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18-26)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 병에 걸린 이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그대로 메고 나왔습니다. 스스로 일어나거나 걸을 수 없는 중증환자입니다. 이런 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함께 병들면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떠나는 것이 더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사람은 비록 중풍 병이 걸리기는 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잘 나갈 때야 주위에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병들어 보세요. 사람이 떠납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병자나 친구들은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합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병든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만날만한 환경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이든 장애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뜻을 이루게 된다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강원도 경제를 살린다고 카지노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다른 사람 노름해서 사람 버려놓고 그 돈으로 잘살면 뭐하겠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노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져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노름을 해서 망합니다. 혹 돈을 딴다고 해도 이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돈의 가치를 모릅니다. 땀흘림의 수고를 모릅니다. 잘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병자의 친구들이 주변 환경을 탓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내일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헐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변상은 누가 할 것입니까? 먼지가 날 것을 염려해서 지붕을 뜯지 않았다면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집수리 비용을 누가 낼 건가? 이러면서 토론하고 싸우고 있다면 지붕을 뜯지 못했을 겁니다. 희생이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먼지를 뒤집어 써야했고, 누군가가 수리비용을 지불해야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하나만을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예수 앞에 가야 합니다.
18절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어디로 갑니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예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기적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가듯이 나도 가야하고 우리 민족도 주님께 메고 가고 세계를 주님께 메고 나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도 주님께, 친구도 주님께로 우리의 이웃도 주님께로 우리의 집안 모두를 안고, 이고, 메고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마음에 중풍병, 가정에 중풍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풍병. 못쓰고 버림받은 인생도 살아나고 희망을 찾고, 쓸모 없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사로는 누이들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친구의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상관이 없는데 이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병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근본은 죄입니다. 이것을 용서받는다면 죄의 결과로 인한 육체의 질병은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병 고침을 할 수 있느냐 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참 믿음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말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다 거짓된 것이며 그들의 교주 또한 거짓입니다.

옛날 한국에 김익두 목사님이 그랬다고 하잖아요. 교회 바로 앞집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베드로, 요한도 고쳤는데 나도 한번 고쳐 봐야지!”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를 하고 하루는 새벽기도 마치고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나가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당겼는데 그만 머리카락만 한 줌 빠지고 못 일어났데요. 병자가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창피해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죄가 사해지니까 중풍병자가 낳았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학자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열심은 또한 어느 정도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마주 앉을 정도였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부지런을 떨고 왔어야 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부지런했고 열심을 냈을까요? 그런데 이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지요.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이런 비판적인 태도로 와 앉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다를 때 즉각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절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옛 개정성경에서는 “참람하다”는 말로 번역했었습니다. 이 말은 “블라스페미아”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계 13:6).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 임을 주장하실 때(막 14:64), 하나님과 동등하고 주장하실 때(요 10:30)에 신성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 역시 이 죄목으로 고소당하신 것입니다(막 14:64).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옛 성현은 마흔을 가리켜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단단히 간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마흔이 되어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고 시대가 빨리지나가서 그런지 40대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것에 유혹을 받지 않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마흔이 되면 그만큼 자기 철학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불혹이 세상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지 예수께 문을 닫아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 마음을 여세요.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이웃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세계를 보세요.

제가 여러 번 러시아에 갔었습니다. 2005년도 갈 때는 공항심사대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여권 가지고 가더니 인터폴에 검사해 본다고 하더니 나타나질 안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안 해주고 1시간을 세워두는 것입니다. 함께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은 다 나갔고 또 다른 비행기가 왔습니다. 밖에 짐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너 어디한번 골탕을 먹어봐라 하는 심정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이 공산국가 만들려고 불만 세력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하여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이 나라들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소련이 100% 기독교국가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 다 100% 기독교국가였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동독이 본산지인데,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습니까? 세계적인 교회가 있고, 세계적인 오르간이 있고, 세계적인 예배가 있는데 왜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까?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불평불만만 하면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이 사람들 다 모아서 공산주의 만들었습니다. 교회생활이, 신앙이 무너지게 되고 감사가 떠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어둠의 세력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23절에서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것이 쉬워요? 분명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이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그 결과가 일어났는지, 안 났는지 표시가 안 나지만,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김익두 목사님처럼 금방 들통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죄 사함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4절을 보면,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인자”라는 말이 14번 나오는데요. 막 8: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후부터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4번 중에 12번이 막 8:29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는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으로 34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 자신을 사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상의 의미로는 人子(사람의 아들)아들을 의미하지만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 적으로는 ‘인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올 메시야였던 것입니다(단 7:13). 인자로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35세의 나이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대관식 때 교황 비오 7세에게서 왕관을 뺏어 스스로 쓰고 황후인 조세핀에게도 씌워 줄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하면서 정신력으로 한때 전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력이며 물질의 기여도는 10대 1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유럽을 평정했으면 1808년에 나폴레옹에게 쫓겨 도망간 포르투갈의 돈 페드로 황태자가 브라질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888년에 독립 선언을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그곳 세력가들을 쫓아내고 1969년에 브라질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도망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브라질입니다. 나폴레옹의 불똥이 브라질까지 틴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유럽의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국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지중해 건너편에 있어 나폴레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말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을 길들이기 위해서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 때문에 자신들이 죽게된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시베리아로 깊숙이 달아났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가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정교회(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를 쳐들어갔다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망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본문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자를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움이 이겨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는 그 뿐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그냥 불쌍한 것입니다. 그냥 장애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장애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나오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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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뉴질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이 안된 아름다운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인구가 적기도 하지만 처음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산 것이 얼마 안됩니다. 겨우 천년 전에 남태평양의 마오리족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사리입니다. 고사리를 우리는 산나물로 알았는데 뉴질랜드의 고사리는 나물이 아니라 나무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사리 나무입니다. 고사리 나무는 뉴질랜드에 널려 있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주종입니다. 이 나무는 뉴질랜드의 국수입니다. 이 고사리 나무는 목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고사리 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오리족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사리 나무는 정 많은 아버지의 눈물처럼 이슬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찾아와 이슬 눈물을 흘립니다. 자식이 그리워서 울고 자식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밤마다 우시는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눈물을 먹고 자란 고사리 나무는 특수한 독성이 있어 주변에 독충도 해충도 뱀 한 마리도 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살아 계셔서 고사리 나무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자녀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에서는 야곱에게 아버지(이삭)의 축복을 빼앗기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축복을 야곱에게 다 해 주었기 때문에 상속 적인 의미의 축복은 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한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무한한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출 18:4)고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도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는 잃어버렸던 고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아버지가 없는 자녀를 위해 주말에 아버지 노릇을 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 주고, 잘 놀아 줘도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친구 목사님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어려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자기도 남들처럼 ‘아버지’라고 마음껏 불러보고 싶은 것이었답니다. 특별히 친구 아이들이 아버지 자랑을 하고 아버지가 무엇을 사줬다던가 어디에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핑 도는 눈물을 닦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은 무한히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야 그 삶이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치유 목회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골 어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시골에서 골목대장처럼 신명나게 동리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 아이가 오징어를 물고 먹으며 나타났는데 그것이 하도 먹고 싶어서 빼앗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집에 돌아가 부모를 데리고 이 목사님 집에 찾아와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 부모는 목사님에게 “어떻게 아이를 교육 시켰기에 남의 아이의 것을 빼앗아 먹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자기 아이를 야단치면서 “너는 공부나 하지 왜 항상 사고만 저질이고 다니느냐 너 같은 놈을 어디다 쓰겠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 너를 어디에 쓰겠느냐? 책망하니까 그 목사님은 아버지로부터 아름다운 추억은 하나도 남지 않고 책망 받은 나쁜 상처만 남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이 완전히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명나게 놀고 기가 살아있던 아이가 힘이 없고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나이 50이 넘도록 목회도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치유 목회 클리닉에 참석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의 받은 상처를 깨닫고 발견하고 치유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은 주일에 설교하다가 팔순이 넘은 아버지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고 사랑하고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교인이 다 함께 울어 버렸다. 그 날 별다른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온 성도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었어도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교육상 칭찬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책망하기보다는 잘한 것을 칭찬해 주면서 교육하면 됩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도 똑같습니다. 제가 인터넷에 사진 올려놓고 누가 좋은 사진 잘 보았다고 댓글 달아놓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또 댓글 달렸을까 궁금해서 또 가봅니다. 50먹은 목사가 그러는데 어린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인자로 오셨겠습니까? 우리를 칭찬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케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제자가 될 수 없는 바닷가의 어부들이 예수님을 쫓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듣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부이기 때문에, 못 배웠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도 주셨습니다.
