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과 우상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 (행 14:8-15)

지난주 본문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고 했습니다. 이 직분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명’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을 어떻게 구분하고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상도 사명과 비슷합니다. 만일 내게 있던 어떤 것이 내일 없어진다면 살고싶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내게 있던 어떤 것이 없어진다면 내 삶에 의미가 더 이상 없어지는 것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러면 사명과 우상은 닮은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착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청난 위험이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명과 우상을 바르게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십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두 번째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4)입니다. 여기 주의 깊게 보면 “너를 위하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가 되면 우상이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형상’으로 번역된 ‘hn:WmT](데무-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보이지 않는 것, 분배된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종류를 말하는 ‘@ymi:민’ 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이 있는 곳, 있는 것, 마음이 분배되어 있는 어떤 것이 바로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의 재산, 자식들이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습니까? 지금 욥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믿음과 신앙 그것은 우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남왕국에서 그나마 선한 왕들이 있었는데 성경을 보면 이상한 기록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아사(남왕국 3대왕 B.C. 911-870, 41년 통치)
“16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17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대하 15:16-17)고 했습니다. 이후에 선한 왕이라는 왕들이 다 이 문제에 걸렸습니다.

요아스(남유다 8대왕 B,C. 835-796, 40년 통치 나중에 악해짐) 왕이 소게될 때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2:3)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가 이해가 됩니까? 정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려면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죽고 난 다음 후세가 악해집니다.

아마샤(남왕국 9대 왕 B.C. 796-767, 29년 통치)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4:3-4) 그는 나중에 에돔 신을 섬기고 북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빼앗겼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자기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빼앗깁니다.

아사랴(남왕국 10대 왕 B.C. 791-740, 52년 통치)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왕하 15:4) 처음에는 정직했으나 후에 교만해 져서 문둥병자가 됩니다.

요담(남왕국 11대왕 B.C. 750-736, 16년 통치)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왕하 15:35) 아버지의 섭정이 있었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활동하여 그나마 선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도 산당은 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선하다고 한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서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산당(우상)을 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적당히 선한 왕은 없습니다. 적당히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적당한 성도는 없습니다. 적당히 거룩한 사람이 있을 수 없음 같이 적당한 상태에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우상은 나를 위한 것이요, 사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우상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8)고 합니다. 이 환자를 바울이 얼어나라고 하여 그가 일어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 사람들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2)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14) 습니다. 성경에 유대인이 옷을 찢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또는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옷을 찢었습니다. 입다는 자기 외동딸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갈 때 제일 마중 나옴을 보고 옷을 찢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에 슬퍼하며 옷을 찢었습니다(삼하 1:11).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고 이것을 서기관 사반이 읽어줄 때 옷을 찢었습니다(왕하 22:11). 아주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하던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면서 신성 모독을 했다고 합니다(마 26:65).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이라고 하고 제사를 자기들에게 드리려고 할 때 극도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터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지 않고, 슬퍼할 줄도 모르는 목석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가슴이 아파야 합니다. 저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울며 예수님 십자가를 따라갔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본문 15절에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바로 얼마 못 가서 19절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바로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절)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죽은 줄로 일 정도면 얼마나 맞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죽었는지 알고 밖에 같다 버렸겠습니까?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른 지역 더베로 향합니다. 왜 또 갑니까?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마지막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큰 대접을 받고, 위대한 스타나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간신히 말렸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대통령 아들이라고 속이고 다니다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거짓 말 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통령 아들하고 너무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아들인가보다 하고 접근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두 번 해 보니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사기죄로 잡혔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사람이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입니다. 또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본문 아래에 보면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과 여러 어려움 들을 다 알면서도 계속합니다.
23절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고 합니다. 바울이 혼자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모세에게 아론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이 있어야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쓴 것은 내가 삼키고 단 것은 주님께 드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앞에서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감사하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

