은 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추측하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하신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뿐일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유대인들은 일주일의 기준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로부터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였고, 지금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이며 즉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께서 고쳐주신 후 예수를 따르며 봉사했으며(막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지켜보았던 여인입니다(요19:25). 공관복음에는 이 여인 외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마28:1, 막16:1, 눅23:55, 24:1). 요한도 2절에서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돌이 옮겨간 것을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제자들?)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가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급히 예수님의 무덤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3-4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요한의 세심한 기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 자신도 지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달려갈 때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한 제자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나타날 곳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이로 보아 그리고 그의 정확한 증언으로 보아 요한이 먼저 베드로보다 무덤에 빨리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6-7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마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도 이런 것을 미리 염두 해 두고 기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본 것을 증언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 증거가 됩니까? 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 누군가에 의해서 예수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당시의 최고 군대인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무덤이 지켜졌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그들에게 술을 먹여 졸게하고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보는 것 등입니다. 이 때의 문제는 예수의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한 로마 군병의 책임론으로 이 사건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마포 옷 예수님의 수의였던 것입니다.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이 입으셨던 세마포가 그대로 있는데 마치 예수님의 몸이 증발해서 빠져나온 것처럼 세마포가 그대로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렸을 때 벌래를 본 적이 있는데 벌래가 나방으로 바뀔 때 자신이 입고있던 집을 쏙 빠져나온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꼭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옷을 벗을 때는 이와 같이 벗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저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육체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신비스러운 다른 부활의 몸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는 병들지 않는, 썩지 않는, 다시 죽음이 없는 분명 그러한 육체를 입으신 것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마 실제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자매가 시집을 갔는데 남편을 의심하여 자기 것을 늘 별도로 챙겨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혼을 당하게 될 때 잘못하면 알몸으로 쫓겨나니까 미리미리 분명히 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남편은 급기야 참다못해 정말 이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댁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보니까 언니 셋이 있는데 모두 어떤 이유에선지 이혼을 한겁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가르쳐 주기를 시집을 가자마자 남편을 믿지 말고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겨놓으라는 언니들의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마포가 진짜 물증이 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체를 훔쳐 가는 도둑이 어떻게 이와 같이 수의를 벗겨놓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시체를 훔쳐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의를 벗겨놓고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 요한도 이러한 자신의 기록이 부활을 이토록 철저하게 증거 해 낼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어떤 기록이 더 있어야 이 역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마는 부활 후 첫 번째 나타나신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에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20:2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실인 것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이 없는 자는 의심이 많은 자요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남이야 더욱 못 믿는 것입니다. 결국의 삶은 불행의 연속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13:7)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부활하신,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의 증표로 믿어야 합니다.
저는 앞에서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땀을 뺐습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상은 육체를 입고오신 하나님이신 데 사실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꼭 그렇게 무덤에서 나오는 방법이 아니어도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셔야할 길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억지로 어떤(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실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 부활이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다닐 때, 몇 년이 되었는데도 사실 제 마음속에서는 이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찬송도 배우고 기도도 하고 그리고 성경의 좋은 말씀들도 대략 이해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제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과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기도원을 찾을 당시는 우리나라에 성령운동과 더불어 방언의 은사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다 찾아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기도원 목사님은 우리기도원은 저녁에 술 먹고 올라온 사람도, 강아지도(그 정도로 방언 받기가 싶다는 뜻으로) 방언을 받아간다는 기도원이었습니다. 뭐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예수님의 부활만 믿게 해 주시면 방언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해서 믿어진다면 그것을 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원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려오고 저는 힘이 빠져서 비관한 상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결국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각종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왜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빨리 은혜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통해서 저는 인내와 싶게 믿어진 결과보다는 어렵게 믿어졌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 솔직히 다 믿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방법으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첫 열매로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도들의 실제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어날 것에 대해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고 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공동번역 고전15:12)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들의 전한 복음이란 오직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습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1943년, 조국 독일에서 포악한 히틀러 정권과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본 회퍼 목사는 2년 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동료 죄수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본 회퍼 목사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2:24, 32, 3:15, 4:10, 롬6:49, 고전15:15). 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서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의 사건을 보여주신 것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바울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까?”(고전15:29)라고 반문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증표로 세례(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남)를 행합니다. 이 세례의 증표를 행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임한 것인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을 꼭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4.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8:31-4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참된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율법만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그것만이 참 진리인줄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말씀 때문에 격론이 벌어집니다.
먼저 이 “진리”라는 말(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사용된 단어는 ajlhvqeia(알레데이아) “숨기지 않음”으로 거짓, 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마22:16절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한 것 외에 모두 요한복음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비아냥거리면서 책잡기 위해서 먼저 아부하는 말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은 모르고 사용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구약 시편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6-7)라고 함으로 진리가 무너진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율법으로 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습니다.
“진리”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은 곧 주님자신과 그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1절에 보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40, 58절).
예수님의 자유케 한다는 이 말에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되었고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실상은 거짓임이 들어 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종살이를 시킨 적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종살이에서 돌아온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압제하에 있으면서 남의 종이 되었던 적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과대 평가하며 역사까지 왜곡하는 발언이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에서 나온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은 뒤로하고 이들의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들은 개인적인 죄를 회개를 하려고 들지 않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에게조차 이 말씀을 하심으로 돌로 치게 만들 정도로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들이셨겠습니까? 그것은 곧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죄를 사할 수도 없으며 사람이 새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진리가 중요한지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1. 진리가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시대에는 바로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한글성경에서 “진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문의 “진리”와 같은 용어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나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다르게 표현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서 진리가 역사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직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증거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마19:16-22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죄는 그대로 있는데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요4:1-26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죄인이었지만 진리에 대해서 알아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진리만이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에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이 거룩함은 이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의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자입니다.

