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예술(藝術)이라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1.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 본문 :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 11일입니다.
빼빼로데이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과 함께 상업적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농림부에서는 이런 국적 없는 기념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로 하자고 합니다.
세계 교회는 해마다 11월 둘째 주일을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1일인 바로 오늘입니다. 세계의 수백만의 기독교인과 수천 곳의 교회에서 일제히 박해 아래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빼빼로데이는 알면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안타깝습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는 곳은 이슬람권과 공산권일 것입니다.
압둘(가명)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역시 이슬람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성 이슬람 신자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이슬람에서 배운 것은 증오였다. 알라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라고 늘 배웠다. 그러나 내가 얼마 전 만난 두 가정은 나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일찍이 이슬람 사회에서 이웃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후 나는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책 한 권을 주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사람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수께로 달려갔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원망과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예술(藝術)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 작품을 말합니다. 순수 예술과 교양 예술로 나뉘고, 어떤 사물이 우수하거나 아름답게 생겼을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는 예술이야”, “오늘 설교 제목 예술이야!”, “당신의 말은 예술이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인’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닮을 쌓을 때 큰돌을 쌓는데 큰돌로만은 닮을 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큰 돌 틈으로 작은 돌을 넣어야 큰돌이 중심을 잡고 닮을 잘 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예술 아닙니까?

예술 중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체예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과정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때는 해프닝, 이벤트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포퍼먼스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하게 될 애굽과 구스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사 20:2-3) 이사야의 벗은 몸과 발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마치시지 않았습니다. 우주 최대의 포퍼먼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삶을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제일 아름다움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룩”(aJgiavzw:하기아조)은 성별(consecration)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리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죄와 분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들을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했습니다(렘 1:5).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출 28:41).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아름다움은 추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 진리”(17절)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진리와 구별하기 위함인데요 즉 앞에 나온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뒤에 나오는 것은 “참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삶을 가리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또한 이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또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었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순간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성도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 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를 영접한 뒤 얼마 동안 한 산으로 기도를 많이 갔었습니다. 기도원에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산기도 초보자들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었는데 사람들 이발도 해주고 기도도 도와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여전히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인가? 나가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40일 금식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도원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실려고 그렇게 기도만 시키시는지…”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앙 인들은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세상의 일을 해야 하는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 일을 주시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인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광야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복도, 음식도, 행동도, 요구도.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을 가지고 의견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랍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요셉입니다.” 랍비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아버지는 말 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말 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어느 일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침례교인이 침례 받으러 물 속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랍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그것이 무엇이오?’
성도 ‘돈지갑입니다.’
목사 ‘돈지갑을 넣은 채로 침례 받으십시오. 바로 그 돈지갑이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걸작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걸작이 바로 거룩한 삶 아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거룩한 습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든 크리스천은 ‘순종학교’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8-9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기보다도 내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올래요! 하나님께 엄포를 놓고 공갈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항상 부인하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삶인 것입니다(고전 9:27).

2차 대전 때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서 큰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한 쪽 팔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히려 의사선생을 향해 ‘선생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병사의 눈은 슬픔에 잠긴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없어진 한 팔에 대해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삶은 한번만 무대에 올려집니다.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계선에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9. 경계선에서) / 본문 :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제목설교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말씀 내내 오늘 본문이 그 어디에도 따라다닌다는 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자서전의 제목과 일치합니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자리까지 얻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사병들이 죽어 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국인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여행금지국가로 정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하는 에스라, 에스더 부부가 아쉬움을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추방당하는 틸리히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95년도에 인도를 갔을 때 우리나라에서 6.25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유엔군 포로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의해 일본군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후에 중국 군에 잡혀서 중국 군이 되어 6.25때 북한을 지원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틈에 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북한군에 잡혀서 북한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유엔군에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고향은 남쪽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렇다고 중국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은 제 3국인 인도를 택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폴 틸리히도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경계선에서’ 그는 두 기질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며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실현(Religio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삼는 데 자격기준이 없습니다. 