사람이 왜 위대합니까? 사람이 왜 귀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알고 감사할 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몇 만 종의 동물이 있지만 서로 만나서 인사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수많은 개를 보았지만 개가 서로 길 가다가 인사하는 것 한번도 못 봤습니다. 서로 노려보고는 갑디다. 사람만 감사할 줄 압니다. 사람만 인사할 줄 압니다. 아무리 원숭이가 똑똑해도 자기가 입을 옷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감사할 줄 모른다면 동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율법교사도 포기했고, 결혼도 포기했고,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생활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 열 때마다 강조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특별히 감사가 많이 나오는 곳은 옥중서신입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키프슨(Barnett Gipson)박사는 그의 저서 “행복한 하루(Happiness Days Night)”에서 “당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것을 쥐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로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젖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의 예술을 배울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 쓰고 있습니다.
소크라데스의 제자 플라톤도 사람의 행복의 조건은 쓰고 남을 정도의 부가 아니라 쓰기에 약간 부족할 정도로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고 했습니다.
감사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찾으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사가 보이고 불평 쪽으로 눈을 돌리면 불평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감사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쪽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메뚜기처럼 작은 내가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역사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과 같이, 세상 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기뻐할 때 기뻐한다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기뻐하지 않을 때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낙담하고 좌절해 있을 때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만 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나라까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슬픔에 잠겨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고 일어나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습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슬픔을 겪습니다. 어느 집이나 속 들여다보면 같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문제 투성이 속에서 빠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렁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사랑하던 아내가 먼저 사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그립고 못 잊어서 20년 동안 아내가 입던 옷, 사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처음 5년 동안은 사람들은 참 그 사람 정말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을 그러고 있으니까 이제 질렸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아내의 삶까지 다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2010.11.19) 96일만에 컴퓨터로 성경을 1독 타자 했습니다. (http://kcm.kr/bible_taja/)
참 많은 말씀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타자할 때에 때로는 내 마음을 두드리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맞추어 피아노 건반을 타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달은 것도 큰 기쁨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말씀을 깨달으려고만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속을 느끼는 것입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평안함 기쁨입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참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성경타자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에 세 가지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첫 번째 편리하게 타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두 번째 다양한 통계가 가능하도록, 세 번째 모든 기록을 잘 남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계십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 하나 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나를 감사하세요.
본문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 상태를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있습니다. 약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이 대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세요. 얼마 전에 미얀마에서 카렌족이 동산 당에 의해서 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국적이 없습니다. 산 속을 떠돌아다닙니다. 몇 백만 명이 넘습니다. 나라 없는 서로 움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지금의 나와 주어진 상황을 놓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학자 헉슬리는 말년에 시각을 잃었습니다. 그는 점자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니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추운 밤에도 손이 따뜻한 채로 책을 읽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손으로 만져보고 감격했습니다. 만지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각이라는 소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도 존재가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강한 것, 있는 것, 가진 것만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약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강하면 주님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면 주님이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본문 10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하세요.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감사할 것이 아주 많지만 그 중에 제일 감사해야 하는 제목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은 없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협박해서 무엇을 었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로마서 1:6에는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1:7에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부르심이 얼마나 대단한 은총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축복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뭐냐?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뭐냐? 조사를 했는데 제일 좋아하고 은혜를 받고 많이 부르는 찬송이 첫 번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셨는지 나를 구속해 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크다 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감사를 처음 깨닫고 은혜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감격했습니다. 그 감사가 얼마나 넘쳐흘렀습니까?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없으면 축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 보다 차라리 독사 이빨에 물리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녀로 키우시면 자녀교육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맡지 않는 사람이 잘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2:29절에서부터 보면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 해독제, 방부제라고 했습니다. 암을 막아내는 게 감사이며 해독제와 방부제가 됩니다. 과학적으로 수 없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사하는 것만큼 잘됩니다. 밀러는 말하기를 감사의 크기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했고, 본 회퍼는 감사를 통해 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시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 목회자이며,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역적 호칭이 아닌 존재론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기능적 호칭이 아닌 인격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역과 기능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부름을 은근히 좋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목사보다 박사라는 말을 더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선교사, 목사라는 말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도 직분과 직책의 부름입니다. 존재론적 부름이 아닙니다. 디모데도 에베소교회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동역자나 목회자나 선교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복음으로 낳았다고 했는데 디모데도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아들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사역자 이상의 존재가 되라는 충고입니다. 유능한 사역의 기술자보다 먼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인물이 먼저입니다. 먼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안되면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어느 날 덧없이 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화살 같은 것입니다. 들의 꽃이 얼마나 빨리 집니까?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육신의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 말이 맡습니다.
제가 병원가서 머리 촬영 한적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서운 공포영화 잘 못 봅니다. 치과에 갈 때도 우리 집사람 손잡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머리 촬영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RI 레이저 광선으로 찍으니까 내가 아닙니다. 그 머리, 얼굴 모양이 아니라 제가 끔찍하게 여기던 그 해골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 해골이 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해골에 불과합니다.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4-15)

