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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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49.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 마 1:16, 막 8:29-31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29-31)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드린 것이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10년이 지나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 때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세월 잡으려고 급하게 사는 민족 중에 우리민족을 따를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지 가이드들은 다른 말은 몰라도 “빨리 빨리”는 압니다. 저도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빠른 보트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옵니다. 그런데 유럽사람들은 늦게 일어나 느린 큰배를 타고 서서히 그 섬을 돌려고 오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말도 빠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컴퓨터 시대에는 한 단어라도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미개한 말일수록 단어가 길고 문장이 깁니다. 원래부터 한국말은 간단합니다. 신체를 부르는 말은 거의 단음절로 되어있습니다. “눈, 코, 입, 배, 젖, 손, 팔”이 모두 단음입니다. 두 음절도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미분화 현상이라고 해서 “머리 깍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 카락을 깍는다”로 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미장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 머리 잘랐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아니 미장원이 머리 자르는 사형장입니까? 외국인이 한국 사람을 보고 “빨리 빨리”라고 놀림을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빨리 빨리”가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들이 한국사람 부르는 소리가 “빨리 빨리”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불러주면 제일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크리스찬”으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빨리 빨리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많이 붙여지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Cristov”)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단어의 횟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만(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은 제외) 약 535개가 나옵니다. 제가 1년 동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오늘까지 49번을 했습니다. 참 다양한 예수님의 칭호, 상징, 은유적이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제목들을 주보에 적어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성경저자들은 그 시작에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누가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증거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Cristov”)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요 1:41, 4:25). “메시야”를 헬라말로 번역했을 때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야”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란 말이 많이 사용된 것은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대인에게보다는 헬라지역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전 세계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도 그리스도인을 크리스찬(Christ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돈만 있으면 가지 못할 이 땅의 어느 곳도 없습니다. 단 한곳을 빼고는요.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고 백두산(장백산)을 구경가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왔습니다. 이 때 가이드하던 자매가 있었는데 조선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교회를 다녀보지 않아서 아멘이라는 말도 모르는 가이드자매에게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아멘”하고 그 자매가 묻길레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아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 관광객 중 “평신도”라는 깃발을 꺼내 들어서 이 자매가 생각하기를 아 남조선에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경기도”가 있는 것처럼 남조선에는 “평신도”가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성도의 이름을 통일한다면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찬으로만 부르면 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는 ‘기름부음’의 뜻으로 제사장(출28:41), 왕(삿9:8), 선지자, 예언자(왕상19:26)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사무엘상 16:6에서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으로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사용되었습니다(시2:7, 100:4 등).
그리고 사람들(유대인)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대망(메시야)사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저서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보통 사람(랍비)과 달랐으며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이 다시 보내신 엘리야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가 본문 막 8:29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자신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나와서 장사나 하려는 사람이 있고, 병든 몸이나 나아보려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름부어 보내신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있은 후에야 예수님은 본문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0-31)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비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실 때 하나님의 비밀의 능력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제자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40-41에 “40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 조용히 자신의 앞날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들의 부르짖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은 사역이 더 남아있는 상태여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사역에 방해를 일찍 받으시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서 꾸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1-10)고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이 한 말씀에 나면서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고 찬송을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이름이었는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 인생이 송두리채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인데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던 일도 회복시키고 해결케 되는지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로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① 내게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뿐이란 말입니다.