4.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왕으로 왔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진리를 증거 하러 오신 왕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라면 내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있으면 그것이 불의 한 것일지라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험난한 세대에 다시 바울이 권면하는 것 같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있을 때 힘을 씁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진리가 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5. 진리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심판을 가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님 중에 크레인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안식년차 본국(미국)에 들어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마침 친구목사도 안식년이 되어 유럽에 가게되어 그 교회를 1년 동안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인의 집에 엄청난 사건이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모아온 재산이 불타 없어졌고 아내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들은 캠프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 사건은 실제 있었습니다. 크레인목사는 장례식 설교를 해야하는데 어떻게 위로하고 설교를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상주의 오른쪽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시신이, 왼쪽에는 불에 타죽은 아내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크레인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미스씨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잠시 후 스미스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했답니다.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조문객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제 진리를 선택하는 문제와 유대인처럼 예수를 돌로 치는 문제는 나에게 선택권 있습니다.
요한은 이 진리에 대해서 제일 많이 언급한 사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이런 요한이 자신의 서신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3)
,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3-4)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삼 1:8) 진리 안에서 행함이 있을 때에만 요한이 기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그 일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의 개념에서 불의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흑백논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3.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1:1-44

예루살렘에서 약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는 동생 마리아, 마르다하고 단촐하게 살고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2절)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음 12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기 전이며 나사로를 살리기 전이지만 예수님과 이들은 이미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은 나사로 였습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 가정 역시 어떤 어려움이 있어(어떤 심각한 질병) 이곳에 살고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두 여동생은 이 급보를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계신 곳(요10:40: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주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이 사이에 나사로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고 결국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이면 깨우면 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예수님이 속히 오시지 않고 이러한 급보를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게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채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래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왔습니다. 이 때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지만 마리아는 일어나 맞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아직 그대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장 나사로를 살려낸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즉석에서 질문하셨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27절에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달려나오지 않은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마리아는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가 한 말하고 똑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섭섭한 말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대인들과 마리아가 모두 울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저들과 같이 슬퍼하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절) 계셨습니다(이 슬픔 속에는 분노와 어울려 노여움도 포함되어 있다). 사별의 슬픔에 잡힌 자매의 마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자신도 비통함에 잡히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결과가 우연이 아닌 사단이 우리를 그리로 몰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15:26에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망의 쇠사슬을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도 남음이 있는데 ‘빛이 있으라’하시는 창조적 말씀처럼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예수께만 존재할 수 있는 창조적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사망의 권세도 계속해서 나사로를 붙잡아 놀 수는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셨던 특징을 이해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나사로가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잠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나시지 않았고 언제든지 그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에, 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과 살아나게 하심을 통해서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은 창조자가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 모든 육체를 살려낼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이것은 우리의 기도모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 신적 권한을 부여받아 오신 분으로 나사로를 살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나사로 이외에도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막5:22-43)과 나인 성에서 한 과부의 아들(눅7:11-17)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죽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절’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7절)는 진술은 그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체는 썩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더 확신을 만들어준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25절)으로서 자신을 확실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동기
나사로를 우연하게 단순히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딱 한번 더 나오는데 누가복음 19:41에 예루살렘
배고픈 독수리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려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다가 밑에 굴이 보여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독수리는 독 안에 든 쥐라며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으나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굴은 독사의 굴이었습니다. 독사는 굴러온 떡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문제와 문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인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구구구구 외쳤습니다. 너무 멀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가 포기하지 않고 외치자 드디어 주인이 비둘기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인은 일단 독수리를 쫓고 곧 이어 독사를 죽였습니다. 비둘기는 마침내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뿐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눈물을 흘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게세마네의 기도에서도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에 우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는 살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우셨습니까? 그것은 사망(사단)의 권세가 저들을 감싸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눈물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이 사망의 눈물을 거두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27절)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실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원문의 “감취었음이니라” kevkruptai(케크뤼프타이)는 현존적 현재 완료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생명의 효과가 현재 주어진 것이며 영원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영원한 비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입니다(고전2:14, 요일3:2).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에 꼭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만 천국에 빨리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고 하셨으며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이 땅의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땅의,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먼저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이젠 힘에 부치네요
(몇 일전 제게 온 상담 메일입니다. 실명이 아니기에 공개합니다.)