우리가 포장할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더 추해질 뿐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보이려고 회칠을 했지만 추하게 보여질 뿐입니다. 자연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평균 자살 시도를 960명이 한답니다. 이중에 35명이 사망한답니다. 2008년 자살사망자는 12,858명으로 전년 대비 5.6%나 늘어났고 이는 하루 평균 35.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입니다. 10년 전인 1998년 자살자 8천622명과 비교하면 49%나 늘어난 수치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기준에 따르면 연예인이나 사회 유명인이 자살해 보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후속 자살율이 14.3배 증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살 안 합니다. 못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좀 어려우면 죽지 뭐 하러 사냐고 합니다. 이길 힘과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두들겨 보라. 또 두들겨 보라, 열릴 것이다. 또 찾아 보라. 그러면 찾게될 것이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비전을 주십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웁니다. 진리를 깨닫습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고난 없이는 진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욥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우리는 알지만 욥은 알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친구들을 보내 네가 무슨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고난이 찾아 왔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고난이 오겠느냐고 합니다. 분명히 잘난 채 하며 살았지만 숨어서 죄지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탄의 참소 와 침탈로 절망의 심연을 배회하며 눈먼 사자처럼 포효하는 슬픈 사람 욥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1-3)

욥은 나름대로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천둥소리가운데 말씀하셨지만 욥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하고, 하나님 없이 낮추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소유도 가치가 있는 것이며, 많이 가진 것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는 다 소용 없습니다. 가진들, 갖지 못한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욥 40:9-11)

하나님은 욥의 피 흘리는 영혼을 어루만지시며 위엄(Majesty)과 존귀(Honor)와 영광(Glory)과 영화(Splendor)를 그의 상처 난 인격을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 옷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 후에 물질 축복과 이생의 축복을 더 받은 것만 이야기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욥이 달라졌습니다. 더 겸손해 진 것입니다. 없는 자를 이해하였고 고통을 당하는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매우 큰 고통을 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다 귀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부를 때 앞에 한 단어가 더 나옵니다. “오직(알라)”입니다. 알라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이슬람에서는 신을 가리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약간 다르게 부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알라’ 이슬람에서는 ‘아울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는 발음이 같아 이슬람에서 기독교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고 핍박을 합니다.
중국에서 하나님이라는 말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은 ‘쌍띠’입니다. 이 단어는 사실 제우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였는데 그곳에서 한약장수였던 이응찬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 조선말(한글)로 번역된 성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1885년 『예수성교젼서』에 신약성경을 완성합니다. 이 성경에 처음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 때는 한글에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모든 단어가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주, 예수)라는 말이 나오면 앞에 한 칸씩 띄어썼습니다.
이것을 대두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대두법은 옛날에 최고의 경의를 표해야 하는 왕에게만 적용하던 것입니다. 로스선교사가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이응찬이 한 것입니다. 로스 선교사에게 이것을 말했을 때 로스는 조선의 이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는 왕을 능가하는 경의를 표기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만 믿는 사람, 하나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일입니다. 이 존재론적인 것을 알면 다 안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사명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바로 존재에서 나옵니다. 이단에게 넘어가고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모르는 겁니다. 50년 전에 러시아의 한 여인이 69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중국 춘추 시대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함께 19년 동안 함께 숨어살았습니다. 문공이 망명을 갈 때 문공을 살리기 위해 사냥하여 잡은 고기라고 속이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탕을 끌여 주었습니다. 문공은 나중에 개자추의 허벅지 살임을 알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19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문공이 왕이 된 후 개자추는 산 속에 들어가 숨어살았습니다. 벼슬자리를 주려고 별 공을 다 들여도 개자추를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자추는 오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문공은 산에다 불을 지르면 개자추가 나오겠지 하고 온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불타 죽었습니다. 이것이 한식의 유래입니다. 산 사람들이 더운밥을 먹기 미안하여 찬밥을 먹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인물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개자추만도 못한 충성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한 때 서구에서는 모라비안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존재감이 얼마나 확실히 나타나느냐, 그들의 선교형태에서 잘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선교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자청하여 노예 선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 행렬이 줄을 서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노예 선은 평생 바다에서 노 젖다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왜 노예 선을 타느냐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도하려고 탑니다. 이런 모라비안의 열심을 보고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시를 쓴 존 뉴톤(J. Newton 1779년)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뉴톤은 노예상이었습니다. 인신매매 범입니다. 모라비안을 살린 것은 진젠도르프였습니다. 자기의 영지를 다 팔아서 모라비안들을 멸절시키려는 구교의 박해에서 구해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노예선만 탄 것이 아닙니다. 전 미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미국 전도여행에서 좌절하고 돌아오는 웨슬리 형제에게 돌아오는 배에서 위로하였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대 각성운동의 주역인 D.L 무디를 전도했습니다. 무디는 대학생 선교운동을 일으켜 1901년-1909년까지 300명의 대학생 선교사를 만들어 냅니다. 이중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돌아간 로잔대회장인 존 R. 모트가 있었습니다. 존 모트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 정도로 발로 뛰어다닌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YMCA을 세웠습니다. 모트를 도운 사람은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8세 때 죽으면서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언제 일찍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십일조를 8살 때부터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선교단체들도 무디와 록펠러의 이 정신을 받은 겁니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서도 61년에 세 명의 간호사를 안수해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62년에 국가에서 봉제공을 선발해서 외국에 파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간호사로 간 것도 비슷하지만 사람을 보내서 돈을 벌어오게 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 간 분들은 돈 벌어서 자기가 다 갖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절반이상을 가져갑니다. 그 돈으로 경제성장해야 하니까요. 영국이 300년 이상 걸린 경제성장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로 당시에 가려고 하니까 갈 길이 없어서 봉제연습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하실에 30대의 미싱을 갖다놓고 밤낮으로 연습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바늘에 손이 박히고 피를 보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 시험에 합격해서 간 사람이 30명이 됩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3-17)