나이 성별 피부색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작은 나무토막으로 우주선을 꿈꾸고 조그만 인형들을 친구로 사귀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부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집에서 사육한 짐승이나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는 ‘흠 없는’ 제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사용 짐승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업체들이 있었고, 이 업체들은 성전 관료들인 제사장의 공인 하에 한정된 일부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습니다. 이 독점업체들은 성전귀족에게 많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가진 가문 중에서 선별되었습니다. 가난한 탓에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대중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 심지어는 민족적 불행을 초래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체제로 인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도 없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 보다 유리한 죄 사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결국 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들고 세례자 요한을 찾기 위해 요단강가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활동했던 베레아 지방은 아바태아라는 유목족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베레아 지방에는 많은 군사요새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과 함께 반정부적 선동을 하고 있었던 요한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추종자의 일부는 요한과 함께 붙잡혔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지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은 대중을 불러냈으나 예수는 대중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중을 모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병고침과 말씀선포로 영적 활동을 펼쳤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대중들을 해방케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계선에 계셨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로마와 유대와 헬라의 경계에 계셨습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계셨으며,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에 서게 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는 세상 권력의 자리(왕)와 섬김의 자리사이에 계셨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적인 회로는 2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0과 1사이에서만 선택이 가능하고 중간은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에 어떤 것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선택을 미루다가 추방을 당한 것이고, 세례요한은 이 덫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택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덫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사건이 세금문제였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는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서에서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때의 설교는 일본 침략자에 의해 고통 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전도의 내용도 예수천당이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는 독립하고 세계무역의 10대국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위상과 위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습니다. IT분야는 세계3위에 올랐고 통신 속도는 세계1위입니다.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으로 안티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분당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을 비방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 어떤 목사님보다도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어떤 분은 교인이 3,000명이라니까 목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겠냐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래 동안 목회 한 분입니다. 이 교회는 손봉호 장로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가 철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보고 사람들은 서대문 교도소냐고 그럽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 계시다 분당샘물교회를 개척했는데 분당샘물교회는 성도가 3,000명 정도 된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를 건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를 비롯한 전 교역자 사례비를 100만원으로 정하고 가족 1인당 19만원만 추가하여 받고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는 우리교회 역시 남의 일로 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국가 권유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지의 같은 팀 내에서 건축한 병원은 경기도 만한 크기의 땅에 이 병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버리고 와야합니다. 단순히 병원을 그동안 애써 세운 건물을 두고 온다는 것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그 땅의 백성입니다. 누가 치료해 줍니까? 누가 아픈 곳을 감싸줍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탈레반이 두 여성을 풀어주면서 한 여성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그 여성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프간에 간 것이 ‘선교냐 봉사냐’ 하면서 따집니다. 여러분! 봉사면 어떻고 선교면 어떻습니까? 또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박은조 목사님은 지난 8일(수) 무겁게 가라앉은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이날 제시한 성경구절은 열왕기 39장. 동료들을 모두 잃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에게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제 3주가 지나 4주 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 죽음을 위해 아프간 땅을 밟은 게 아니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를 뒷바라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간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프간 피랍사태로 또 하나의 경계선에 섰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선교를 점검해야합니다. 이번 일로 아프간이 아주 문이 닫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J.Henry Davis)가 조선에 입국하게됩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습니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H.B.Maca-rtuey) 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이 내용을 싫고, 이 글을 데이비스가 읽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하지 않자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Too-rack) 교회와 협력하여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부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천을 지나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며 갔습니다. 공주를 지나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습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습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약 20일간의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도 경계선에 섰습니다. 교단이 파송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장로교회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는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선교사 등이 내한합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져 선교를 헌신적으로 돕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 북군 모두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모두들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남군의 회색 바지와 북군의 푸른 윗도리만 입고 있으면 어딜 가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군 바지와 북군 윗도리를 입고 자기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곧 총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회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은 푸른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남자는 온몸에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에서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경계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1. 선지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13:57, 막6:4, 눅 4:24, 요4:44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영어에 “코벤트리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코벤트리로 보낸다.”라고 하면 ‘한 집단에서 제외시킨다, 교제를 끊는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코벤트리는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 워릭셔에 있는 도시인데 그 곳 사람들은 군인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군인과 시민 사이에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파견되는 군인은 일체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 포로가 코벤트리에서 연금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코벤트리로 보내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헬라어 단어는 profhvth”(프롭헤테스, prophetes)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미리 말하는 자, 영감으로 말하는 자”로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쉬운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두 예언자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KJV, NIV, ASV)은 모두 prophet(퍼페츠)로 번역했습니다. 