삶의 무게가 오늘도 나에겐 버겁다.
난 오늘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만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어제처럼 그제처럼 일자리는 없었다.
혹 있다고 하더라고 신용불량자이기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신용불량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카드를 쓰는건 외상으로 소잡아 먹는 거라며 반대를 했던 나인데 나 역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걱정하고 삶에 비애를 느끼면서 자살까지 생각을 한다.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을 보면서 부럽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처음엔 한 장 또 다음 또 다음의 순으로 신용카드가 많은걸 무슨 자랑인냥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를 마구 받아서 나도 재벌의 꿈을 향해서 주식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정과 의지가 강해서 조금의 이익이 생겼으나 그건 정말로 나에겐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래서 무리를 하게되었다.
참 이이러니하다 나 같은 인간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다는 게, 투자금액이 크면 이익도 크다라는 나만의 착각으로 무리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카드대금은 한 달에 한번씩 한 달에도 열 번씩 소위 말하는 돌려치기 방법으로 결제를 했지만 떨어지는 주가에 꼬박꼬박 카드대금의 이자와 수수료를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결제 일이 늦어지면 한도액이 줄고 한도액이 줄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결제를 하고 그러다 여동생의 카드를 빌려서 간신히 돌려서 결재를 하는 상태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원금이 계속 들어가야 하기에 꾸준한 수입이 없는 난 가족들의 카드를 몰래 이용해서 결재를 하였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카드를 몰래 가지고 나와서 결재하고 하루 하루를 연명하였다.
전에 장사하다 당시에 나의 실수로 부모님께 큰짐을 드린 관계로 이번 일은 말씀을 드리지도 못한다. 혈압이 높으신 아버지 그리고 엄마 또한 말씀을 드린다고 한들 갚을 길이 없다. 나 역시 우리 집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우리 집 사정을 잘 안다
앞이 깜깜하다 살고는 싶다 그렇지만 살아갈 힘이 없다. 난 빚이 너무나 많아서 살아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혼자서 애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동생에게 부끄럽고 부모님에게 더욱더 면목이 없다. 벌써 집을 나온지 4달 근근히 먹고는 산다. 그나마 날이 따뜻한 관계로 막일이라도 하면 소위 말하는 때껄이는 해결되지만 돈이 모이질 않는다.
못난 내 자신을 원망하면서 채찍질해가며 서글피 운다. 아들 하나라고 잘 키워주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
보고싶은데 얼마나 많이 보고싶은데 볼 수가 없다. 엄마 아버지 여동생과 조카 …
내 신용만 불량이면 되는데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나라는 인간은 정말로 한심스럽다.
만약 나에게 새로운 삶이 다시 한번 부여된다면 열심히 살고싶다.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이기에 난 절규한다. 어떻게 던 살고싶다고… 그러나 난 결코 자살은 안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자꾸 의지가 상실이 된다. 자살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삶의 끈을 놓았는지 이해가 간다.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21:1-14