② 네게 줄 것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요 네게 줄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란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먼저는 내가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평안도, 기쁨도, 능력도, 은혜도 내가 먼저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먼저 주앙교회 성도들이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왜! 사람이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 너무 좋아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웃고 즐기고 싶은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정말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것 드렸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해보자는 것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우리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각자 영생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산으로, 골방으로 가도 해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무 기쁘기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않으려 해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쁜 사람의 얼굴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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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47.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 마12:1-8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8)

제가 이스라엘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안식일 날(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이다) 옆집에 사는 유대인이 달려와서 가스 불을 아이가 켰는지, 켜져서 그것을 끄지 못하고 빨리 와서 그 가스 불을 꺼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 집에 가봤더니 잘못하면 불이 날 뻔할 정도로 가스 불이 타고있어 그것을 꺼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불을 끄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 금지법 37번째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교수들은 안식일에 사인을 안 합니다. 안식일 금지법 32번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 39가지 구체적인 안식일 금지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팠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잘라먹었던 것은 “시장하여” 먹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으면 안 되는 것쯤은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일입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안식일 금지법을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시장하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 이삭을 잘라먹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익히지 않은 밀만을 먹은 적은 없지만 밀가루를 어려서 먹어본 일은 있습니다. 익히지 않은 밀이 맛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먹었던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배고픈데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중, 상류층에 속해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배고픔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야하는 제자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을 잘라먹었겠습니까? 흔히 배고프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말합니다.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북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너무 배가 고파서 밖을 보니 돼지가 지나가고 있어 그것을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자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먹는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밀 이삭을, 그것도 안식일 날 따먹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다. 제자들만 배고픈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오신 예수님도 제자들과 똑같이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나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의 배고픔을 내버려두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문제는 제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받아야 하는 어려움 우리도 받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만 예외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 모두 똑같이 태양 빛을 주십니다. 혹 기도한다고 너무 특별한 무슨 은사나 있는 것 같이 말하는 분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이 배고픔을 참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배고프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편에, 좌편에 앉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고 축복 받을 생각만 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을 확실히 받습니다. 하지만 제일 큰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이 땅의 잠시 지나가는 영화에 너무 욕심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앞장 마 11:7-8절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7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제일 처음 한 시험이 먹는 문제였습니다.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3-4)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부터 제자들이 배고프면 밥 주고 아무 어려움이 없게 돌보시면 이 제자들은 온상에서 키운 풀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나중에 순교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커녕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 바리새인들처럼 될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예전에 부모님 세대에 굶은 적이 있다고 하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라고 한다지요. 그렇게 키워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걱정이 됩니다. 좀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굶겨야 합니다. 그래야 배고픈 사람 심정을 알지요. 예수님은 지금 이런 배고픔 정도야 제자들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이 땅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다 주시는 것 아닙니다.

맛있는 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알프스 산록,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자연수를 손에 넣은들,
당신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결코 맛있는 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아무리 맛있는 물이라도 맛이 없게 되고 맙니다.
땀을 흠뻑 흘리는 운동을 하고 나서
마시는 물은 수돗물이라도 맛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소년은 모자를 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원숭이를 뒤쫓았습니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발 밑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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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45.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 요13:12-15

“12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한 소년이 담임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습니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교사는 충혈 된 눈으로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며 다그쳤습니다.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을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는 소년을 향해 교사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그로부터 17년 후 이 소년은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최후진술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생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산헤드린 공의회나 율법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여 다녔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제자의 절반 가량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고, 나머지는 마태(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라 다니는 말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생 될 자격이 있는 분이냐 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 또한 선생(랍비)될 자격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가 되려면 전통 있는 학문의 가문에서 배운 적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학문적 가문에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 40세가 되어야 랍비가 되는데 예수님의 현재 나이는 33세 이십니다. 유대인(세속적)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던 세 부류가 있습니다.

1. 대적 자들이 예수님께 부른 선생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눅 19:3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이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예수님을 존경하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비꼬아서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그저 어떤 기적이나 요구합니다.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불으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목사도 표적이 됩니다. 자신이 어디서 하나 알고 온 것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질문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곤란한 질문들 그리고 “당신 목사니까 한번 해봐”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2. 관심 있는 자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막 9:17)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은 있었으나 자신들의 요구을 위해서 나아왔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답을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안 난다면 하겠지만 작은 어떤 희생이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주는 대로만 먹고 말겠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3. 제자들이 부른 선생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 10:35)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선생이나 주가 아니라 본문에는 ‘호 디다스 칼로스’(@O didavskalo”)로 부릅니다. 그리고 ‘주’라고 부를 때도 ‘호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의 호격에는 관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사인 ‘호’가 붙은 것은 주격으로 부르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선생, 유일하신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님중의 한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빌립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땐 ‘퀴리에’라는 호격을 사용하여 여러 일반적인 선생 중에 뛰어난 선생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유일하고도 참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경탄
어느 초등학생의 답안지(실화)
‘슬기로운 생활’ 문제 :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었습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할까요?