예수께 미치세요.

노아가 미쳤습니다. 그 식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배를 산에다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쳤습니다. 아들하고 3일 길을 가더니 갑자기 아들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워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미쳤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타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 5장을 무척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가 아마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다가 미쳤다는 소리 듣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가끔씩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부모님들께 미쳤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미치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에는 미쳐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학문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애하는데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돈버는데 미쳐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사행성 오락으로 유명했던 바다이야기에 미쳐있던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아마 고래가 나오면 큰 것이 터진 것인가 본데 고래가 나오기 전에 상어가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땡긴 답니다.
고이주에타 전(前)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콜라에 미쳐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태국에 벧엘타이교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인데요 태국여자 어린아이인데 한 7살 되었나요. 교회에 하도 열심히 나오니까 부모님이 집에다 가두어 놓고 못 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가위를 가져다 자기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어린아이의 부모님이 손들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드리고요 어른예배 11시 참석하고 오후 3시 성경공부시간까지 하고 저녁에 어두캄캄할 때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에 미친 아이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딘가 미쳐있어야 된다면 예수께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우며 확실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차고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삽니다(13-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예수님, 예수님’ 소리만 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까? 궁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자기를 심문하는 왕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6:24). 그러자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반박했습니다(행 26:25). 그는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오직 하나님과 양떼들을 위해 헌신을 다했습니다(13).
나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렇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의무감이라든가, 동역자 들의 눈치 때문이라든가,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든가, 양에게 본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니 그는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이 push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push를 받으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push하시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게 됩니다.

아내가 추운 겨울밤에 갑자기 호떡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밥통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있다가 밥통을 다시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남편은 호떡이 추운 겨울에 식지는 않을까 해서 밥통을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확인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내 남편을 죽도록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아내를 강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피조물(16-21)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라고 했습니다. 죄 아래 머물러 사는 인생은 새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만일 도적질과 강도를 일 삼았던 한 죄수가 옥살이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도적질과 강도 짓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죄 아래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의 결박을 끊어 우리를 자유케 해 줍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낡아지고 쇠하여 지고 부패하거나 부식되거나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새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 새것을 사거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서 낡아지고 맙니다.
낡아지고 썩어지고 죽게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남으로 영적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몇 단계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이 깨어나면 하나님을 찾게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육신의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장은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뿐입니다. 물질도 건강도 명예도 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은 죽어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셨습니다(엡 2:1). 다시 죽지 마세요. 다시 죄의 구덩이에 들어가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 아래 있고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새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죄를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마음을 정하게 하며 정직한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 줍니다.