오늘 본문말씀을 정리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과 다른 제자 둘(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한다) 모두 7명의 제자들이었는데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하고 어찌 보면 먼저 선동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먼저 말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제자들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6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디베랴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는데 바다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불려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요6:1), ‘긴네렛 바다’(민34:11), 겐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러졌는데 “디베랴 바다”라고 불러진 이유는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들이 이전에 하던, 갈고 닦았던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고기는커녕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서 계셨습니다. 아직 새벽인지라 물안개가 가려서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얘들아(5절) Paidiva(파이디아)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현재 어른들에게 사용되기도 하는 말인데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여보게들, 젊은이들”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예수께서 이 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메 티)로 부정관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이미 고기가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묻는 것이다). 제자들은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 대답을 아마도 기운하나 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고 하십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주님을 몰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고 보기보다는 그저 지친 나머지 누군지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5:1-11에서 유사한 경험(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께서 함께 고기를 잡았던 것.)을 했기 때문에 주님인지 아직 완전히 몰랐지만 그 말씀을 따라하면서 어떤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율이 제자들의 몸 속에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제일먼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7절).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 kuvriov”(퀴리오스)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벗고있던 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마 그의 기쁨이 주님을 만나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뛰어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제자들은 작은 배에 옮겨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람이 감격과 감동하면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효력을 가진 사이몰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이몰핀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건강해지고 강건해진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감격과 감동의 연속적인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육지에 올라온 제자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고기가 놓여있었고 떡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고기는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그물이 찢어져 버릴 만큼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확실히 주(主)신 줄 알게되었고 더 이상 묻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자신들에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고기 잡을 정신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허전하니 잠시 고기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제자들은 이미 세상의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의 본문내용에서 나타난 주 kuvriov”(퀴리오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본문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 kuvriov”(퀴리오스)는 “주인, 절대자,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인데 성경에 나타난 주님은 어떤 분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 ‘프레드의 생선가게’가 있었습니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프레드는 음식솜씨가 아주 좋아서 생선으로 갖은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에게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서 식당을 청소도 하지 않고 방치한 채 더럽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더러운 식당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프레드의 식당이 더럽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점점 줄고 급기야는 식당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인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식당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더러워진 식당 내부를 완전히 정리하고 청소하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식당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할 일도 없어진 프레드를 새 주인은 그의 음식 솜씨를 보고 주방장으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새 주인은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한 사람, 두 사람 이 식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위기, 깨끗한 식당 안에서 맛있는 생선요리를 맛보고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이 식당은 다른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데.”
이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었습니다. ‘프레드의 생선가게’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포도밭 주인(막12:9), 동물들의 소유자(눅19:22, 마15:27), 청지기의 주인(눅16:3), 종들의 주인(엡6:5-6)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합니다. 만물에는 주인이 있는데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잠깐 맡겨진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땅도 진실로 여러분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뿐이십니다.
혹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물의 주인도, 교회의 주인도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섬길 때 모든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둘째, 주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십니다.
추수하는 주인(마9:38), 안식일의 주인(막2:28), 주의 날(요20:1, 행20:7, 고전16:2)의 주관자요 주인 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의 심판자시요 날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일(부활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주님만을 위해서 필요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성도의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롬12:11).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달렸습니다(롬14:14). 그러므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고전11:27). 장차 오실 분도 주님이십니다(딤전4:15).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고전8:6). 우리는 이런 어마어마한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주 kuriva/(퀴리아)가 여성형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부녀’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유일한 용법은 요한이서 1, 5절에 나타납니다. 신부 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들은 서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주앙교회도 중국의 00교회를 자매교회로 개척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나타나신 장면에서 주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인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kuvriov”(퀴리오스)라는 용어가 이전에 나타난 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10:9, 행2:36, 히2:6). 즉 사탄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7절에서 요한이 주시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바로 지체할 겨를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지금 배에 있는 고기 따위에는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로 부를 때 이미 배에 가득한 고기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왔던 제자입니다. 그가 사실 먼저 다른 제자들에게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갔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에만 나오지 주님을 아직도 못만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고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셨지만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 던져 버리고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베드로와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살 때 루도빈코(Ludovinco) 백작의 부탁을 받아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의 모습을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여기 저기 제자들이 앉아 있고 주님은 오른손을 뻗어서 잔을 쥐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걸작품을 완성한 다음 백작에게 넘겨주기 전에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면서 평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친구는 “훌륭해! 너무 훌륭해! 특히 저 잔이 사실적이어서 그 잔에서 내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친구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빈치는 붓을 들어 그 잔을 지워버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혹 다른 곳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6: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자에서는 왕(王)자 위에 점을 더 찍어서 왕보다 높은 것이 주(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왕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누구에게나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은 한 분인 것입니다. 진돗개 같은 영리한 개는 평생에 주인을 세 번 이상은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 우리들은 주가 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아닌지요.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식이 자신의 주인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가 되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한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2-3)
 

나의 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1. 나의 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4:4-6

성경에서 예수님은 약 100가지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비유, 은유, 상징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금주부터 이러한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을 하나 하나 설교해 가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또는 지루하다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달할 때 그 어떤 주제나 제목보다 강력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 주앙교회가 월요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하는 설교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평소에 다 알고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알고 따라가면 우리의 신앙은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왜 예수님이 나의 길이 되시는지를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갔다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숲 속을 헤매다 가시에 찔리고, 나뭇가지에 맞고,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고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 그만 뱀 소굴을 만났습니다. 뱀들이 바위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놀라서 무조건 숲 속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렵게 깊은 산 속의 숲 속에서 작은 길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길은 저에게 생명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한숨을 크게 쉬고 길로 나아갔을 때는 이제는 되었다는 마음의 안도였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보니까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길을 찾지 못했을 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가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세상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원은 oi[date(오이다테)로 완료형이지만 현재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형은 아니기 때문에 “알리라”의 번역보다는 [너희가 알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가 말했지만 “우리가”로 말함으로 다른 제자들도 포함하여 함께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심정은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알고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래에 알게될 것이지만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이미 알고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싶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나 어떻게 나았어’라고 물어보면 ‘이 다음에 다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아이가 성장하면 반드시 알게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너는 이미 알고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논법입니까?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확신을 당겨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때는 분명히 알게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예지 능력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신 말씀이다.
 