답 : 뭐 이런걸 다
문제 :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 까요?
답 :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 :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사람은?
답 : 죽었다. / 요즘 아이들의 시험답안을 보면서 경탄을 합니다. 예전에 나올 수 없었던 답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 7:28)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33)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한 마디로 아주 특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께서 특별히 어느 가문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것을 배웠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해답을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3:11절에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선생이 되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생되지 말아야 합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선생이란 세속적인 선생, 즉 잘난 체만 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그런 선생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이 선생 되심을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과 같은 선생이, 제자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습니다. 이 행동은 상당히 의도된 행동이십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가야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잃지 못할 교육을 시키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이 많아 먼지가 많고 이들은 센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이 항상 더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육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구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구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 하나가 있습니다.
.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 높아지지 말고 스스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행동으로 이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앞서서 예수님은(요 12:14) 예루살렘에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 말이나 타고 가셔서 솔직히 어디 왕 같아 보이십니까? 큰 군말을 타고 가셔야 되지요. 그런데 스스로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겸손, 낮아짐, 섬김”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선생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6.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 히9:11-15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1-15)

어떤 신발가게 주인이 한 켤레는 10만원, 한 켤레는 5만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10만원 짜리 구두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값비싼 구두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값싼 것은 뭔가 결점이 있다. 값이 비싼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너무 값싼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결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엄청난 희생의 값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 되시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우월성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런 이유는 예수님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1)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권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2) 아론보다 먼저 제사장직을 받음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제사장에 대해서 히 7: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레위지파만이 대제사장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자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멜기세덱이라는 아브라함 때의 대제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직이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멜기세덱 혼자하고 레위지파처럼 대물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멜기세덱만으로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또 내려가는 다른 제사장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마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대제사장들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은 방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방울 소리가 안 나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가서 그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대신해서 사함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사는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대신한 양과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본문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드린 제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선배목사님이 이렇게 권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 병이 내게 옮겨와도 좋으니 이분의 병을 치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자녀의 고통을 내가 가지고 갈테니 내 자녀에게는 그런 시련을 주시지 말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만큼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단번에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솔직히 우리는 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분은 죄가 있으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멜기세덱을 비유로 들어 이미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도 대제사장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은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레위지파에서 오는 정통성을 말해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긴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긴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이 세상의 죄인들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지파의 대제사장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제사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시기합니다.
기술개발을 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이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했었고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내가 독창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마디로 기득권의 반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의회원 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닌데 그들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교만하여져 가면 진짜 예수님이 오셔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누려야할 자리에 가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누가 필요해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으니 그것을 직분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동안 특권을 누렸나 봅니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던지 마음을 비우십시오. 이 땅에서 영원한 직책과 직분은 없습니다. 어짜피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는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에 대 제사장으로 오셔서”로 번역했습니다. “장래”(게노메엔온)은 “…하려고 하다”로 부정과거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오사(파라게노메노스)” 또한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오셨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즉 십자가에 이미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중보(메시테스)”, “화해자, 중재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때(첫 언약한 때)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로 인해 가나안땅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단순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제사였지 사람의 죄를 없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한 속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2,000규빗을 대충 계산하면 1km 정도입니다. 1km 정도 뒤에서 따라가면 앞에 무엇이 가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언약궤를 아무나 만지면 죽습니다. 대상 13:10절에 보면 웃사가 언약궤를 만지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또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한 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만큼 그분과 가깝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다. 그제 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경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카칼에네노이)”은 하나님께서 초청한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마22:8, 계19:9) 완료 수동태 주격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정해졌으나(엡1:4)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저와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여 모두가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 대제사장 되심
(1) 하나님이 명하신 바요 (히5:5).
(2) 맹세로써 제사장을 삼으신 바요(히7:21).
(3) 죄가 없으신 바요(히7:26).
(4) 제사장의 직분은 갈리지 아니하는 바요(히7:23-24).
(5) 제사 드리신 것이 완성하고 또 있는 바요(히7:25).
(6) 그 대신 간구 하심에 온전한 특권이 있는 바요(히7:25).