세계적인 물리 학자요, 수학자요 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날이 있었습니다. 1654년 그는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4일, 화요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 확신을 주시고, 환희의 감정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일체의 것이 망각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당신을 모르나 나는 당신을 아옵나이다. 환희, 환희, 환희,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날 말씀에 의해 주님을 영접한 후 매일 아침 5시면 기도하고, 많은 날을 금식하면서 성자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파스칼은 그 모든 책은 다 집어치우고 성경과 어거스틴의 참회록만 읽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형수술 하듯이 보이는 얼굴 몇 군데만 뜯어고쳐 놓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속 사람까지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럴싸하게 치장하고 잠시잠깐 위장하고 살다가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감춰두었던 옛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는 그런 삶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문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겉 사람인 육체의 조건만을 생각하고 대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나 상가를 보수하고 개축하여 새로운 건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도 리모델링 했습니다. 우리는 건물만 리모델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리모델링 해야 합니다. 죄를 지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작업입니다.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본문 17절에 새로워지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새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면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삼으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선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코의 극작가 카를 차펙은 “만일 개가 지껄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사귀기 어려운 것만큼 개와 사귀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차펙은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신, 아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6.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 본문 : 요 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따라합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원래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던 터키의 네자티 아이든(Nezati aydin, 35세)의 말입니다.
지난 2007년 4월 18일(수) 13시경 터키 중동부에 있는 말라트야 도시의 기독교출판사를 이슬람 무장세력 5명이 기습하여 독일 선교사 1명과 현지 기독교인 2명을 목잘라 죽인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 때 죽은 현지인 가운데 네자티 아이든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에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던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환경은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학에 ‘상황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쩌면 선교는 이 용어와 같이 씨름하면서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사람이 요리를 조금 하지 않습니까? 지난번 감자를 얇게 쓸어 빈대떡을 부쳤습니다. 어떤 요리 프로그램을 보니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리 연구하는 분들이 현대인의 욕구에 맞는 음식을 개발하려다보니 자꾸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감자 부침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외모의 모양과 방법은 변화되지만 원래의 재료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상황화라는 말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문화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비빔밥 문화”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비빔밥에 관하여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섞이든, 무엇이 들어가고 빠지든 비빔밥은 비빔밥입니다. 이런 한국인의 흡수력은 가히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일 년도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을 신 모델로 바꾸는 한국인의 소비 형태가 관련 분야의 국가 경쟁력이라고 하는 분석기사를 내놓는 경제전문기관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과 교회를 들여다 볼 때 이러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자기는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따라 간다는 것이지요. 좋게 보면 비빔밥 문화이지만 자기 주관이 없는 행동입니다. 남이 다 하니까 우리 아이도 해야되고 다른 교회가 하니까 우리도 해야하고 하는 식의 방법, 프로그램은 그다지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얼마 안되어 유명무실해 질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 오랜 연구와 기도 끝에 마련한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철학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다 가는 교회로, 남이 다 하는 방법대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이 하는 것 따라하는 것 싫어합니다. 주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맛을 내야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도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 따라하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본문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전적으로 주님 자신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 그것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한 사단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원문의 “미워한”(memivshken:메미세켄)은 완료형 능동태로 나옵니다. 이 뜻은 “이미 미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미움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벧전 5:8).