둘째, 도마가 생각하는 길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이 달랐습니다. 도마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로 말하므로 실제로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마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으로 !E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형식으로 대답하셨는데 이러한 용법은 요한이 일곱 개(요6:48, 요8:12, 요10:9, 11, 요11:25, 요14:6, 요15:1)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여섯 번째가 됩니다(참고. 요15:1). 예수께서 “길”이 되시는 것은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미국 뉴욕주에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과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두 청년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이었지만 아주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고, 믿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은 예수를 잘 믿었을 뿐 아니라 신앙이 아주 좋은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누군가가 이 두 집안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맥스 쥬크스 집안에서는 1,026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약 300명 정도가 조산으로 일찍 죽었고, 약 100명이 평균 13년 간씩 교도소에서 복역을 했고, 약 190명은 매춘부 노릇을 했고, 약 100명은 술고래가 되어 그 말로가 아주 비참했다고 합니다. 이 집안이 뉴욕주에 부담시킨 비용은 1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즉 국가에 공헌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끼치고 부담을 준 집안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안에서는 모두 729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300명에 이르는 자손이 목사가 되었고, 65명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13명이 대학 총장이었고, 그리고 50명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의 저술가였습니다. 이 집안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이 공헌을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 문명이 그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세계에서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은 중국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것은 ‘길’을 닦기보다는 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길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닦으신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의 성소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또 하나는 지성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하루에 한 차례 들어가서 분향하고 등불을 켜는 일을 했습니다. 성소 안쪽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일이 이처럼 제한된 이유 가 어디 있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 둔 곳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특별히 하나의 이름 둔 것이요 머물러 계신 곳이 성전이기에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제사장이라도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씻는 속죄의 피가 없으면 제사장이라도 성전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있는 곳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길을, 다리를 다시 닦고 놓습니까? 예전 길로는 다리로는 건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provsfaton(프로스파토스)는 성경 중에서 본 절에서만 기록된 것으로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으로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진 “산” zw’san(조산) “살아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사람들은 지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벽으로 여겨졌던 휘장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찢어졌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휘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얇은 커텐이 아닙니다. 양피지나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쉽게 찢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나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평생을 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상처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이 길은 평생에 가는 길이지 가다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길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은 그의 대답에서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렸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길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한번 찾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길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저와 여러분이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일곱 살 된 손자에게 아랫동네 큰 할아버지 댁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이는 심부름을 가다가 풍선장수가 예쁜 풍선을 팔고있는 것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고,
다시 길을 가다가 동네친구들을 만나 함께 구슬치기를 하며 재미있게 놀기도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돌 뿌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소매로 피를 닦고 조금 쉬었다가 일어난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시간이 지나 해질 녘에야 큰 할아버지 댁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큰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고 무척 반가운 듯 말했습니다.
“네가 먼 길을 어떻게 혼자서 왔니?”
“할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그래, 무슨 심부름이니?”
“ …………………..”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오는 사이 그만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보다 더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단다.”라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우린 예쁜 풍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져 있진 않은지,
또 친구와 어디선가 놀고 있진 않은지, 일상의 여유도 필요하지만 정확한 길을 걸으면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 / 본문 : 행 8:14-24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오늘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며 첫 열매를 거두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구약적 의미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의 첫 수확을 누리며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잡혀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시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출발과 교회의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으며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열매가 있어야 함을 보여 주는 의미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사도들 다음으로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 지역에 내렸습니다. – 할렐루야 -
사마리아에 성령이 처음 내렸다고 했는데 그럼 사마리아와 성령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겠습니다.

1. 사마리아(뜻:살핌)는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 북쪽 약 67km 지점으로 사마리아 도와 사마리아 성이 있다.
사마리아 성은 세겜 북방 11km 지점 91k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세바스티에 라는 곳으로 보잘것없는 동내가 되었다.
BC 30년에 헤롯은 사마리아 대건설 계획에 착수, 새로 건설된 도시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세바스티아로 개칭했다. 도시의 출입문은 서편과 동편에 있었다. 북편과 남편에도 성문이 하나씩 더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낙후된 아랍인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기였다.
그리심산이 있다. 이 산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산정에는 유적지가 있다. 소수민족인, 전통적인 사마리아인은 4백명 뿐으로 그리심산에 살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에 익숙한 도시이름이다.
(1) 사마리아 성읍은 이스라엘 북왕국의 수도이다.
(2) 디르사에 수도를 정하던 오므리왕(아합 왕의 아버지)이 세멜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산을 사서 그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왕상16:23-24).
(3) 사마리아도는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쳐서 취하여 12지파에게 분할해 줄 때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지파에게 준 땅이 곧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다.
(4) 여호수아 때에는 솔로몬 왕 때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에 남북 2국으로 분립되어 남에는 유다, 베냐민의 두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은 유다국이 건설되고 북에는 기타 10지파가 느밧의 아들 여호보암으로 왕을 삼은 이스라엘 국이 건설되어 250여년 간 내려왔다.
(5)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국을 쳐서 취하였다.
이때에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아수르 국민을 사마리아 에 옮겼다(왕하17:3-6,24).
(6) 그 다음에는 마게도냐,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여 또 사마리아인을 축출하고 자기 국민을 사마리아도에 이식하니 자연히 상홍홍혈이 되어버렸다.
(7) 그 때 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시하고 그 주민을 이족시 하게 되었다.
(8)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협력하기 원하여도 거절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시 하는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바사국의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반대하게 되었다(스4:1-6).
(9) 이러한 두 가지 원인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에는 피차 반목 질시하게 되고 유대인이 그 지역에 가지도 않고 그곳 주민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므로 갈릴리도를 갈때는 사마리아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 돌아 다녔다.
(10) 예수님은 그것을 관계치 않으시고 통과하시다가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요4:3- 14).
(11) 선한 사마리아인이 비유을 듣고(눅1:30-37).
(12)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을 때 다 가버리고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와서 감사함으로 그를 칭찬하셨다(눅17:11-19).
(13) 그래서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욕한 사람도 있다(요8:48).
(14) 스데반이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만나 교인들이 사방에 흩어지는 중에 이 사마리아 도에 들어가서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행8:1).