(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되심은 하나님을 대리하시고 사람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권한을 받으신 바이다(히1:-2:)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3.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 마 18:1-6, 막 9:33-37, 눅 9:46-48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1-6)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3-37)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 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6-48)

본문말씀은 같은 사건을 공관복음 세기자가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3개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성경저자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쭌 것으로 마가는 “노중에서 제자들이 쟁론한 것을 아시고 질문하신 것으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세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가 제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참고해 주세요.]
본문에 “가버나움에 이르러”라고 나오고 “노중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어느 곳으로부터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지명의 언급은 막 9:30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앞의 지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 9:2에 보시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또 이 “높은 산”이 어느 산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은 “다볼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은 갈릴리 바다 남서쪽에 위치한 평평한 산으로 해발 560m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산을 “높은 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현재 예수님의 행로와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산을 대체적으로 해발 2,850m의 헤르몬(Hermon)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산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산에서 변화되셨으며 그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을 쫓으시고 벙어리, 귀먹은 자를 고쳐주셨을 것입니다(막 9:25).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확히 누구의 집인지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쉬었다 가실 수 있는 편안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다섯 제자를 부르셨던 곳입니다(마 4:13, 18-22 마 9:9). 그리고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 4인이 메고 온 반신불수 등의 병자를 고치신 곳이기도 합니다(마 8:5, 14, 9:1, 요 6:55-59). 그래서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제2 고향이라고도 부릅니다(마 4:13).
다메섹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왕래하는 통로인고로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 당시에 가장 번화하였던 곳으로 유대인의 회당(눅 7:5)과 로마 세관(막 2:14)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집은 베드로나 또 다른 제자의 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 왜 가셨을까요? 단순히 쉬시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보는 예루살렘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길을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도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부활하시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들려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싱가포르의 한 식물공원에 갔었는데 나이 드신 한국의 어르신들이 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그 식물들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별로 그런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언제 또 이곳에 오나 하는 마음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중에서”라고 했는데 이 노중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을 오면서 쟁론한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잠잠하니”라고 했는데 문법적으로는 미완료형 입니다. 지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열문제
지금 제자들이 노중에서 왜 이런 논쟁을 벌였습니까?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열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쟁론했다고 말합니다. 쟁론한 문제는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메이죤(meivzwn)으로 누가 더 “위대하냐” 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먼저 자신들이 다른 제자보다 서열상 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황이 막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서열 잘 따지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목메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다른 것이 있는데 중국사람은 명분에 치우치지 않고 실리를 챙긴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실리는 잃어버리고 명분을 앞세운답니다. 그래서 한국은 기술과 실력이 아니라 줄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질문을 합니다.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어른들은 장난 삼아 하지만 아이들은 순간 고민합니다. “어느 편으로 붙어야 좋을까” 그리고 어린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의 서열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른 아이들은 하나 잘하는 것 있습니다. 눈치하나는 빠르지요? 이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리적인 차별과 서열을 가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이 잘 일어나는 집을 보면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자꾸만 이웃과 친구와 비교합니다. 여러분 나는 나입니다. 나의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자꾸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열을 왜 평소에 구분하려하는 것입니까? 서열을 정함으로 위와 아래, 첫째와 꽁지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차별입니다. 바로 차별하려고 서열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첫 딸을 낳았다.
그럴법한 일이라 해서 의일 이라 이름지었다.
다음에 또 딸을 낳았다. 간혹 그럴 수도 있다해서 혹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았다. 이건 너무 많다하여 과삼이라 이름지었는데
연거퍼 딸을 또 낳았다. 참 너무도 심하다해서 심사라 했다.
또 딸을 낳았다. 정말 분하다고 오분이라 이름 지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또 딸을 낳고는 화가 치밀어 육노라 이름지었다.
그런 후 또 딸을 낳아 고만 놀래서 칠경이라 이름을 짓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딸을 낳고 보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 팔탄이라 이름 짖고 한탄만 하고 지내는 데,
또 딸을 낳고 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와 구소라 이름지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관심이 있는 “첫째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학생에게 제일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일등을 하는 일입니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승진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지금 관심 있는 일은 누가 첫째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자녀가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첫째 되는 방법의 말씀을 꺼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앉으려하고 귀를 세웠을 것입니다.
예수께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마 23:8-12, 막10:31, 43, 눅22:24-27).