본문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는데 본문에 “세상”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중요한 단어를 반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도 요한복음에서만 “아멘, 아멘”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자신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은 ‘소속’, ‘근본’을 세 번째 것은 ‘분리’를 뜻합니다. 이 가정법은 “제자들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움을 받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면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공연히 일본이 미워질 때’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비로소 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셔야합니다. 사단이 내게 도전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성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욥은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 19:22) 고 했습니다.
사람은 목숨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위해서 제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67년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하고 150년에 저스틴이 156년에 폴리갑이 순교한 이후 203년에 북 아프리카의 퍼피튜아(Perpetua)라는 여인이 순교했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널리 퍼진 가운데 북아프리카에선 박해가 더욱 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죽은 영혼을 섬기는 애굽의 세라피스교 신자였던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주후 202년에 유대교나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로마령인 북 아프리카의 대도시 카르타고에서는 기독교의 큰 부흥이 일어나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들은 황제의 칙령을 개종자뿐 아니라 개종을 시키거나 가르치는 자에게까지 확대하여 시행하였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시행되는 와중에 비비아 퍼피튜아와 그녀의 여종 펠리시타스는 새투러스라는 교사가 있는 카르타고의 교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퍼피튜아는 어린 자녀가 있었고, 펠리시타스는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형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존경받는 귀족이었던 퍼피튜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신앙을 부인하도록 여러 가지로 달랬습니다. 그녀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지만 어린 자녀를 보고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녀는 어린 자녀와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은 후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처형 날이 다가오면서 가족들이 다시 그녀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새투러스와 퍼피튜아, 펠리시타스와 세 명의 남자들은 관중들이 있는 투기장에서 곰, 표범, 멧돼지 등의 공격을 받아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퍼피튜아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의 펠리시타스는 옷이 벗겨진 채 미친 암소가 있는 투기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광경은 잔인한 관중들조차 “그만 멈춰!”라고 소리칠 정도로 참혹하였습니다.
그들이 투기장에서의 일차 놀림감이 된 후 사형집행인에게 끌려가는 가운데 퍼피튜아는 슬픔에 잠겨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형제, 자매들에게 전해주세요. 믿음 안에 굳게 서고 서로 사랑하며 우리가 당한 환난이 믿음의 거침돌이 되지 않게 하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가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한 소리입니다. 순교자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솔직히 별 어려움도 아닌데 목사가 그것을 잘 달래 주어야 좋은 목회이고, 설교 또한 적절하게 재미있게 웃기고 축복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약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단순한 즐거움이나 편안한 안주만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 한 분이 늘 수고하시는 담임 목사님께 식사 대접하겠다고 목사님을 근사한 횟집으로 초대했답니다. 교인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무얼 드시겠어요? 그 말을 들으신 목사님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하신 말씀 “당 회”만 빼고 아무거나 다 시키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는데 마가복음의 방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신 마지막 행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요 2:13-20)에 보면 예수님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십니다. 이 때도 비둘기 팔고 환전해주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이 성전은 허물어질 것이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이 46년 동안 짓고있음을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방문하신 때보다 지금이 더 강경하신 행동을 보이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말씀을 주실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NIV) 이 번역이 마음에 듭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내 집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라고 칭함을 받으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내 자신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기도 하지만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속화 될 때 이 세상은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멸망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외쳤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 아닙니까? 명예도 버리고 유익 된 물질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들은 아름다운 고난이에요. 디모데후서 2장 3절을 한 번 보십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합니다. 고난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군사, 별 볼일 없는 군사는 사탄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 그래서 마귀가 다 겁내는 게 아니고 좋은 군사만을 겁내는 겁니다. 시시한 군사는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방위 받을 때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에 해병대 군인이 서 있을 때 제일 창피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가지요.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되어 주님과 함께 일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0. 보혈) / 본문 : 눅 22:19-20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미국의 어느 마을에 철도를 건너 통학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철도를 건널 때면 어김없이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소년은 그때마다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밝은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우가 내려 철로가 끊겨 있었습니다. 만약 기차가 그대로 지나가면 수 천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상황이었습니다. 소년은 가방에서 연필 깎는 칼을 꺼내 허벅지를 마구 찔렀습니다. 그리고 흰 셔츠에 빨간 피로 ‘STOP’이라는 글씨를 써 기차를 향해 흔들었습니다. 기관사는 소년의 셔츠에 적힌 붉은 글씨를 보고 급히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관사는 그제 서야 철로가 끊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선혈이 낭자한 소년을 끌어안으며 “너의 피 값으로 우리가 살았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살았습니다.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피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몸에서 피가 하는 역할은 산소와 영양분을 적재적소에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영양분의 찌꺼기를 배설기관에 보내는 일도 합니다. 당연히 건강한 피가 잘 흘러야 이 모든 기능이 원활히 이루어집니다. 심장에서 뇌까지 돌아오는데 8초가 걸리고 발끝까지에 18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모세관을 연결하면 10만 마일 지구를 세 바퀴 이상을 도는 거리라고 합니다. 심장에서 동맥으로 동맥에서 혈관 그리고 모세관까지 복잡한 통로를 거쳐 구석까지 맑은 산소 공급을 하고 더러운 것을 새롭게 합니다.