사도들(행2:1-4 ) 다음으로 처음 나타난 성령은 바로 사마리아에서였습니다.
이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는 반목이 깊어 왕래를 하지 않던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한번도 이 사마리아를 차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파라크레토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 5번 쓰였는데, 요한복음에 4번 나온다. 오늘 본문 16절과 요14:26, 요15:26, 그리고 요16:7에 나온다. 나머지 한 번은 요일2:1절에 쓰였다. 이 말은 본래 법정의 법률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법정에 선 사람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는 사람을 “파라크레토스”라고 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변호사”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파라크레토스”를 영어 성경에서는 “돕는 자”라는 말인 “helper”로 번역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면서 돕는 자로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사마리아에 어떻게 성령이 임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첫째,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은 늘 말씀을 읽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 순서는 말씀 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앙교회도 예배순서에 말씀 봉독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넣기로 헸습니다.

둘째,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안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임을 너무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성령 없는 성도는 껍데기 교인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한 교사가 반의 학생들에게 사도신경을 한 구절씩 외워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교사의 인도에 따라 학생 각자는 자신이 외운 사도신경의 한 귀절씩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일어나 “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외우자 두 번째 학생이 일어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했고, 또 다른 학생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끊어지고 말았다.
교사가 다음 번 계속하라고 하자 한 학생이 “선생님, 다음의 ‘성령을 믿사오며’를 외울 학생이 결석했습니다.”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이 ‘성령을 믿사오며’하는 대목에서 빠지곤 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을 믿는 사람입니까?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믿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주앙교회가 성령강림절 다음날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계신 것입니다.
 

힘써 지키는 교회

힘써 지키는 교회 / 본문 : 엡 4:1-6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에베소 성도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 형편이 나쁜 사람에게 전달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형편이 나쁜 사람이 전달하면 그 말은 우습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1.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1절)
하나님이 부르신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1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는 문자 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Wood, Lincoln). 그 기준은’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이다(1:4, 5, 12, 13). 본 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마3:8; 10:38; 행26:20; 빌1:27; 골1:10).

[등대지기] 한 외딴섬에 등대가 있었다. 어느 날 우편집배원이 섬을 찾았다.
집배원은 한 명 때문에 섬을 찾은 것에 짜증을 내며 불평했다.
“기껏 편지 한 통 배달하느라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꼬박 하루 걸려 이 섬에 도착했소.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기분이 나빠진 등대지기가 한마디했다.
“당신, 자꾸 투덜거리면 일간신문 구독할 거야.”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일 다하고 남는 시간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남는 시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성도가 아닙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2절)
본 절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을 제시한다(Bruce).
(1) 겸손 – 이것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이다(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Foulkes, Wood).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가운데 중요한 것이 되었다.
“모든 덕이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인데 겸손이 그 첫째 계단이다. 이 첫째 계단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기가 쉬운 것이다.”(어거스틴)
“동전을 담는 저금통은 동전이 가득할 때 소리가 안난다.”
(2) 온유 – 이것은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한다(약 3:3-8).
(3) 오래 참음 – 이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이다.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오래 참음’의 확대된 미덕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 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 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Lincoln).

3. 성령은 하나되게 하신다.(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바울은 하나됨의 생활 곧 일치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됨’을 유지(维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는 줄’(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한다.
한편 ‘힘써 지키라’의 헬라어 ‘스푸다존테스’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 있는 태도를 가리킨다(Blaikie).
‘나는 배운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4-6절)
몸이 하나이요 ‘한 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한다(1:23; 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전 6:15;10:17; 골 1:18).
성령이 하나이니(헨 프뉴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한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룸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
“해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 45장 6절)
이사야 45장 22절에도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이가 없음이라.”고 했고, 호세아 13장 4절에도 “나 밖에 네가 다른신을 알지말 것이라 나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은 한 분이어야지 두 분이라면 이해가 됩니까? 당연히 우리를 지으신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혹 다른 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해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누가 속여도 속이는 것입니다.
◦ 구세주도 오직 한 분입니다. / ◦ 구원의 길도 오직 하나입니다 / ◦ 중보자도 오직 한 분입니다.

어느 날 소녀가 아버지 서재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는 아버지 옆에 조용히 앉아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에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뭐 원하는 것이 있니?” “아니요.” 그 소녀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 앉아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곧 소녀는 들어올 때와 똑같이 조용하게 방을 나갔다.
그 소녀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해 달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소녀는 그저 아버지 곁에 있고 싶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이 하나를 힘써 지키시는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소금이다.