영문의 prophet는 헬라어의 문자를 영문으로 옮겨서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원문에서 profhvth”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앞의 ‘pro’와 ‘fhvth”‘가 합성된 것입니다. ‘pro’는 전치사로 “앞에, 전에”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pro는 전치사로는 “… 찬성하여”와 명사로는 “숙련가, 전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fhvth”‘는 ‘fhmiv’(훼미)에서 왔는데 그 뜻은 “이야기하다, 증언하다, 알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적으로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앞서서 말하는 사람, 미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라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이나 기타 현대 성경들(영어 등)은 구약이 39권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배열은 율법서, 역사서, 시서, 예언서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유대인들은 그것을 다르게 구분합니다. 오늘날까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율법(토라), 예언서(네비임), 성문서(聖文書, 케투빔)의 세 가지로만 분류합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성경(토라)를 율법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다른 성경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모세 오경은 먼저 성경으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그 이후에 형성된 책인데 부분적으로는 문서로 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전기예언서, 후기예언서 부분으로 엮게된 것입니다. 이 성경들은 예언자들의 말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써 오랫동안 전달되는 중 그 자체가 지닌 권위와 감화력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감화를 받게 했으며, 회개와 위로와 격려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자기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국산천을 멀리 떠나 먼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예언자들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수많은 경고와 예언을 등한히 하고 무시하던 민족이 이제 망국의 운명과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통을 직접 당하게 될 때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기억되며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고와 경고가 그 얼마나 진실성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장소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하며 그들의 글을 읽고 보존하여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에 있는 글들을 읽으며 새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법도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자(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제일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언자, 예언서란 희망의 메시지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운명을 놓고 예언한다든가 사업에 대한 예언을 한다든가 꿈꾼 것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등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복권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 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한 다른 이유가 또 있는데 유대인들은 주전 5세기 중엽에 예언자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어졌고 다시는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여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예언자를 보내주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다른 예언자가 아니라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다시 엘라야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3:3절에는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고 하여 이제는 누구든지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74:9에서도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예언자가 끊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전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의 예언대로 예수님 앞에 유대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4:5)한 바로 그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선을 그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수군덕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마 16:14-16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할은 다른 것입니다. 구약 개념의 예언자 시대는 유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난 것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선지자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글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읽으셨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눅 4:17) 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으로서 당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사도들 역시 구약을 인용하고 가르쳤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예언자) 보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예수께서 질문하셨을 때 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실상은 그만한 존경을 못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 백성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마저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가시던 중 너무나 힘드셨던 탓에 어느 구둣방 문전에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스라고 하는 그 구둣방 주인은 몰인정하고 무자비하게도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침을 당하시면서 구둣방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나는 곧 간다. 그러나 너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그 뒤 아하수에로스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라도 집도 없이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대다수 유대인들이 조국에서 쫓겨 나와 세계를 전전하는 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인 듯 싶습니다.

여기는 디즈니랜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키스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 The Gift/ 맥스 루케이도 (두란노, 2002)

저는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예수님 정말로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고향인 갈릴리의 나사렛 지방에서만 영접을 받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루살렘에서도 배척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오늘날 많은 국가와 종족, 지역에서 배척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만큼 예수님이 느끼시는 섭섭함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제 내 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더 이상 밀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밀어내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시면 더 이상 기회와 희망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이제 때가 다 되어갑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도 요한 계시록의 끝 부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때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로 영원히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요즘 존경하는 사람이 한명 생겼습니다. A(아로노). C(클레멘즈). 게벨라인(1861-1945)이라는 분입니다. 1861년 독일에서 태어나 12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18세에 성직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그가 결심한 날이 10월 31일로 바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기념일입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반세기’에서 “나는 신약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그를 위한 봉사에 나의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히브리인에 대한 강한 사명을 받고 당시 뉴욕으로 흘러 들어온 수 천명의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Hope 선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잡지를 1894년부터 1945년 그가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그 잡지를 편집했습니다. 1889년 종파 문제로 독일 감리교 연회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게벨라인의 첫 저서는 “스가랴서의 연구”인데 여기에 순회 설교 때 흥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랍비들에게 자신의 연구한 책을 보냈습니다. 랍비들은 그의 책을 휴지통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비서였던 한 젊은 청년이 그것을 꺼내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에 관하여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으며, “주석 성경”은 1912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0년후에 완성했습니다(이 책은 본래 9권으로 발간되었으나 무디 로이제우크에 의해 4권으로 합본되었다. 한글로는 ‘엑스포지터스.성경신약주석(전6권)’으로 옮긴이:강병도 800쪽, 기독지혜사에서 1982년 발행했는데 요즘은 구하기가 어렵네요).