백부장이 하인의 병 고침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할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이방인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의 아버지는 감동을 줄 때도 있지만 실망을 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 주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워 주시며 잔잔한 시냇가와 푸른 초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크리스천처럼 큰 축복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히브리인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가는 도중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그 등에 업힌 아이를 가르치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등에 업힌 아들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왜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업어 주지 않느냐?”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시 “업어준다고 아버지가 되느냐?”고 아버지란 것을 증명하라고 대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제가 95년도에 러시아에 갔습니다. 컴퓨터 교육하기 위해서 집에서 선교사님들이 컴퓨터를 자동차에 싣고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차를 조사하더니 컴퓨터를 보고 이게 당신 거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그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증명서가 있냐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자녀)되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현대인들도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서 사는 물고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세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한다고 즉각 벌하시고 채찍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 구실 못할 것 같다고 너무 성급하게 서둘 것이 없습니다. 눅 15장에 보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립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인내한다고 했습니다. 견딘다고 했습니다.
제가 육신의 아버지께 책망 받은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평생동안 아버지께 한번 야단 맞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대단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 한번이 마음속에서 지워질 수 없을 만큼 제 가슴이 남았습니다. 제가 시골 집 네모 귀퉁이에 앉아 있는데 밖에 나가시더니 낮을 들고 오시더니 귀퉁이에 있는 제 목에 낮을 들이대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찌 놀랐든지 무조건 아버님께 항복했습니다. 제가 부모님 말 안 듣고 살살 거짓 말 시키고 하니까 아버님이 저를 확실히 교육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요. 저는 아버님의 그 때 그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단 한번도 저를 책망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부모의 입장에서 어른의 입장에서 자녀들을 대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 편에서 인간을 보시고 이해하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참 중요합니다.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부모는 책망을 하기 이전에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선수였기 때문에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 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사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 번도 시합에 나가질 못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자신을 한 번만 출전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활약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맹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본문에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에 성경이 제일 많이 연결된 부분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말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장입니다. 전체 26절인데요 ‘아버지’란 단어는 무려 39번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은 같은 단어를 잘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단 한번만 나오는 단어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예수께서는 뿌리와 나무처럼 하나이시고 우리는 거기에 가지입니다. 그리고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다.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더 애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7)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섭섭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았는데… 지금 로마 속국에서 나라의 독립만 간절히 기다리는데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녀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출세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이 세상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다,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죽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의 물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까지 다 죽여버렸습니다. 삼손은 자기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1-6)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 또 다시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홍수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서서히 평야지대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홍수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얼마동안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긴장은 풀어지고 점점 나태해져 안일한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은 우리를 쉬게 해 주기 위해서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짐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내 방법으로 살아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고 살면 편안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안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다음에 편히 쉬는 그런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짱이 같은 나태함을 말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본문 1절에 보면 화를 당하게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시온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둘째는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는 남쪽 유대 왕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의 사람들, 남쪽 유대인은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지켜 주신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조건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으니 그 성전이 지켜준다는 교만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란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그래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원에 확신을 가지는 믿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남 유다 보다는 4배 이상은 땅이 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없기 때문에 따로 사마리아 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교만합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든든한 겁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마치 이방 신에게 절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내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이 무사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웃 나라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본문 2절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변방입니다. 이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변방일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었습니다. 이 성읍들에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 뒤로 우리보다 가난한 자를 세계인 중에서 줄 세운다면 끝이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1950.6.25-1953.7.27) 끝난 당시 GNP 50$이었던 나라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최 극빈 나라가 100$-200$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GDP규모(2005)는 세계 12이며 1인당 국민총소득은 16,291$로 세계 29위입니다. 3면이 바다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사업은 세계 1위를 몇 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하고 FTA(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만큼 성장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2010년 11월 5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확정됐었습니다. 한때 G8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0%를 차지했으나 중국, 브라질, 인도, 한국 등 신흥 경제국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지금은 5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G20은 전 세계 GDP의 8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깜짝 놀랄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전기 불이 들어오지 않아 등잔을 키고 자랐습니다. 불과 40-50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의 인도차이나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제일 잘 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태국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70년대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꾸준히 성장은 했지만 우리처럼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식 성장은 어떻게 보면 비상식적인 성장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1회 아시안 게임을 인도에서 개최하였습니다. 1954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고, 1962년에 인도네시아, 태국은 무려 세 번에 걸쳐(1966. 1970, 1978)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살기도 바빠서 이런 국제대회를 치르는 것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국제연합(UN) 반기문 사무총장을 제8대(현재)로 배출했지만 미얀마는 아시아 최초로 제3대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을 1961년에 배출한 나라입니다. 당시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자국민들에게 ‘버마 만큼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역설할 정도였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얀마는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했고 준우승은 이란이며 한국은 조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1966년부터 1973년 사이에 한국과 미얀마가 치른 13번의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은 고작 2번 승리했고 무승부가 5번이며 6번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축구에서도 우리는 미얀마는 경계대상이 아닙니다. 축구에서는 브라질하고 하려고 합니다. IT와 경제에서는 최강국들과 겨루고 있습니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기도한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셔서 잘 살게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나라 5000년 역사이래 지금처럼 잘 살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본문 4절에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라고 말합니다. 아직 소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한 때 못살았다가 갑자기 잘 살게되니 우리 자신도 놀랐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우리 자신들이 혼란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에 한이 맺힌 분들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탈북한 분이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당 간부 집에나 소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답니다. 남한에 내려와 정착하고 작은 아파트를 나라에서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이사가는 분들이 버리고 가는 소파가 수시로 나오는 겁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제일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소파 있는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린 소파마다 집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온 집안이 소파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부터 소파를 도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정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군부가 정치를 할 때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를 위해 함께 생각할 때입니다. 무슨 어린아이들처럼 자기 마음에만 안 들면 나 놀기 싫다고 장난감 팽개치고 나가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사고, 내가 키우는 양떼와 소떼에서 살찐 것을 잡아먹는데 왜 그것이 왜 나쁩니까?”라고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멋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죠. 여러분들이 정말로 다 부자로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아는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에 ‘허벌’이란 말이 있습니다. ‘몹시 굶주려 있거나 궁해 체면 없이 함부로 먹거나 덤비는 것’을 말합니다. 권력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돈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허벌나게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 일전 제가 태어난 동네에서 병원(마석기독병원)을 하시는 원장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큰 병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십 명의 직원이 있는 병원입니다. 이 원장님은 병원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름도 기독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체보다는 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통해서 알게된 선교지로 봉사를 나가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권입니다. 자신이 이슬람을 아시는 것이 없으니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슬람에서 하는 라마단(금식)을 하시기로 작정하고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낮에는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금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갔다가 밥도 못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이 강력한 이유를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은 이 라마단 기간을 통해서 단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상아 침대에서 안일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적은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다시 매야 합니다. 예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향락에 빠져 다가올 심판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5절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고 하십니다.