첫째, 피는 생명입니다.
성경은 피(Blood)를 생명(life)이라고 말합니다(창 9:4). 성경은 생명의 말씀, 곧 피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피의 책이며, 피로 얼룩진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곧 피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복음의 생명력은 피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많은 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책인 것도 이 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이유는 성경의 매 쪽마다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일종의 피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만일 피를 제거해 버린다면 성경 역시 여느 다른 책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 피는 하나님의 아들이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증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 피는 속죄의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피 흘림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인간의 죄는 다른 선을 행하든지 다른 사람이 그 값을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사망의 형벌은 피 흘림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죄는 구석구석을 부패하게 했습니다. 죄는 인간다운 삶의 기능을 마비 시켰습니다. 그래서 죄는 인간이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안의 원인이며 사단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저주와 심판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를 위하여 피가 틀림없이 뿌려져야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이로서 아담의 범죄이후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던 죄의 고리가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시 예전으로(죄 있는 상태) 돌아간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치신 후에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요 5:14)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 예수님의 피는 보혈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가 산다면 사단이 얼마나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겠습니까?

저는 아버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생활하며 혼자 떠돌아다닐 때 자주 고향집에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몇 달에 한번씩 가끔 생각날 때만 집에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서울서 혼자 지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그래도 고향에 있는 부모님 밖에 없으니 작은 돈이라도 용돈 타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강원도를 다니면서 옷 장사를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님 말씀에 아버님이 장사가 잘 되실 때는 옷 보따리가 커지고, 장사가 안되실 때는 옷 보따리가 점점 줄어든다고 어릴 때부터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암에 걸리셨는데 이렇다할 치료도 한번 받아 보시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실 때까지 강원도를 떠돌아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까지도 장사를 하셨는데 나중에 친척 분이 아버님이 머물고 계시던 여인숙에 가서 장사하시던 옷 보따리를 가져오셨는데 그 옷 보따리는 아주 작은 보따리였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주님 앞에서도 아버님이 못다 하신 믿음과 신앙생활을 다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어머님도 주님께 이렇다할 봉사를 하시지 못했습니다. 저는 할 수 만 있다면 그 봉사도 제가 다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앞에서 죽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된다고 다짐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의 보혈은 어떻습니까?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요일 5:6)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캄캄한 밤에 홀로 밤을 세우시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십자가의 보혈” 이것만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어린양의 피, 출 12:1-3)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골 1:20).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와 피 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도시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 도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지금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빛이 나야합니다. 이 십자가는 보혈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만이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의 빛이요, 생명입니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리이스트”를 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처음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너무 잔인하다는 비평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보는 이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만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엄청난 양의 피를 우리는 보아야만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그 피를 첨벙첨벙 튀기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피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그 많은 피를 닦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분명 이 피는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피였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한 피였습니다. 오늘도 이 떡과 피를 먹음으로 새롭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4장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할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목사 : 여러분은 예수를 피를 마시고 예수를 살을 먹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도 : 나는 내 몸 속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그 능력을 의지하여 몸 버려 피 흘리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온 삶을 바치겠습니다. 아멘.
 