교회에서도 제자들과 같은 서열의식이 있거나 은연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서열은 없습니다. 오직 봉사의 직분과 직책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첫째가 되라는 의미에서의 직분이 아닙니다. 봉사하라는 직분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면 평신도 모다 못한 것입니다.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맨 앞자리에 장로님, 그리고 성가대원, 직분자들을 순서대로 의자에 붙여 놓았던 적이 있는데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 잘 모르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장로님이 “제 자리인데요!” 그래서 일어나고 또 그 뒤에 앉았는데 집사님이 오시더니 “제 자리인데요!”라고 해서 그냥 교회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분 있으면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36절)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후보자들이 어린아이를 안고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 이쁘고 잘 생긴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으신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는 보잘것없는 아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코를 많이 흘렸는데 코도 흘리고 지저분한 그런 모습의 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KCM홈페이지에 보면 눈이 둥그런 아이가 있습니다. 미나자매가 디자인을 잘 해서 이쁘게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보통 아이입니다. 그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이 생각이나 홈페이지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유대나 헬라문화권에서는 어린아이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취급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오병이어를 보시면 여자와 어린이를 뺀 숫자입니다. 수를 셀 때도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덜 성숙한 미숙아로 취급하고 한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도 분명히 한 인격체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입장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예수님의 비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심으로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것도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5:31-46에 보면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고 천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을 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사장들과 바리새인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죄인 괴수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받아야될 대상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혹 의미가 있다면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나를 영접함이요
제일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제일 높으신 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의 권력 있는 자, 명예 있는 자, 물질 있는 자가 아니라 제일 낮은 자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일 높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 때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는 제일 작아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발견할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1999년 8월 2일. 아프리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출발한 비행기가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착륙장치 안에서 사람모형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1.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흔히 약장수들이 약을 선전할 때 그 약이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합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처럼 대일밴드가 나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시골을 다니면서 판 약장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픈 곳에 부치기만 하면 심지어 배아픈 것까지 낫는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만병통치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도리어 믿음이 없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어느 목사가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 졌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목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이 적을 것 같아요”

저는 먼저 교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재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언제가 한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탔습니다. 그리고 엄마 이거 “엘리베이터지”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리지도 않는 여러 층을 누른 것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엄마가 “너 그러지 말랬지!”하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혼을 내 줘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하는 말. “엘리베이터가 뭐야 다시 해봐! (혀를 둘려가며)엘리베이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근본을 위해서 교육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히브리어, 아람어 발음이 좋지 않다고 꾸짖으신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교육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핵심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눅 12:28)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 16:8)고 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당연히 염려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축사하시고 5천명을 먹이신 일과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일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바다건너(마가단 지경)로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들은 떡이 없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간질들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데리고 왔는데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막9:19)하시고 고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17:20에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많이 그리고 자주 꾸짖으셨던 것은 이빨 안 닦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운동 안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일 좋은 교육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찬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으며 바로 그러한 일을 만나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8: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한 백부장이 나왔습니다. 백부장이란 자기가 거느린 군병이 100명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고쳐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내 집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 부하들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면 하인의 병은 고쳐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만듭니까?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면 교육적인 효과로 자녀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고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차라 시골에 가면 번쩍번쩍 빛이 나던 그런 시절입니다. 길을 물어보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노인과 아이가 섰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고 있던 젊은 부인은 왜 심통이 났는지 “진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라고 반말 투로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소년은 “저리로 고개를 돌아 좌측으로 가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젊은 부인은 “진짜 그리로 가면 진주 나와요”라고 물었습니다. “예 그리로 가면 진주가 나옵니다.” 거짓말 아니지요. “예 아닙니다” 그리고 젊은 부인은 “당신들 거짓말시키는 거지”하면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가르쳐준 방향대로 안가고 자기들 마음대로 뒤돌아 갔습니다. 그곳은 삼천포가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화는 자신이 내고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 찾아가는 길이야 가다 잘못가서 삼천포면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요. 하지만 천국가는 길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1)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들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께 병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은 잠이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오늘날에는 병원에 가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육체의 병만 일시적으로 나은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 구원”해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인 치유가 아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께 부탁하십시오. 그분에게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구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 17: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물론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믿어주셨습니다. 즉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간에 용서와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인디언 마을에 ‘너구리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불평과 불만이 많이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디언 마을 계곡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너구리 잭도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 교회에는 신앙고백 시간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성령이 강림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일어나 일종의 짧은 간증(고백)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시간에 너구리 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내 등뒤에서 나를 놓고 쑤군거린다는걸 알고 있어. 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구. 당신들이 뭣 땜에 그러는지 알아. 교회 임원 모임에서 내게 찬송가 상자 열쇠를 맡긴 게 샘나서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모두들 잘 들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나오라구. 내가 가진 걸로 해결해 줄테니.”