“지절거리며”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포르팀’입니다. 부숴져 떨어져 나간 것을 말합니다. 의미가 전혀 없는, 자신도 모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다윗은 사실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삼하 23:1, 대상 23:5, 대하 29:26). 그러나 본문은 자기들의 잘못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악기를 만듭니다.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에 빠지면 안됩니다. 복음을 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사치와 방종에 빠져 있으면서 다가올 재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얼마 안 있으면 나라를 빼앗기고 망하는데도 지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또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소록도 교회에서 10년 목회 하시고 지금은 필리핀 나환자촌에서 선교하시는 김명환 선교사님입니다. 소록도에 들어갈 때 1,2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했는데 10년 동안 800명의 장례를 치루었답니다. 4-5일 마다 한번씩 장례를 치룬 것이 됩니다. 늘 죽음 곁에 있는 겁니다.
부흥 강사님을 모셔서 설교하는데 여름에는 냄새가 너무 나서 그분들이 설교를 못하시고 잠깐 나갔다 올 깨하고 나가서 못 들어 오셨답니다.
김 목사님은 7년째 되는 어느 날 새벽 기도회시간에 “하나님! 저도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터져 나오는데 소록도 성도들이 그 기도 소리를 듣고서 “목사님! 목사님도 이제 우리와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 자유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박완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소록도 주민에게 피해 보상하여 돈이 들어오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10년의 소록도 경험으로 중국으로 가 나환자를 돌보다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썩어 가는 나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고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불러들였습니다. 동생은 성결교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부모님을 또 필리핀 나환자촌으로 모셔갔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서 평생 경찰생활만 하셔서 80평생 남에게 얻어만 먹었지 주면서 살지를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뭐든지 먹고 나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이 한국에 있는 5천만원짜리 집 팔아서 필리핀 나환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유치원을 세운 것입니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의 유언대로 필리핀 나환자촌에 묻어드렸답니다. 그리고 유언하시기를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에서 만날 때, 마지막까지도 나병환자를 위해 선교하다 왔다고 하면 좋겠다”하고 돌아가셨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고 합니다. 겁나면 못나갑니다. 어느 시인은 “하나님은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장영희)고 했습니다.

말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뛰려고 하고, 또 실제로 달릴 수 있는 아프리카 얼룩말은 초원을 뛸 때만큼은 표정이 환해진답니다. 심장이 터질 듯 ‘헉헉’대면서도 표정은 늘 밝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얼룩말의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때로는 힘이 들지만 영혼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나무를 키우는 분들은 잘 압니다. 나무는 언제나 빛을 따라 가지를 뻗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요 1:5).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요 3:21)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빛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웃에 사는 47세 된 한 분이 할머니와 계약을 하나 맺었는데요. 매달 2,500프랑을 드릴 테니 돌아가시면 할머니 집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매달 40만원인데, 할머니가 1년 안에 돌아가시면 400만원에 집을 얻는 것이고, 2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얼마 안되니까 집 한 채를 그저 줍는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10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110세가 되어도 돌아가실 기미가 없는 겁니다. 12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그러다가 이웃집 양반이 먼저 죽었습니다. 30년을 기다리다가 돈만 들이고, 77세에 먼저 죽었습니다. 물론 할머니도 이웃 양반이 죽은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언제까지 살게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하물며 주님도 모르신다고 한 세상 심판 날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겁도 없이 자신이 안다고 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뒤질 소냐 한몫 했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예언했다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통일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통일교 때문에 이 말을 기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이단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훼손하고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사탄의 전략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이단의 재림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눅 17:26) 또한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의 커다란 두 개의 심판 사건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재림하실 때 심판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6:5-7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셨으면 다 죽여버리기로 작정하셨겠습니까?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 1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코웃음을 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재림의 날짜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가 점차적으로 심판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다시 오십니까?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릴만한 여우가 없습니다. 한국말에는 미묘한 느낌을 담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당장 쓸 작은 자잘한 물건을 살 때는 그냥 ‘산다’고 하는데 그것이 좀 크거나 여축성을 띤 것이면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같은 쌀이라도 한 됫박의 쌀은 산다고 하고 한 가마는 들여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 사용할 물건을 살 때는 ‘장만한다’고 합니다. 장만이라고 하면 그 집안의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물건과 달리 자가용을 사게 되면 ‘굴린다’고 합니다. 바퀴가 달렸으니 당연히 굴리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벤츠를 굴리고 케딜락을 굴립니다. 단순히 비싼 차를 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타는 것이 아니라, 허세를 위해 굴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허세를 위해 굴리는 믿음이 되면 안됩니다. “복음은 허세를 위해 굴리지 않는, 복음을 위해 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허세도 허풍도 가식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우리나라 조선시대 집들은 대문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집들이 굴뚝을 크게 만든 것하고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선포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심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긍흉은 선포되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롯의 때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가 구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전쟁 때 제1한강교 폭파할 때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폭파할 것이니 건너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무시하고 건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경고하는 전단지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전쟁에도 최소한의 율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권위주위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깨버려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모든 권위를 깨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청소년들은 대화 자체가 거의 욕으로 소통되고 있습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땀흘려 돈을 벌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요행만 바랍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불만만 싸여갑니다. 한번은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담탱이”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담을 타고 자라는 식물인지 알았습니다. 한참을 들으니 자기 담임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존경할 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훌륭한 부모님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모에게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이것이 당위성이며 최소한의 율입니다. 옛날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싸움을 하다 잡혀갑니다. 장수를 잡으면 전쟁중이지만 경례를 하고 잘 죽이지 않습니다. 관우나 장비도 잡힌 적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상대 종족을 다 죽여버리는 학살 소식을 들을 때, 야만인임을 느낍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폴포트가 대량학살을 하는 사건을 보면 어떤 존경심도 관용도 없으며 오직 무지함과 잔인함, 천박성이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그런 야만성을 보이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자에게는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앞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5-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수 없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이나 민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못 들었다고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도 했습니다.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인 그리스도께서 재람하실 때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어떤 분들은 천국이나 가려고 예수 믿냐고 그럽니다. “천국이나가 뭡니까?” 그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떻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옥은 가면 안됩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 몇 번 갈아타면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꼭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봅니다. 돌아 올 때는 ‘인천이나 서울’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국말로 ‘천국’이라는 말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겸손의 어린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째 재림은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오셨던 것처럼 또한 재림하실 것입니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9-30)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냥 서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다음에 해야할 일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북한의 어느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시골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맡은 선교사도 더 이상 돈을 얻어올 때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다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기도하시다가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에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완공을 하였는데요. 교회는 다 지어졌지만 문제는 그 집사님 가정입니다. 전답을 다 바쳤으니 어떻게 먹고삽니까?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 집사님을 교회 사찰로 삼으시고 교회 안에 들어와 살게 하고, 작은 돈을 주며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애들 교육이 또 문제였는데요. 마침 선교사님이 그 집 아들을 미국에 아는 분에게 소개하여 유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들어와 아주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백낙준(1895-1985) 박사입니다.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축복하신 겁니다.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백사경:시각장애인)는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그런 짓만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 양반아, 당신이나 잘 믿지. 별것 다 간섭하네. 재수 없게.”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만 자면 그 말이 들리는 겁니다.