사람들은 종종 게벨라인에게 그토록 수많은 순회 설교를 하고 잡지를 편집함과 동시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낭비한 일이 없을 뿐입니다.” 또한 왜 골프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골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단히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학자였을 뿐 아니라 헌신적인 설교자였다.

이영제 목사 정리(참고: 개혁신학과 설교연구, 국제신학연구소, 1987. 9. 25)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생애(3. 내 사랑하는 아들) /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3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가 몇 일전 육군본부에 있는 군인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년에 병사 2십만 정도에게 세례를 준답니다.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군대에서 이렇게 세례를 베풀어 사회로 내 보내는데 지역교회에서는 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전도를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군 제대한 병사들만 모아도 교회가 부흥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언 듯 이해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안됩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회개를 말하는데 이들이 정말 회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분이 군에 있을 때에 연병장에 모이라고 해서 모였는데 갑자기 소방 호수로 물을 뿌리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 친구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 보았더니 “응! 세례 주는 거야”하더랍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근래에 군대가서 세례주신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가끔 “저는 세례 받았는데요.”라고 고백하는 군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세례 주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반대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제일 기쁜 날일 있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고, 구원의 확신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본문 13절에 “이 때에” 이 시간 접속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3:23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정확하게 때를 따라 계획적으로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요 2:4에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30세가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참고 민4:3). 요셉은 30세에 애굽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창 41:46).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4). 이제 예수님께도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는 30세이지만 창기부터 구원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실로 오래 동안 기다린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는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잊혀져가고 메시야에 대해서 잊어갈 즈음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 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요한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어떻게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는 말씀으로 보아 성경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좀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인 요한이 하나님인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을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분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경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을 통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교만하면 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문자쓰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교회에는 목사가 저 한 사람인데 원로 목사님 모시고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설교가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젊은 목사는 교수님 앞에선 학생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의 설득에 요한은 순종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주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그가 광야로 나가서 하는 일을 구경거리로 삼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떤 빌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요 13장).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교훈하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단순한 ‘겸손’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요한에게 자처하여 세례를 받으시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들에게 “그분 참 겸손하시다.”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아지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습니까? 세례 역시 죄인 가운데 오셔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해야 살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몸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심으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끝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것이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마지막 세례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자기의 신분을 높이려고 찾아가시는 분들도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면 안될 것이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되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루시고 했던 “의”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면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겸손과 사단에게 무릎꿇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교회의 화목과 화평을 위해서라면,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협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겸손을 가지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버지인 하나님과 성령님이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육체의 제한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를 가진 우리와 또 2000년 전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예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태로는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타나십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늘이 열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닫히면 암흑 세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쫓겨난 다음에 닫혀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 때마다 몇 번을 이 동산 근처에 서성거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문을 연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와 말씀하신 하나님도 완전히 하늘 문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나 왕들에게도 하늘 문을 여신 적은 없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빛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이문은 종교 철학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아 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열 수 있습니다. 이제 그분을 통해서 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10:20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 이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성령의 상징으로 보인 것입니다. 비둘기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둘기 깨끗합니다. 겨울에 잡은 비둘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더러운 것도 먹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한 것이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홍수 후 40일이 지났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날려보낸 새가 무엇입니까?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창 8:7). 땅이 마르기까지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이 많으니까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각종 시체 썩은 것이 물위에 널려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창 8:8).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창 8:9-12)고 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합니다.
둘째, 제사에 드려진 제물입니다.
날 짐승 중에 제일 깨끗한 것이 비둘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성령의 모습 속에 비친 비둘기를 보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생각보다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중의 하나라는 것이 더 연상되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소,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러나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위로의 성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드려질 제물이라는 것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도, 성경을 잃고도 무감각한 분은 병원에 가봐야 합니다. 저는 전율이 왔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대하면서 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흔히 자식을 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비슷한말이 있는데 “눈에 밟힌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물어 보았는데 70%정도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어머님이 자식이나 손자를 보고 싶을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말이 외국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이지만 지켜가야 할 우리말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교생들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울고있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은 식당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식탁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암에 걸려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식당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에서는 8월에 그만두어야 하는 이분에게 10월 달까지 계약하신 분이라 미리 월급을 당겨서 두 달치 더 지급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스스로 저금통을 모아 퇴직하시는 이분에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금한 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아줌마는 학교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백 만원을 내 놓으시면서 학생들 초콜릿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제가 이 땅에서 할 수 마지막 일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셔서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 아주머니의 돈으로 초콜릿을 먹으며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은혜, 이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 힘차게 살 수 있으며, 선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