너구리 잭은 미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사슴가죽 셔츠를 확 저치더니 권총 손잡이를 두들겼습니다. 금방 교회안에서 총을 쏘지는 않겠지만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너구리 잭에게 말했습니다. “잭 자네가 찬송가 열쇠를 어찌나 잘 간수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감탄하고 있어. 행여 자네 기분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슬퍼할 걸세.” 너구리 잭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풀리는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휴! 하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 손자가 물어보았습니다. “너구리 잭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너도 알다시피 체로키족(인디언 부족 이름)이 고향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이주당할 때 너구리 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이었다. 잭은 산속으로 달아나며 열심히 싸웠지. 그러는 동안에 남북전쟁이 터졌는데, 잭은 이번에 연방군(북군을 말함)을 물리치면 땅과 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는 패배로 끝났지.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정치가들이 들어와서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것 가지고 또다시 싸웠지… 너도 알다시피 너구리 잭은 평생 싸운 것 밖에 없어.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 찬송가 열쇠란 말이다. 이제 잭은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너구리 잭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난 15일에 했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마음에 드시는 분, 안 드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반목만 하고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 그분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성향이 생긴 것 아닙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고 칭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부활(2)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0. 부활(2)이신 예수님 / 요 11:25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할렐루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여러분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터넷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가수그룹 이름이 ‘부활’이 있나 봅니다. 그 분들 앨범과 기타 내용들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패자 부활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활동을 그만 두었던 연애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스포츠 선수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잘할 때 ‘부활했다’고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어쨌든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을 막는 일입니다. 혹 조금 더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KBS TV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의학다큐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첫 번째로 ‘성장호르몬, 현대판 불로초인가’로 시작하여 59번 째 2004년 4월 6일 “수명을 단축시키는 세 가지 – 제 1편 『설탕』”까지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 의학은 수많은 질병치료법을 내어놓았고, 인간의 평균 수명을 43세에서 77세로 두 배 가까이 늘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수명을 120세, 혹자는 150세까지 예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고령이 되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먹고, 자고, 활동하는 하는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건강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4번째로 방영된 ‘고기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방송입니다. 제가 아는 상식과 세계의 장수마을에서 장수 노인들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소식과 채식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것 말하는 것 다 지키려면 그것 신경 쓰다 더 먼저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향하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거기서 풀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복음은 구체화되어 세계 속에 놀라운 희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그렇게 유심히 보시겠습니까?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지긋지긋한 생을 마감하게 되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즐겁지 않았던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태양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는 하나님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이 절대로 낮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죽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 죽음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보다는 “부활하시기 위해서 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천국 환송회”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해리 리머(Harry Rimmer) 박사가 어느 날 회교도인 이집트 정부의 한 고위관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도 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리머박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관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 하실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죽은 이후의 우리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이기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거기에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상징인 십자가를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놓여 있었지만 무덤이 그를 가둬 놓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종교”일지는 몰라도 “생명과 구원”은 아니며, 부활 신앙이 없는 기독교인은 “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활”(요 11:25)이라고 칭하셨고, 제자들도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행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활은 단순하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살리는 역사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장차 영생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그 순간 깨진 꿈이 회복되고, 지친 몸이 치유되며, 상한 마음이 위로 받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충만하면,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산 소망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한 명의 제자를 뽑기로 할 때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복음”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복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국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청정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에 분명 예사 죽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는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맛있는 먹이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갈매기들에겐 해로운 것이지요. 갈매기들이 이 맛있는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바다 속의 많은 먹이를 놔두고 여행객들이 음식만을 기다리다 굶어죽고 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들은 때론 너무 달콤하여 우리 몸과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주는 향락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해 줄지는 모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잠시 우리를 편안히 쉬게 해 주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입니다. 그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래도 70년은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다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나를 위하여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오. 그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도하고 선교하시기를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참고] 부활에 대한 성구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막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막 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이들이 와서