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니 순 거짓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전부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 한마디하면 그 한마디가 그 마을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시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었으니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우리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왔다가 그 때 통역관으로 동승한 토마스 선교사 잡혀서 죽게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한마디합니다. “예수 믿으시오.” 그 때 그 사람은 예수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 안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라는 말 한마디를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어느 날 농부가 호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연약한 줄기에 큰 호박을 달아 줬을까? 그리고 왜 두꺼운 상수리나무에는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줬을까?” 며칠 뒤 농부가 상수리 나무아래에서 낮잠을 자는데 무언가 이마에 떨어져 잠을 깼습니다. 그 때 농부는 “호박이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전화가 왔습니다.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 인터넷으로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 적는 사항들이 있는데 너무 많다는 겁니다. 경찰서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많으냐고 계속 따져 물으시는 겁니다. 저는 컴퓨터선교회에 23년 이상 사역을 하다보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누가 불만이 제일 많으냐하면 집사님이요? 아닙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순교하기 이전에 제일 먼저 순교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스데반 집사님 이십니다. 장로님도 아닙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불만이 많습니다. 순종 제일 안 합니다. 자기 생각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사항이 그런데요?” 물었습니다. “홈페이지 주소, 집 전화번호, 핸드폰 번호, 주소, 교회직분, 심지어는 구좌번호, 이게 다 뭡니까?” 그래서 제가 “이것이 다 나름대로 필요합니다. 홈페이지를 알리기 위한 분은 홈페이지 주소를 요구하시고 선교사들은 선교헌금 후원 받기 위해서 구좌번호가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계속 당신 이야기만 하십니다. 뭐 경찰서 조사 받는 것이냐 구요. 그래서 필요한 것만 적으세요. 그랬습니다만 가입만 하면 제가 밤낮으로 20여 년 간 모아온 자료를 공짜로 쓰는 것입니다. 감사는 없습니다. 몇 가지 적는 것만 불만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시작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점을 명심해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입장도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했다고 만일 하나님이 아무 때나 물 막고, 또 물을 흘려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은 이로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는 겁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공평입니다. 억울해 하지 마세요. 나만 왜 이렇게 못났을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복음성가 작사도 하고 시를 쓰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거기에 찢어지게 가난하여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평을 늘어놓는 송명희씨에게 ‘말하는 대로 써라’하는 음성을 들었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 가진 제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서 울먹이며 받아 적었습니다. 여기 까지는 자신의 입장과 같았습니다. 정말 제물 없고, 지식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갑자기 ‘공평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엉뚱한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울면서 하나님께 ‘못쓰겠어요!, 하나님 공평하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키는 대로 써라 하셨고 결국은 공방속에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라는 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시로 그녀는 세상에 알려졌고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데 까지만 이라면 불공평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는데 까지면 불공평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다음 세상이 있습니다.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기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는 전적인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기도 또한 무의미합니다.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놀고 먹으라는 명령을 하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라고 하십니다. 네 달란트를 활용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믿음으로 출발해서 우리의 행함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열매를 주십니다.(창은교회 목사님, 강아지에게 세탁기 타와라 그랬더니 재롱으로 TV에 나가서 컴퓨터 탔습니다.)
믿음 없이 보세요? 바보 중의 바보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같습니다. 시간 들여야 되지요. 물질 드리지요. 봉사하지요.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려고 합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기도에 대한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도우려고 35만 명이 도버해협을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2주만에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프랑스가 독일군대에게 패해 버리자, 영국에서 도와 주려고 건너갔던 35만 대군이 갇혀버렸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론 독일군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도버해협으로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릴 것을 명령하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영국왕 조지 6세는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젊은 군인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전 국민이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일군 쪽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있는 도버해협은 어찌나 잔잔하고 고요한지 수많은 배가 35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날랐습니다. 독일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 없지만 영국은 달랐습니다. 전쟁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이런 영국에서 세월이 지났습니다. 템플 목사가 켐브리지 대학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와서 따져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우연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게 아니고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이 생기고 기도를 안 하면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돈은 휴지조작보다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건강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건강은 아무도 자신할 수 없으며 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혜나 지식도 사탄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이란 원래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게임이 안됩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바빠졌습니다. 행사가 너무 많습니다. 쓸데없는 모임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장 힘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능력 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 아뢰라
기도(proseuch’/:프로슈케)는 “기도함, 교회당, 예배당”을 뜻하는 ‘proseuvcomai:프로슈코마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프로슈코마이’는 “기도하다, 간청하다,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기도와 예배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곧 예배가 기도가 되는 것이며 기도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기도가 예배의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두 번 째 단어 간구(devhsi”:데시스)는 “청원, 기도, 간청”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devomai:데오마이’로 “원하다, 바라다”의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한가지 단어가 더 나옵니다. “하나님께 아뢰라”입니다. 아뢰라(ai[thma:아이테마)로 "요청, 요구"입니다. 이 단어는 "aijtevw:아이테오"로 "구하다, 묻다, 청구하다"에서 온 단어입니다. 기도는 이 세 가지 형태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세 단어가 모두 기도를 뜻하지만 약간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예배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구하되 함부로 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우롱하거나 시험하는 기도는 안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간구'는 탄원입니다. 간청입니다. 간절해야 합니다. 셋째,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청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시작할 때 몇 년 전에 계셨던 장은숙 전도사님 간증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당첨돼서 샀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는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가인 제사는 반려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마음을 모아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에만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화요일에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블랙]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헬런 켈러’ 인 것 같았습니다. 실화하고는 약간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앤 설리번’(영화에서 T라고 말하는) 선생님입니다. 앤 설리번은 실제로는 여자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블랙에서는 남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만들어져서 그런지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인도였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에게 손바닥 위에 알파벳을 쓰는 방법으로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8년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는 퍼킨스 시각장애학교에 함께 등교하였으며, 래드클리프 대학에 함께 진학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대학 총장을 만나서 헬런 켈러를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입학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헬렌 켈러는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대학은 하버드 대학교 부속)을 졸업하였습니다. 헬렌 켈러도 위대하지만 앤 설리번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강한 집념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앤 설리번’ 선생은 불행한 환경 가운데서 자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학대하며 자주 때렸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가 여덟 살 때 죽었습니다. 그 후 앤 설리번은 친척에게 맡겨졌는데, 나중에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와 남동생을 매사추세츠 주립 병원에 내다 버렸습니다. 앤 설리번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결핵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였으나, 남동생 지미는 죽고 말았습니다. 시설에 맡겨진 아이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헬렌 켈러를 시설로 보내지 않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그곳에 보내시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헬렌 켈러가 졸업하던 날에 기자가 물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이 물음에 “시력은 있되 비전이 없다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 보다 더 불행한 일이죠.” 라고 대답했습니다.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빠삐용(스티븐 멕퀸)입니다. 빠삐용이 감옥의 섬에서 탈출할 때에 드가(더스틴 호프만)가 옆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네가 아무리 이 섬에서 탈출한다고 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감옥 속에 갇혀 사는 거야.”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앙리 샤르에르의 실제 인물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 책에 보면 ‘방코(Banco): 빠삐용’이 탈출한 이유가 나옵니다. 1930년 20살 나이에 파리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때 실적이 눈이 어두웠던 검사가 앙리 샤르에르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샤르에르는 자기 인생을 망친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악마의 섬을 탈출합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실화는 계속됩니다.