성도는 소금이다 / 마5:13-16, 눅14:34-35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눅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한 각오 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는 수많은 무리에게 예수님은 제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27, 33절).
예수님을 따르다가 타락한 자들과 배교한 자들의 생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설명하시면서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는 소금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서 별로 귀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소금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소금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었는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며 소금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 대개 고대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그것은 소금을 지배하는 것이 곧 백성을 지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월급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Salary라는 말은 원래 소금이라는 단어 Salt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월급을 소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소금은 바로 현금과 같은 것이였다.
인류는 옛날부터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금이 없으면 몸 안에 소금과 물 사이에 미묘한 균형이 깨어져서 탈수 현상으로 죽고 만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짐승의 뒤를 따라가서 암염을 찾았다고 한다. 동물들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으로 된 바위를 찾았기 때문이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다이아몬드나 보석이라’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했는가 좀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다이아몬드나 보석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다이아몬드와 보석은 사치품이지만 소금은 필수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소금으로 명명한 것은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필수적인 존재로 불러 주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야 하리라’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현재형)’ 한 점입니다. 앞으로 유용하고 필수품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우리를 세상의 소금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벌써 세상의 유용하고 필수품인 소금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놀라운 축복인 동시에 큰 사명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꿀이라 하지 않고 소금이라’고 말씀한데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쓰고 따갑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의 말씀은 항상 달콤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프게 하고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종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핍박과 고난이 있으며 배척이 일어납니다.
달콤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쉽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달콤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파멸케 합니다. 사탕은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해롭습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항상 달콤한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달콤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쓴 이야기입니다.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Story)입니다. 따갑고 쓴 소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두메 산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시게 되자 그 교회 장로님께서 수요 기도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답니다. 할 수 없이 맡기긴 했어도 워낙 학식이 없으신 데다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이시라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장로님을 만나 신신당부를 드립니다. “장로님, 설교하시려고 하지는 마시구요 그저 성경말씀을 많이 읽으신 다음 교인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이 되어 장로님이 기도회를 인도하러 올라갑니다. 전도사님이 그토록 부탁을 하셨건만 강단에 올라서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십여명 되는 교인들이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말씀만 읽고 내려가기는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 교인들에게 뭔가 신앙적인 교훈을 하나 심어 주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평소 생각해 두었던 구절을 읽어나갑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봉독한 다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점잖게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함수 관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곰’이라 했습니다. ‘소곰’이 뭡니까? 소와 곰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와 곰이 어떤 동물입니까? 소는 온순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이요 곰은 사납고 힘이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소처럼 온순하게 주님 앞에 순종하고 또 곰처럼 믿음으로 씩씩하게 우리 인생을 살아갑시다.”

성경에 보면 소금에 관한 구절이 23번이나 나오는데, 대개 3가지 기능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소금은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없이 먹히겠느냐”는 말이 있고 마가복음 9장 50절에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이 있으며, 골로새서 4장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소금은 그 자체보다 다른 물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킬 사명이 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다.
조미료 역할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소금은 요리를 만들때 채소의 숨을 죽이고 고르게 퍼집니다. 부드럽게 합니다. 믿는 성도가 가는 곳에는 완고한 사람이 온유해지고 고집쟁이가 유순해지며 형제간에 화평케 합니다. 주님께서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막 9:50).

2. 소금은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했습니다. 소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생선이나 고기가 썩지 않게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도 우리 사회 속에서 방부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불신풍조가 없어져야 합니다.

3. 소금은 소독제(해독제)로 정결케하는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30장 35절에 보면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졌으나 소금으로 그 물을 해독하여 토산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왕하 2:19-22).
어느 약품이건 소금이 사용되지 않는데가 없다고 합니다. 바닷가에서 손이나 팔, 발에 상처가 났을 때 바닷물에서는 소독이 되어 곧 낫습니다. 여하간 소금은 정결케하고 해독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지고 없어짐으로 맛을 내고 방부제가 되고 해독제가 되어 소금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속담] 소금에 절지 않는 것이 장에 절을까?(소금에도 절지 않는 음식이 소금보다 덜 짠 장에 절 턱이 없다는 말이다.)

결론.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그 형질이 비록 녹아 없어져도 그 맛, 그 본질은 그대로 자연계에 존재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변하지 않는 약속을 <소금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하13:5) 성도가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말, 변화지 않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이 소금은 우리 몸속에도 있습니다. 사람의 피 속에는 0.9%의 염분이 있어서 우리 몸의 산과 알카리의 농
도를 적정농도로 항상 유지시키주며, 이로써 건강과 생명을 지켜 줍니다.