(눅 20: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2:31)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8.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 본문 요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성경을 한마디로 어떤 책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또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 중에서도 그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제가 왜 증거 합니까?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저의 말씀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꼭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저는 앞으로도 이 설교를 자주 할겁니다. 그때마다 “목사님 한 말씀을 또 하시네” 그러지 마십시오. 또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습니까?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안 먹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증거 해야할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구약성경 미가가 예언했습니다. 때가 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만 그분은 원래 태초부터 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복음서의 시작을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2700번 이상) ‘엘로힘’은 복수 대명사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묘사하는 동사로도 사용됩니다. 마치 한 사람 이상이 일하는 것과 같은 기묘한 동사로 사용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개인, 다수 어느 편이건 이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은 한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능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문 하나가 요 17:21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믿게 하시려는 이유가 요 3:16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영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으셔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증거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혼자서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번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음을 증거 합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의 사건들을 너무 의미 없이 그저 소설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SF영화 같은 것이 많아 성경을 볼 때도 무의식중에 그런 것처럼 취급합니다. 또한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의 많은 내용들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KCM에서 만드는 전돌이의 성경여행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들면서도 걱정되는 것이 혹 어린이들이 다른 SF애니메이션이나 동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것은 SF영화가 아닙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사람들과 제자들은 모두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거짓이었다면 당시에 그것을 본 목격자들이 살아있을 때인데 마태나 다른 제자들이 거짓으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거짓이었다면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원문으로는 [결코 보여주신 적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대면했습니다(출 33:11, 신 34:10) 하지만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출 33:17, 34:9). 유한하고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출 33:20).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품속에서 오셨습니다.

제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책인데 요즘 다시 읽고있습니다. 미국에서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입니다. 인디언의 산속 생활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저자(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가 쓴 것입니다.
내용 중에 ‘빨간여우 슬리크’가 나옵니다. 여우는 잔꾀를 부리지만 인디언인 할아버지는 여우의 모든 것을 알고있습니다. 여우는 자기 집에서 1.5km을 벗어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사냥개가 따라오면 자기 집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을 점점 줄여가며 자기 집에 다가갑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인디언 할아버지는 여우 집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우는 진흙땅에 발자국을 남겨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하며 혼자서 잔꾀를 부립니다. 한번은 나무 뒤로 여우가 숨더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여러 마리인 것처럼 속이고 갑자기 통나무 뒤에서 튀어 나와 저쪽으로 쭉 달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냥개들은 속아서 그쪽으로 쭉 딸아 갔지만 여우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통나무에서 쿨쿨 코를 골며 자고있는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이 여우는 인디언 할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고백
초자연적인 현상도 있었지만 제일 가까이 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고 동락 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두 제자는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예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기록들은 하나도 믿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세종대왕이 있었고 징기즈칸도 있었다고 믿는 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구원받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 말씀은 예수님의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의 열쇠를 바로 ‘믿음’이라는 것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공부해서, 도 닦아서, 아니면 운동경기해서 천국에 간다면 저 같은 사람은 큰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오늘본문에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여 (에겐토) “왔다”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한정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은혜는 율법의 모든 부족한 영역을 완성하는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의 ‘…위에’로 사용된 (안티)는 “때문에, 그래서”로 사용되는 전치사인데 여기서는 ‘은혜에 응답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요구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한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고후 6:2, 7:9).