그는 남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번 후 파리로 갑니다. 그는 먼저 젊었을 때 자기가 다니던 거리,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고향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복수를 포기하겠사오니 이 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그는 스스로 속삭입니다. “샤로에르야, 네가 바로 진짜 승자다. 그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다.” 이렇게 다짐하고 자기를 30년 동안 가두고 있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진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를 동반하고 감사는 기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이미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개미의 배 속에는 ‘사회 위(社會 胃)’라는 제2의 위장이 있는데 그 속에는 먹이를 소화시키지 않고 보관만 합니다. 그랬다가 굶주린 동료 개미가 와서 입을 벌리면, 요구를 받은 개미는 망설임 없이 그 개미에게 입을 맞추고 자신의 사회 위에 보관한 먹이를 올려 먹여줍니다. 개미의 입맞춤은 생명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 고후 13:11)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맞춤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 입맞춤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개미의 ‘사회 위’와 같습니다. 기도로 살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에머슨-오늘의 하루)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고령이신 김순이 할머님이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111세이십니다. 기자가 찾아가 걸어나오시는 할머님을 보고 “걸어나오시네요?” 그러니까 “그럼 걸어나오지 기어 나오냐?”그러시면서 “기사 쓰려면 젊었을 때 하나님 믿으라고 써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6세 때 신앙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이제 한 살 됐네”라고 하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우상에게 절하며 사셨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며 산 세월은 100살을 넘게 살았지만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산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다보면 좋은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뱁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하나는 순간 순간을 무심코 보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다시 찍을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는 꽃을 찍습니다. 그런데 인물 사진도 찍는데 제일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자 누드요? 그거 별로 입니다. 자연스런 선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지만 진짜 아름다운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모습입니다. 힘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사진,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런 사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아마추어들이 시장에서 고생하시는 주름이 많은 분들을 찍어 가지고 흑백으로 만들어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고생한 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고생은 하지만, 땀을 흘리지만 힘이 느껴지는 소망이 보이는 그런 사진이래야 됩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김희중(에드워드 김)씨입니다. 그가 잘 찍는 사진은 땀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이분은 한국농촌의 모습을 많이 찍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농부와 코스모스’(1974, 남해), ‘저녁 노을이 붉게 든 노을과 지게진 노인’(1975, 삼천포) 등이 있습니다. 그는 <내셔널 지오그라픽 18년> 기획위원, 편집팀장(4년 8개월)과 <타임> 사진기자를 지낸 분입니다. 타임지와 내셔널 지오그라픽 에서는 사진을 위해서라면 없는 렌즈도 새로 깍아 만들어 주고 비행기도 전세 내어 주고 모든 다 지원해 주는데 입니다. 그가 편집 팀장을 맡을 때 900만 부이던 것이 나중에 1,200만 부로 늘었습니다. 1,200만 부는 한 권의 두께가 1cm라고 할 때 일렬로 세워 놓으면 120km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화보(영문, SEOUL)의 편집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18년 간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일하고 편집장까지 했으니 세계적인 한국화보가 나오는 것이지요. 7개 국어로 98개국에 86아세안 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셔널 지오그라픽 수준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계인이 감탄했습니다. 한국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인지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 LCD TV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중에 그만두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김희중씨는 열심히 일하는, 땀흘리는 사람을 찍어서 예술로 만드는데 정부에서는 굳이 돈 들여서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그래서 잘렸습니다. 이분이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편집장까지 오르게 된 것은 1973년 최초로 북한을 취재한 공이 컷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갈 때 유서를 써 놓고 미국을 출발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생명을 보장 할 수 없으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 허락을 받고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이틀동안 바깥구경도 못하고 김일성 초상이 붙어 있는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그 때 그가 북한 안내원에게 말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면서 몇 시간씩 낮잠만 자면 어떻게 합니까?” 이 말에 그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그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김 선생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이 혁명과업을 완수합시다.” 하는 통에 이제 못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 때의 북한 취재로 <내셔널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에 북한 기사가 실렸고, 미국 해외 기자단 최우수상 취재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상입니다.
그런데 그 때 북한의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자유롭게 뛰어 노는 모습을 찍으려고 했는데 북한 안내인이 찍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회의 어두운 면이라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나 북한이 숨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꾸미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못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는 미국과 같은 나라를 보면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온 사회가 일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네 다리를 모두 다친 여우를 보았습니다. 야생 동물이라 다리를 다치면 사냥을 못하기 때문에 죽습니다. 며칠 후 같은 장소에 갔는데 여전히 여우가 살아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호랑이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와 신기하다 하나님이 다리 다친 여우도 저렇게 먹이시는 구나’하고는 굳은 확신이 생긴 이 사람은 누워서만 지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굶어 죽었습니다. 죽고 난 후에 하나님께 갔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왜? 내게는 호랑이를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왜 호랑이를 본 받을 생각은 안하고 여우를 본 받으려고 하니’하셨다고 합니다. 같은 이슬을 먹고살지만 뱀은 독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꿀벌은 꿀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놀고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도행전입니다. 땀의행전입니다. 성령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기도가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생생하게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잠시 이 땅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사도들이 모였을 때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다락방에 올라가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오순절 날 다시 모였습니다. 기도 중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치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행 2:1-4). 약속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를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 8:34)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큰 응답을 받아야만 복된 것이 아닙니다. 주께 기도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우리는 사실 혼자 하는 기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뜻대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두 부부가 살면서 마음을 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마음을 합할 때는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처럼 예수의 어머니를 신성시 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분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태어날 때의 성령의 잉태함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의 신성을 때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예루살렘성에 가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의 어느 무리에 예수님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사흘을 찾은 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보이도록 간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마리아는 예수님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가 있었습니다. 예식기간동안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안타까워하던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4: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부탁해 놓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만 떼를 쓴 것이 아니라 다른 하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기도하지만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자에게 주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이러한 간청함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예수의 십자가 밑에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당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도 임하기 이전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라고는 했지만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 틈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힘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어머니가 먼저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마리아가 교육을 잘 시킨 것입니다. 어머니 말 잘 듣는 자식들 중에 나쁜 자식 없습니다. 잘못된 자식 없습니다. 어머니는 예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어머니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님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자식을 키우실 겁니까? 남편 달달 볶아서 돈 벌어오게 하고, 아이들 밤새도록 학원 보내서요? 기러기가 되어서라도 유학 보내서요? 기도로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똥돌바우야, 어머니가 너를 위해 기도하시던 걸 기억하니? 눈감으시기 전에 너한테 반드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잖니?” 42년 만에 러시아에서 극적으로 만난 누나는 똥돌바우가 미국이나 서울로 탈출해서 반드시 어머니의 유언대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똥돌바우는 지난 40년 간 평양사범대학에서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있다가 1992년 한국으로 망명한 김형직 교수의 어릴 때 별명입니다. 얼굴도 둥글둥글하고 몸도 둥글둥글하다고 붙여진 별명이라고 합니다. 1991년 김 교수는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환교수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에게 다시 성경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똥돌바우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6.25 이전 함흥 함주군에 있던 오로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는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성경 구절도 잘 외워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주일날 새벽이 되면 똥돌바우를 일찍 깨워 가마에 데운 물로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손발톱을 깎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낼 연봇돈(헌금)을 부엌 아궁이의 재로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주머니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똥돌바우는 똑바로 서서 유년주일학교 교가를 불렀고, 어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셨다.
주일아침 아들을 목욕재개 시키고, 헌금을 윤이 나도록 닦아 주일을 맞이하던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과 40년 동안 헤어졌던 동생 똥돌바우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하던 누나의 기도는 잃어버렸던 김형직에게 새로운 신앙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1998년 어린 시절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최순직 목사(천안대총장)를 50년 만에 재회하고 주님을 새로 영접하였습니다.
최순직 목사는 임종의 순간 가족을 통해 똥돌바우(김형직)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최순직 목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일학교 제자인 김형직 교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남북이 통일된 다음, 고향 땅에 돌아가 우리가 처음으로 주님을 알게 되고 따르게 되었던 잊지 못할 우리 오로교회를 저를 대신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하여 주시…” 그는 제자에게 이 마지막 기도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은 똥돌바우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의 기도를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위대합니다.
기도보다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기도가 나를 살렸습니다. 우리 교회를 살렸습니다. 세계를 살렸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도 살아있는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과 여자들과 마리아와 동생들의 기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 합심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최초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무식한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24), 다윗의 시편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6) 하고 외칩니다. “진짜 베드로 맞아?” 할 만큼 놀라운 설교를 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지 못할 설교를 합니다.