어느 나라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 길 한가운데 큰 돌을 갖다 놓고 누가 그 돌을 치우는가 멀리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한 상인이 지나가며 “재수 없게 아침부터 돌이 앞길을 가로막아” 하며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한 관리는”어떤 고약한 놈이 돌을 길 한복판에 가져다 놨나? “라고 투덜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잠시 후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 힐끗 쳐다보더니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왕은 큰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한 농부가 수레에 채소를 싣고 시장에 가다가 그 돌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농부는 그 돌을 굴려 한쪽으로 치웠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놓여있던 자리에 무슨 주머니가 있어 펴보았더니 많은 돈과 한통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돈은 이 돌을 치우는 분의 것입니다. “라는 왕의 편지였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1천2백만이라는 사실은 온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학자들이 한국교회 성장에 관한 책들을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소금은 3%만 되어도 바닷물 전체를 짜게 하는데 우리 25%의 교인들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금의 특성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

초대교회의 시작 / 행 2:37-42

교회란 말이 옛 히브리어로는 “카할”과 “에다하”라는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임이나 그 모인 사람들 자체를 의미했고 신약시대에는 “에클레시아”로서 이스라엘의 회중이 특별히 여호와 앞에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였을 때를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국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요즈음 한국에서 잡다한 이방 종교들이 그 명칭에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교회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무리”가 교회인데 그 뜻에 어긋나게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신격화 시켜나가는 사이비 종파들이 교회란 말을 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 “교회”를 의미하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명칭들을 택함 받은 자들로, 아브라함의 후손들, 열두 지파로, 흩어진 나그네로,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를 직접교회로, 거룩한 자의 회중으로 정직한 자의 회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몸으로, 온몸으로, 그의 몸으로, 몸인 교회로, 그의 몸된 교회 가지(요15:1-16)로, 나의 심은 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교회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장자들의 교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성도의 회,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 비둘기,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 하나님의 양, 양, 내 어린양, 내 양 ,한 무리, 장자들의 총회, 야곱의 하나님의 전, 금 촛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하늘의 예루살렘, 거룩한 성, 성상, 거룩한 산, 그리스도의 집, 신령한 집, 하나님의 권속, 주의 산업, 하나님의 이스라엘, 온 세상의 기쁨, 왕의 딸,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의 나라, 내 나라, 주의나라, 어린양의 아내, 여호와의 분깃, 택하신 기업,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 진리의 기둥과 터, 내 보좌의 처소, 새 예루살렘, 즐거운 분깃, 기쁨의 시내, 여호와의 성소, 그리스도의 누이, 버리지 아니한 성읍,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하나님의 성전, 성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포도원 영광스러운 교회, 성령의 전, 새 이스라엘 등으로 비유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시작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에클레시아-교회”란 말을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신 때이고 또 한 번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의무에 관하여 말씀하신 중에 “만일 그들의 말고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7)고 하실 때입니다.
그 후에 사도들의 서신에 보면 이 “교회”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1:2) 에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 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안디옥교회의 경우에는 그 부근의 같은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모았고 이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의 핵심 인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본질적으로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적인 기관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기에 달려 죽어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중심한 사도들의 전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가까운 장래에 재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그의 생애와 죽으심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없었다면 교회는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과 성령주실 것을 믿은 제자들의 열성과 기도와 하나로 뭉친 마음이 시초가 되어서 결국은 “새 이스라엘”의 교회가 부흥과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왜 “예수의 피로 사신교회”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뿌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분명히 알지 못하여 신앙은 제쳐놓고 세상 의학으로는 못 고칠 병을 고치는 곳으로 알고 있거나 귀신 쫒아 내는 곳으로 알고 있으며 정신수양이나 하는 곳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병 고쳐주면…..헌금도 하고, 교회에 다니겠다”라고 하기도 하고 “이 고민 해결해 주면………하겠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데 참으로 잘못된 생각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이 교회는 먼저 예수를 메시야(구세주)로 믿어야 하며 병 고치는 것 고민 해결하는 것은 그 부수적인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탄생하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능력과 기적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그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 주의 백성들을 사셨으며 죽은자 가운데서 영생을 얻도록 그를 살리셨고 성령을 보내시어서 성도들을 충만하고 넘치는 은혜아래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서 ‘대 제사장과 제사장 나라’로서 ‘머리와 많은 지체를 가진 몸’으로서 ‘신랑과 신부’로서 ‘많은 형제중의 첫 열매’로서 ‘주인과 종’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이 설명들은 교회의 거룩함과 교회의 하나됨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교회는 성령 충만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행2: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오늘 본문에 보니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용기를 얻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서 성령은 임하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작은 무리가 합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은 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이룩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근 주석’에 보면 “성령강림은 그리스도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교회 그 자체의 탄생을 뜻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시작이 되기 시작했다면 ‘성령강림은 그 시작을 힘있게 출발시켜준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얻은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 앞에 듣는 무리들이 가슴이 찔려 통회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약 삼 천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한다면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기원을 이룩하시려 제자들을 불러 새 예루살렘 즉 새 이스라엘의 인원으로 지으셨고 이 인원을 가지고 성령의 힘이 그 속에 불에 넣어짐을 통해 교회는 조직되어 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교회는 복음 증거를 위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능력을 얻고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전함을 듣고 주님께 돌아온 제자 수가 삼 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지상생활과 기적이사의 능력 행하심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 하셨으며 이 분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인류를 상기하게 하였더니 “우리가 어이할꼬”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 주님 앞으로 겸손히 머리 숙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고전2:2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결론.
1) 교회에서 받는 것
38절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성령을 받으라”, 40절 “구원을 받으라”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그 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