뿐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것이 실감이 안 나시는 분들이 있나본데,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명예와 물질이 부족하다고 혹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포기하고 그것을 쫓으시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분들이 우리 주앙교회에는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그냥 주십니다. 요 근처 마트에 보니까 무슨 세일을 그렇게 자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일 싸게 파는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하면 밤 10시 넘어서 싸게 파는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 상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려고 열심인 아줌마들이 싸게 팔 것 같은 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주 그냥 주는 것 아닙니다. 조금 싸게 팔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돈이 안 들어갑니다.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 고생을 하신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온 천하를 얻으신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잔뜩 선물을 준비하셔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 땅은 천국으로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못 들어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출애굽기 20: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의 훌륭한 물건을 발명한 발명왕이 아닙니까? 그에게 기자들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정열적으로 일 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 노인이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실 것을 믿어야 할 지니라”(히 11;5)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7.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 본문 :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3장 15절을 가리켜 흔히 원시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범죄를 한 직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와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말씀하시기 전에 오늘 말씀을 주셨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간에게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수많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창 3:15로부터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성육신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한 절은 없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사단은 여자를 먼저 꾀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꾀었습니다. 남자 분들 지금도 여자가 남자를 꼬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자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남자도 죄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고 또한 그 책임이 하와와 같으나 분명한 것은 여자를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자가 최초의 범법자이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서 죄가 사해질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하셨습니다. 동정녀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나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은 생명공학이 발전하여 DNA만 가지고도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사람이 씨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몸을 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상태의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사단에 의해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원문의 “발꿈치, 아케브(bqe[)”는 “끝 부분, 후미, 마지막의”의 뜻으로 사단에게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와 비교한다면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이 지속될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마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시험할 때부터 바로 예수님의 인성을 파고들은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 오신 육체의 약점을 노리고 시험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신체를 상하게 하셨으나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결과였지 사단의 시험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실제로 예수님의 발꿈치가 손상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예수님의 육체(인성)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었습니다.

셋째, 사단을 이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로 사단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머리, 로쉬(varo)”는 신체상의 머리도 의미하지만 “시작, 높은, 통치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특히 뱀은 머리 빼면 없습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뱀의 머리를 짓이긴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사단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의 피를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롬 16:20)
사단은 우리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으로부터의 승리도 우리 것입니다. 사단은 다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는 것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는 12제자 말고 70인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주님께 한 말이 있습니다. 눅가복음 10:17입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하셨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사단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곳은 사단이 판을 칩니다.
저도 이제 상당히 무감각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에 선교지를 방문해 보았을 때는 정말 정신이 들었습니다. 태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길거리마다 집안에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다 치워버리고 싶었습니다. 타이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 두 나라뿐이겠습니까?
애굽은 한 시대와 그 주변에서 그 힘을 크게 과시하시는 맹주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군림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9장에 보면 그들의 지혜는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하는 자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 애굽은 쇠퇴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멸망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어 왕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영광과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으로 에언도 하였습니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자녀들과 후손까지 나아가 나라까지 전쟁에 패배라는 치명적인 오명을 남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상10:13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신접한 여자를 찾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패망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성전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년에 가서 그의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을 숭배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를 듣지 않는 성도가 되므로 인하여 그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왕상11:4-5).

여러분! 복음만이 이 우상을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우상을 파괴하려고 생각한 것처럼 실제 우리 나라에서도 우상을 파괴하다 경찰서에 넘겨진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물론 보이는 우상을 부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우상을 없애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사단은 힘을 잃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주님은 지금도 “사단이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쁜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우리교회가 이 지역에서 조금 부흥이나 해보려고 선교하자는 것 아닙니다. 또한 교회의 돌파구가 없어서 선교를 부르짖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단을 소멸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제대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힘을 내 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의 순종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선교하려고 나설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국은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누님 집에 다녀왔습니다. 매형이 이제 시골집에서 소나 키우면서 살겠다고 시골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진돗개라고 누가 갖다 줘서 키우는데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개가 나무에 끈이 말려 그것을 풀어주려고 하다가 개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3주 동안을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양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 나라는 양을 많이 키우지 않아 털깍는 기술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여름을 지내야 하니까 양의 털을 깎으려고 어떤 분이 기계가 없어서 가위로 깎았다는 겁니다. “깎는데 이걸 붙여 깎다 보면 살을 잘라 내는 거예요. 안 그러려고 해도 잘리는 거예요. 그래도 양은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그냥 누워 있어요. 끝까지 누워 있어요.” 개 아니라 다른 동물도 자기 살을 찝히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양은 가만히 있더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도 못 박히면 아픕니다. 예수님은 이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복음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