이제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 받음을 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택하면서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바둑에서는 ‘묘수를 세 번 두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묘수를 세 번씩이나 두어야 할 정도로 형세가 어려우면 결국 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아무리 묘수를 두어도 그것은 망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최초의 유럽전도)에 이르렀을 때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행 16:13) 기도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여기서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는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고 그의 집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곳 빌립보에서 복음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곧바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기도는 역사를 동반합니다.
 

성령으로 심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7-8)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지난 한 주간은 국가적으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5대 대통령을 지내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오늘이 영결식 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셔서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숱한 고생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사하려던 나로호가 발사되지 못하고 연기되었습니다. 북한의 여러 가지 변화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전 세계에서 특파원들이 제일 주제하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랍니다. 한국은 수시로 세계 토픽이 터져 나오는 나라입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10년 가야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기사거리가 한국에서는 수시로 나온다는 겁니다. 벌써 올해 들어서만 북한의 핵폭탄시험, 유엔제재, 전 노무현 대통령 죽음, 북한의 미국기자,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사건, 최진실 씨 자살(유골함 도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서거 등 우리나라의 일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세계적인 뉴스가 줄지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재미있는 지옥이 아니라 재미있는 천국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은 법입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마음입니다. 성령입니다. 마음을 지키면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것을 모르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또 거두기도 하셨습니다.
본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플라나오’는 “잘못 되게 유인하다, 미혹하다”는 뜻입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는 개역성경은 “만홀히 여김” 이라고 번역했었습니다.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취급 당하다” 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잘 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겔 11:5)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마 마음이 돈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금고를 사고 자물쇠로 잠그고 CCTV달아 감시할 것입니다. 그것이 더 많은 돈이거나 보물일수록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에서는 제일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했나요? 내 버려 두는 것 아닌지요? 큰일납니다. 마음은 잡아야 합니다. 흘러가는 데로 놔두면 안됩니다. 예배시간에 졸음이 오는 것도 좇아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환경스페셜을 보니까 우리나라 해안 가에 쓰레기가 밀려왔는데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왔는지 아람어로 된 봉투, 중국쓰레기, 일본 것 얼마나 많은 지요. 어떤 섬에서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나라의 쓰레기는 일본에 가 있습니다. 일본 쓰레기는 남태평양의 섬들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를 보면서 우리 마음의 일부가 이렇게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쓰레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날 공업화된 쓰레기는 자연에 들어가 자연화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배움, 우리의 선진화가 이런 쓰레기와 같이 버려질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르신 앞을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익지 않은 벼처럼, 저리지 않은 배추처럼 제멋대로 입니다.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영국에 갔을 때 버밍엄의 선교사님 집에서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오토바이가 웅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서는 저 오토바이 괜찮냐고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하는 말, 저들도 넘어야 할 선이 아디인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절대 안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끈 떨어진 연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제멋대로 날아가서는 안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시자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힘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검찰총장이 내정되었습니다. 먼저 번 내정되었다 낙마하신 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이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뭐 그리 큰 세금 포탈이나 물건 훔친 것이 아니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죄가 제일 안 좋은 것은 알고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약한 범죄의 형태라고 해도 그것을 쉽게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요. 죄지은 분들 모아 놓고 사정 이야기 들으면 다 용서해 줄 수 있나요. 이유 없이 범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분은 그 죄에 대해서 잘못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먼저 분은 안 했다가 거짓말로 탈로나 수습이 안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되는 것은 자신의(여기에 자식을 위한다는 핑계도 포함) 영예와 출세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비우면 죄가 보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큰 만큼 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용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누구나 왕위를 생각하면 입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십자가를 생각지 않으시고 세상 왕을 꿈꾸셨다면 그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떠나셨습니다.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비웃음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방 얻으러 다닐 때 복덕방에 가면 얼마짜리 얻으러 왔냐고 할 때 복덕방 주인은 3,000만 원 짜리 이야기하는데 나는 “300만 원 짜리 없어요?” 그 때 복덕방 주인이 픽 웃으면서 “다른데 가보세요?” 할 때 그 마음 아시지요? 한번의 비웃음을 당하게 되면 그 상처가 평생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웃음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병든 소녀를 고쳐 달라고 부탁을 받고 그 집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수께 그 소녀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와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성경은 “저희가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욕의 순간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모욕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모욕은 모욕으로 되 값을 수가 있습니다. 보란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소녀를 살리시면(깨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말로 싸워서 이겨 가지고 전도하지 못한다구요. 이기면 전도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면 승복하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빠서 교회 안나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39-41) 예수님은 마음을 지키셨습니다.

방송사의 한 기자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왜 따뜻한 뉴스가 없죠?” 잠시 생각하던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조용하기 때문이지요.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목소리가 크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대체로 조용해서 뉴스에 잘 나오지 않아요.”

캄보디아에 가면 앙코르와트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를 위해 창건된 캄보디아 앙코르에 있는 사원으로서 크메르 제국 때 30년 동안 지은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정글에 가려 몰랐습니다. 이 앙코르와트가 지배하였을 때는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인도에서 중국까지 버어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모두다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 권력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건물들이 정글에 가려 있다가 역사에 숨어 있다가 드러난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글 속에 돌로 만든 엄청난 도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망했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어떤 전염병에 걸려 다 죽었지 않나 추측할 뿐입니다. 기독교는 앙코르와트와 같은 그런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심령에 집을 짓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인간의 길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집을, 성령의 집을 짓는다면 우리가 앙코르와트와 같은 건물을 짓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초가집 하나 짓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 주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내 자녀가 실수를 하면 비웃습니까?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내 자식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 자기 자식을 비웃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우리가 아무리 미련해도,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비옥하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스도께 집어넣었다가 꺼내는 것입니다. 필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을 그리스도의 필터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심는 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영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올 때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목사님이 우리의 사기를 부축이냐고 저렇게 설교하시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혹 우리가 착각하여 예수님을 짝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또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죄 가운데로 가는 것을 보실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 시며 안타까워하시고, 내가 주님의 일에 힘쓸 때에는 나보다 더 기뻐하시고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는 나를 안아주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식구들하고 보트 타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다 지나 보트를 창고에 넣어두려고 보니 한쪽 널빤지의 못이 허술하게 빠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고칠까?” 하다가 다음에 고치지 하고 창고에 그냥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다시 왔습니다. 부인이 먼저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보트를 타고 바닷가로 나갔는데 저녁 늦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안절부절 하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제 서야 지난 여름에 못질하지 못한 널빤지가 생각났습니다. 점점 불안해 졌습니다. 그 때 아이들은 기적 같이 돌아와 왔습니다. 그 배의 널빤지를 보았는데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고 새 널빤지로 잘 못질되어 있었습니다.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을 고친 적이 있냐고? 부인은 페인트 칠 한 것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페인트칠한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분은 “페인트 칠하다보니 널판이 부서졌길래 새 것으로 박아놓은 것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들(적)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다는 것은 지금 해야 합니다. 미룰 일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예수님께 집어넣었다 나오는 것만 취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결론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 같은 세상 생각 다 버리시기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1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레 22: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정신을 차리고 경외 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제사이든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물 없이는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수리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에 나는 단지 쎠터를 눌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제사에 우리는 다만 믿고 참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릴 때 좀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 예배는 사람끼리 모여서 가지는 순서가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 부르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엉뚱한 마음으로 기도를 반복한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지극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마치 중언부언하는 의미 없는 기도는 아닙니까? 틀에 박힌 생명 없는 전통적인 예배는 아닙니까? 우리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별 짓 다해도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서면 곳곳마다 피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피’ 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소에는 마루나 휘장이나 모든 기물에 이르기까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속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속죄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아무거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기르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자기 소유물 중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돈주고 사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지금 만일 하나님이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러한 명령이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아브라함에게 떨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의 이야기이니까 그냥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오늘날, 내게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저는 선교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만 여러분! 감사할 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자식 바치라고 하시지 않잖아요.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좀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창 2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고민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길떠날 준비를 합니다. 가기 싫었으면 저녁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한마디도 안 합니다. 물론 본문이 이삭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를 이야기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이삭의 인권이 마치 유린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삭은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제사들 드리러 가는데 양도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려고 나무를 벌려놓는데도 제물이 없습니다. 순간 아브라함은 칼을 빼들고 이삭을 겨냥합니다. 내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은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데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번제물 어린양을 준비하셨다고 하여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산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터가 됩니다. 역대하 3장 1절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입다와 외 딸
이스라엘에 ‘입다’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지도자입니다. 우두머리였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암몬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용맹스런 사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는 길르앗에서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기생하고 관계하고 난 아들이 입다입니다(삿 11:1). 그래서 그는 이복형제들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핍박을 견디다 못해 돕이라는 곳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돕이라는 곳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골 변방입니다.
