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왕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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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왕하 2:4)

우리가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열왕기하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부터 모세 오경은 나름대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사울과 다윗), 하(다윗) 하고 열왕기 상(솔로몬, 타락한 왕, 북왕국 8명, 남 왕국 4명의 왕까지 소개됩니다.) 오늘 열왕기하는 열왕기상에서 이미 나온 아합 왕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열왕기하서에는 표를 보심과 같이 북 왕국 12번째 왕인 요아스 다음에 요나서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연대기적으로 이해되면 구약의 역사가 모두 이해됩니다. 그래서 사실상 열왕기하서를 이해하면 구역의 후반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요 주제만 뽑아서 보아서는 평생을 교회 다녀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열왕기하서는 구약 후반부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책입니다. 또한 저는 열왕기하서부터는 연대기적으로 설교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는 열왕기하서가 끝날 때까지 가지고 다니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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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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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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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 오직) / 본문 : 누가복음 4:24-30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래 전에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오르간은 펌프질을 해서 연주를 해야됩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뜻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날 설교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설교하는 저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본문 4장 18절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고 4장 22절에 그 반응이 나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은혜로웠습니다. 요즘 설교학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이쯤해서 예수님의 설교는 마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흥미와 관심이 고조되었고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시지 않고 더 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부분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얻으셨던 관심과 은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떨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내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인기나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말씀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것은 받으면 생명이요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6번만 나옵니다(12:37, 18:17, 29, 21:31, 23:43). 그만큼 이 말씀의 중요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전 엘리야 때에 있었던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때에 있었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야와 사렙다의 한 과부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몇 년(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날아다 주는 빵과 고기를 먹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릿 시내도 말라버렸습니다. 이 때 다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8절). 시돈 근처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머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밧에 성문에 머물러 있는데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자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체 불러서 물 한 컵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자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염치없게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갔다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과부인 여자가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밀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뿐입니다. 지금 나무를 줍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내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이 음식을 마지막으로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엘리야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아들하고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와 아들이 먹을 마지막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칭찬하신 과부의 헌금하고 어찌나 똑같은 지요(막 12:42-44).

엘리사와 나아만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 소녀하나를 잡아온 것입니다. 이 소녀를 나아만은 자기 집의 시중으로 있게 했습니다.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에게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왕에게 고하고 왕은 은 십 달란트(340킬로그램)와 금 육 천 개(약 68킬로그램) 의복 열 벌과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찌 나병을 고칠 수 있겠냐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미를 찾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옷을 찢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전차와 식솔들을 데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은 나와 보지도 않고 문 앞에 서있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며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 집 대문을 떠나며 말하기를 자기가 사는 지역 다메섹에도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더 나은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도 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부하가 말하기를 ‘만일 선지자가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더 어려운 부탁을 해도 장군은 병을 낫기 위해서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단강에 몸 일곱 번 담그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다시 돌이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알았나이다.’(왕하 5:15)”고 고백합니다.
나아만 장군도 믿음 없이는 못할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당히 쉬워 보이는 일인데도 못합니다. 설마 하면서 안 합니다. 여러분! 평생 살면서 주일 만 이라도 성실하게 지켜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선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인데 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까요? 이미 구약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본문에서 두 절에 똑같이 ‘오직’이라는 말과 ‘뿐이다’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두 내용 모두 오직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사렙다에 사는 과부도 이방인이며 나아만 역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선포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이방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방인인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말도 하지 않고 이방인을 위해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심으로 자신 또한 이와 같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 뿐이다.”, “너를 얻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던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하기를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란다”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 오직 예수님 뿐이다.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안 해도 누가 하겠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만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이 엉뚱한 데로 가면 안됩니다. 어떤 교인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남의 집을 들이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차는 하나도 망가지지 않고 그 집만 망가졌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하루종일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망언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