누룩을 조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9. 누룩을 조심하라) / 마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느 날 염소는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 나귀를 질투하며 계책을 꾸몄습니다. “얘, 나귀야 ! 우리 주인은 온종일 너를 부려먹기 위해 겉으로만 아껴주는 척하는 거야. 내일 네 등에 짐을 싣고 개천을 건널 때 일부러 넘어져 보면 너를 미워하고 무거운 짐을 다시는 싣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일만 하던 나귀는 그만 염소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귀의 다리는 많이 다쳤고 귀한 짐들이 물에 젖었지만 주인은 급히 수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마친 수의사는 당분간 나귀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주인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의사는 “나귀의 다리가 빨리 낫기 위해서는 염소의 간을 내어 먹이고 그 피를 마시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농부에게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나귀를 아끼던 농부는 할 수 없이 염소를 잡아 간과 그 피를 나귀에게 먹였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들의 잘못을 마태복음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독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이미 이들은 누가 보아도 자기들의 배만 부르려고 하고 자기들의 위신만 중요하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고와와 객을 돌보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은 고사하고 유대인들에게조차도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최대 방해꾼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사두개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형식적인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로 자기 힘으로 이룬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 무지와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제일 큰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 없는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말씀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반대만을 일삼았습니다.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끝까지 부딪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이적과 기적), 말씀으로도 예수님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이런 부류가 택하는 것은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예수를 모함하고 죽이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바르게 보려고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안경을 끼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사두개인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세계 및 귀신의 실제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 22: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셨는데 이 대답으로(마22:24-34) 이들은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짜기라도 한 듯 바리새인들이 다시 의기 양양하여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마 22:34) 그리고 계명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1. 잘못을 인정하면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일이 자꾸만 꼬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입니다.
잘못 인정하기 그렇게 싫을까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쉬는 시간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교실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남자아이들 몇이 신발을 신은 채 책상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뛰고 난리입니다. 혼 좀 내려고 “자, 책상 위에 올라간 사람 앞으로 나와”했더니 한 학생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놀던 아이들도 급히 제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뭣해. 선생님도 몇 사람 봤는데.”
그래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허 참, 옆반 아이들이 와서 그랬나?”
아이들이 나오면 꾸짖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정진영, 너 책상 위에 올라갔잖아!”하자, 진영이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저만 그랬나요, 뭐.”
“물론 너만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책상 위에 올라간 건 맞지.”
진영이는 “으이구, 쟤도 그랬단 말예요”하며 다른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한 아이가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엔 놀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새총놀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이가 쏜 총이 병아리의 급소를 명중시켜 죽인 것입니다. 당황한 아이는 부랴부랴 죽은 병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그 아이는 이웃집 아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했습니다.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외할머니께 자기가 한 일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할머니는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모두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전통과 유전을 우선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전통의 좋은 점이 있지마는 전통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또는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가리키려고 했던 진정한 본질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배드리는 순서와 심지어는 교회의 모습 같은 것까지도 전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영생과 부활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영의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두개인의 모순 점은 모세 오경을 보는데 있습니다. 즉 모세 오경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알았으면(집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파로부터 벗어난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산헤드린공의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기구입니다. 로마 속국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전날 밤에 예수의 재판이 이루어졌을 때 없었습니다. 너무나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회가 공식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이곳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리마대”의 뜻은 “높이 있음”입니다. 이 지대가 높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회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달려올 수 있었지만 요셉은 “아리마대”로부터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과 재판, 처형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끝난 뒤에 도착한 것입니다. 요셉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당히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안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냅니다. 분명히 당시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큼은 그 깊고 깊은 수렁과 같은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저는 역사상 제일 소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아리매대 요셉을 선택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5절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6:5절에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파”라고 소개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바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잔멸”은 교회를 아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개처럼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제사장에게 고발하고 믿음을 방해하려고 일러바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 9:4) 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이후로는 그가 더 이상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였을 때는 큰 자라고 자처했지만 예수께 돌아와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사울”이 아닌 “바울”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바리새파로부터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했던 내용입니다.
이 청년이 시골 보건소에 내려갔는데 이곳에 계신 분들이 약값에서 그리고 다른 행정을 이상하게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의 얼마를 이 청년에게도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갓 내려간 이 청년이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뇌물인지? 공돈인지를 받지 않으면 그 조직으로부터 자기는 왕따를 당할뿐더러 계속해서 그곳에서 근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너무 결백한 척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요즈음은 설교도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해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결단을 내립시다. 가만히 있다보면 우리 또한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교훈을 쫓아가는 것은 모두가 누룩입니다.

오래 전에 한 여객 열차가 뉴욕으로 가던 중 다른 열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났었습니다. 그 사고로 5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의 열차 운행은 기차역에서 무슨 표를 받아 가지고 출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열차 조종사도 심한 부상을 당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노란 종이 하나를 손에 쥐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된 명령인 이 노란 티켓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잘못된 표하나가 열차를 충돌시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잘못된 교훈이 사람을 영원히 죽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곳에도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느 정도의 교훈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나 이론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 그 또한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