변두리입니다. 입다가 그곳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을 가르쳐서 삿 11:3절 말씀에 잡류라고 말하는데, 잡류는 무가치한 사람들, 부랑배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입다는 그러한 깡패들과 어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이 대대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지도자로 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가지의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다의 서원입니다. 그는 전쟁에 앞서서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 만약에 전쟁에 이기게 하시면 가장 먼저 저를 환영하고 영접하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서원하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합니다. 개선가를 울리면서 입성하는데, 자신을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왜 입다가 처음부터 사람을 제물로 드릴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개나 소가 마중 나올 것을 염두 해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생각은 이방종교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입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드리는 제사가 가장 큰 제사이고 가장 큰 제물입니다.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님이 첫선교사로 갔는데, 그 선교영화에 보면은 이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어느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어느 허름한 집에 불이 꺼지지 않고 여인네의 흐느끼는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연유를 물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1년에 한차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때묻지 않은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그 차례가 바로 자기 딸이라는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 울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걱정 말라고 위로합니다.
드디어 날이 밝고 이 처녀를 꽁꽁 묶어서 들것에 실어서 커다란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 동굴 가운데, 제단 위에다 처녀를 눕혀 놓고는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 들어왔습니다,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구렁이가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것이죠, 혀를 낼름 거리면서 처녀에게 접근하여 한 입에 삼키려는 순간, 이기풍 목사님이 “멈춰라” 하시면서 구렁이와 한판 싸움을 붙었습니다. 구렁이가 목사님의 몸을 칭칭 감았습니다. 목사님은 뱀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이 귀신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뱀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구해서 내려옵니다. 그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첫 교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최상의 제사였습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렸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재물로 드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무남독녀 외동딸을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딸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아버지의 실수로 죽임을 당한 딸,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은 왜 그 죽음을 막지 아니하셨을까요? “입다야, 중지해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희생제물”입니다. 입다는 남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딸이 아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입다의 딸이 죽은 것처럼,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죽으셨습니다. 순전히 다른 사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생제물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씨랜드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23명의 어린이들이 새카만 숯으로 변했습니다. 기가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당시 어느 분이 PC통신에 이러한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사우나를 하다가 문득 죽은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땀 좀내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얼마나 뜨거운 고통을 당해야 죽을까? 그것도 어린 아가들이… 아이들이 얼마나 뜨거웠을까를 생각하니 사우나탕에서도 소름이 끼쳤다”는 것입니다.
사고현장에서 어느 부모는 한웅큼 뽑혀 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했습니다. 뜨거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서 6살, 7살 먹은 아이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모기향불이 원인입니까? 술 먹고 있었던 직원들이 원인입니까? 원인은 우리들의 탐욕, 부정과 부패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탐욕이 원인입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부정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어른들 때문에 순진한 23명의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PC통신에 이러한 짤막한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씨랜드에서 운명을 달리한 아기 천사님. 다음에 태어나실 때는 한국에 태어나지 마시구요 진실이 통하는 나라. 불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꼭 태어나세요.” 그들은 우리의 죄, 탐욕에 대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소리에 아브라함에게 “멈추어라!” 하는 지시를 천사들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하나님을 위해서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희생제물이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희생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죽어간 선열들에게 빚졌습니다. 우리들의 탐욕과 죄 때문에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은 어린아이들에게 빚 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을 길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소와 양, 비둘기는 있는데 물고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물고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좀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 물고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암수 두 쌍씩 들어가서 살아 나와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물고기는 산채로 성소까지 가져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바울이 표현한 ‘산 제사’ 너무 멋있는 말입니다. 죽어서 드릴 생각을 하기 이전에 지금 살아서 주님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거룩한 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구별된 단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아멘, 할렐루야”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가지 더 배웁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말의 ‘거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단어를 원문의 코데쉬(vd,qo)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데쉬는 성소입니다. ‘거룩’이라는 말과 ‘성소’는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이며 같은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서 있던 시내산의 땅이 금잔디를 깔아놓은 땅이 아닙니다. 그곳 역시 다른 땅과 다르지 않습니다. 돌이 있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은 흙이 덮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돌과 흙이 있는 땅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이 시내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선 곳”, 하나님이 이 땅을 밟고 서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이 성소입니다.

사무엘상 5-6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블레셋 에벤에셀 이라는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어찌해야 모르니까 자기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별 짓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별 짓 다해야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가서 될 일이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삼상 6:19)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한탄합니다. 무식한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무서움을 안 것입니다.
구약도 잘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법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궤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없는 예루살렘입니다.

거룩한 길이란 성전으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길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보다 좋을 순 없습니다. 그 길이 대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길에 융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거룩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길은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여기에 보면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주의 힘이 아니면 우리가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거기에 대로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대로(마슬룰)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를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시기적인 문제입니다. 이 대로가 언제 있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분 다음에 나오는 9-10절에 보면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본문의 장은 택한 백성이 누릴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또 장차 임할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예언적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라 하실 때, 우리의 수고가 끝날 때, 이러한 길을 예비하신 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로(마슬룰)은 일종의 공공도로를 말합니다. 나라에서 닦아놓은 도로를 국도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길입니다. 7절에 보면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뜨거운 사막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여우나 늑대가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길이 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길을 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길을 가리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히 10:20) 라고 합니다.

역사상 미국 교계에서 이적과 기적을 제일 많이 체험하고 주님과 함께 사역한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캐드린 쿨만(Kathryn Kuhlman)입니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하나님은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부흥과 기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캐드린 쿨만은 여자입니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여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캐나다 벤쿠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캐나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경기장에는 휠체어를 타고온 환자, 들것에 실려온 환자, 목발을 집고 온 사람들로 가득 찼고 기적적으로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고 병 나은 사람들이 단 위로 올라와 쿨만 여사에게 안수 받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쿨만 여사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쿨만 여사님 감사합니다. 나의 이 병을 고쳐주시니 어찌 감사해야할지…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쿨만 여사는 펄쩍 뛰다 못해 화까지 버럭 내면서, “뭐라구요? 내가 당신 병을 고쳐 주었다고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병은 내가 고쳐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감사한다고 합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예배할 장소에 대해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오랜 갈등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산에 따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가 그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성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성전정화사건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전정화사건이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마치고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2장에 이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과 달리 사역초기에 성전정화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학자들간에 의견이 많습니다. 하나의 사건인데 요한이 사역초기에 기록해 놓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역 초기부터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을 행하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더 중요한 것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패부리는 것쯤으로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럼 너는 무엇을, 무슨 표적을 보여줄 수 있느냐?(요 2:18)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이 땅위에 거룩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메카도 아닙니다. 이 땅에 거룩한 장소란 없습니다.

이 땅에 성전이 있었던 시대에는 그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이 거룩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거룩한 성전이 없으니 ‘거룩한 길이’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는 찾았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합시다. ‘거룩한 길’이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 가서 만납니까?

대통령을 만나려면 청와대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청와대 주변을 어슬렁거립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청와대 담 너머로 고개를 쳐든 채 뛰어봅니다. 어쩌다 대통령이 나오면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기대해 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나를 수상하게 여긴 경비가 쫓아옵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청와대 경비에게 잡혔습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통을 만나려 했지만 그분은 너무 바빠서 나 같은 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을 어떻게 만납니까? 비서실에 대통령면담신청을 하세요?” 그러면서 경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입니다. “그리고요?”, “기다리세요?”, “언제까지요?”, “연락이 갈 때까지요?”, “연락이 안 오면이요?” “그럼 만날 수 없습니다.” 초청장이 없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루를 소비했지만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옵니다. 대통령 쪽에서 나를 먼저 불러주지 않는 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청와대 담이 가로막혀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보다 더 높은 더 두꺼운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부수고 들어갈 수도 넘어갈 수도 없는 장벽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땅을 갈면서, 추위와 더위에 떨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곳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들어갈 수 없나 엿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산을 천사들로 하여금 불과 화염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잘못하면 타죽게 생겼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깨끗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동산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담이 무너졌습니다. 사막이 강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변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대통령의 식구들은 청와대 들어가는데 초청장도 필요 없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위에서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는 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거룩한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힘이 듭니다. 땀이 납니다. 때로는 피도 납니다. 그래도 갑시다. 그 길은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공의의 도로입니다. 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길, 이 거룩한 길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오직 진실만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 3:15)

이번 주는 서은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방학하여 서은이하고 지낼 시간이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화요일인가요 옥수수를 쪄서 먹고 “집에 가져갈래, 몇 개 줄까?”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언니 캠프에서 돌아오면 하나 주고 싶다.” 그리고 또 “아빠는 많이 먹는데…”그러는 거예요. 서은이가 한 이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심지어는 생각나지도 않는 죄를 억지로 짜내서 회개하는 것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회개자체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줄 아세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늘 자신을 위해서라만 책임지기보다는 거짓말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몇 일 전에 CGNTV에서 인터넷에 관한 녹화를 했습니다. 저에게 질문하기를 “컴퓨터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도 하나의 도구인데 예전 도구에 비해서 그 도구의 힘이 엄청나게 좋아진 것입니다. 칼도 보통 칼이 아닌 겁니다. 예전의 칼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컴퓨터는 잘 못 사용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사람을 죽여요?” 그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악성 댓 글 하나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만 악한 죄인들의 말은 사람을 죽입니다. 사실을 모른 채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은 증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김포공항에 전화해서 비행기 폭파하겠다고 거짓말한 미성년자에게 그 피해액을 부담하라고 법원은 판결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비행기가 제 시간에 이륙하지 못하고 검사하고 불안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모릅니다. 거짓에 속아본 사람들은 정말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배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에 중국 다녀온 분이 장뇌삼이라고 해서 보기 좋은 놈으로 사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본드로 붙인 것이 물러서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처음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선서입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재판관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선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증인입니다. 우리도 서약합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진실만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판사석은 비어있고 판사는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보는 배심원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의 명령으로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행 1:8).
우리는 모두 증인입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오도하거나 부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정인 증인과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법정의 증인은 결국은 증인 석에서 내려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언제나 심리 중이기 때문에 법정은 영원히 개회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짓이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으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평가중의 하나는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고 말합니다.(사 53:9)
그러나 우리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히려 제일 큰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진실만을 말씀하셨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부풀린 일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진실을 외면한 일도 없으시며, 그분의 입술에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아멘(진실)”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계 1:5) 라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는 것입니다(롬 8:28).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직을 줄이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끗이 없애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살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윤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 거짓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전 6:9에서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백해 졌습니다. 불의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히 6:18)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하시겠다거나 안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1:2에도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똑같이 증언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이후에 죄와 곧 거짓 가운데 얼마나 노출되어 있고 거짓말속에서 살아가는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질문하기 일수입니다.
“왜 하나님은 정직을 요구하시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인간이 얼마나 거짓에 익숙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왜 우리는 거짓을 용인하는가?” 예례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부정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연구 조사 없어도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이 우리를 또 속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바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떤 남자가 여행 중에 있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우리나라 남자는 아닙니다). “내 고양이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죽었소.” 그랬더니 아내가 “여보. 그렇게까지 솔직할 것 없잖아요. 왜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알려주지 않았어요? 여행 잡쳤잖아요.”그럽니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처음에 고양이가 지붕에만 있었다고 말했어도 되잖아요. 그러다 내가 파리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 몸놀림이 둔해졌다고 하고, 런던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 고양이가 병원 갔다고 하고, 그러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죽었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남편은 이런 원칙은 금시초문이었기도 하지만 아내의 말을 늘 귀담아 듣고 배울 생각이었습니다. “알았소. 다음 번에 잘 해보겠소.” 그리고 나서는 아내는 “그건 그렇고 우리 엄마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한참 생각한 후에 “음… 장모님은 지금 지붕에 계시다오.”그랬다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거짓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진실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고 사탄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성도도 교회도 거짓일색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가라지 뽑다가 알곡 다칠까봐 이제는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유예기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기간이 축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즉각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즉결 심판이 유일하게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5:1-10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땅 판 돈을 모두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반을 감추고 반만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거짓에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베드로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고 증언합니다.

오래 전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남자가 속임수를 써서 중국 황제의 악단에 들어갔습니다. 연습이나 연주가 있을 때마다 그는 피리를 입술에 대고 부는 시늉을 냈습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랏돈을 먹으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연주가마다 돌아가며 독주를 청했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는 눈앞에 캄캄했습니다. 이제 와서 피리를 배울 시간은 없고, 꾀병도 내어 보았지만 궁중의사는 속지 않았습니다. 독주가 있던 날 이 거짓말쟁이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이후에 이 사람의 자살을 설명하는 말이 “그 사람은 책임을 거부했다”로 굳어졌습니다. 거짓의 치료 책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책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마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 하십니다. 주님께 진실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증인이 참 무섭습니다. 증인에 죽고, 증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증죄 또한 큰 것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증인이 타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 사사가 나옵니다. 암몬하고 이스라엘하고 치열한 전쟁이 있을 때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서원 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올 때 그의 무남독녀인 딸이 제일 처음에 마중을 나왔습니다(34). 입다는 옷을 찢으며 통곡했지만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35). ‘입다’는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데 함부로 입을 연 것이 잘못입니다.
욥이 증거 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16:19)
바울도 증거 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보이는 것이 진실만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만을 전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곽윤섭)
음수에 대해서, 실제 보이지 않아 서양에서 17세기까지 불합리한 수로 여겼습니다. 데카르트(1595-1650) 이전의 서양 수학자들은 음수를 가공의 수, 불합리한 수, 가짜의 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음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수는 보이는데 음수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수는 예를 들어 양이 세 마리, 사과가 3개 그러면 다 보입니다. 이것을 자연수라 합니다. 그러나 음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할머님이 젊어서 남편이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 되셨는데 결혼을 안하고 혼자 사셨습니다. 할머님에게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셨어요?” 묻는 말에 할머님은 “언젠가 기차를 타고 오는데 시골에서 서울 올 때까지 남편이 두 손을 꼭 잡아서 불편하고 창피해서 손놓으라고 했는데 그 말에도 남편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어”하시는 겁니다. “예 그리고요.” 그랬더니 “그것 뿐이야!, 두 손을 꼭 잡았던 할아버지의 그 손이 지금도 나를 잡고있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지?” 그러시는 겁니다. 주님은 무릎은 꿇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시고 씻어주신 발을 더럽히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