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9-10)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사랑’ 하고 ‘사람을 사랑’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독생자를 사람들 손에 내어 주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각자에게 주신 능력을 활용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땀흘리고 애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거져 받으려고만 하는 곳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는 것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미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고 건강을 구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데 지구촌에는 이런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도와 네팔을 다니면서 본 것인데요, 차를 타고 가다보면 카다란 돌산아래에 앉아서 돌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루빠라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4살 때부터 어머니와 이곳에 와서 돌을 깬지가 4년이 되었습니다. 돌 깨는 일이 어린애 장난이 아닙니다. 손에는 온통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한쪽에 깊숙한 흉터가 나 있었습니다. 망치 머리는 아이의 주먹보다 훨씬 컸습니다. 1센티만 어긋나도 손가락은 박살날 듯 보였습니다.
루빠는 카투만두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아그레콜라 강변 럽세 바거드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시계는 오전 10시 30분을 가리켰습니다. 아이는 아침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물로 배를 채우고 물안개가 걷히는 때부터 지금까지 돌을 깨는 중입니다. 이렇게 깬 돌을 100미터 떨어진 강까지 매일 15킬로그램이 넘는 광주리를 이마에 끈을 맨 채 하루에 한 두 번씩 왕복합니다. 온 가족 4명이 깬 돌을 건축자재상에게 팔면 100루피를 받습니다. 우리 돈 1,500이 채 안됩니다. 학교는 두 달 전 입학만 해 놓았지 지금까지 못 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무표정하게 돌만 바라보고 깨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돌 깨는 게 지겹니 않니?” 통역을 기다리는 순간 질문이 너무도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이게 제 운명이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돌 깨는 일밖에 없습니다. 8살 아이에게서 운명이라는 말이 나올 때 왠지 화가 났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며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 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픈 사람이 또 있고 사람이 또 병난다고 지금 치료해주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의 운명을 말하던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게 될 날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솔직히 큰 교회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돈 버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자녀를 구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기독교인)만 해야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 당연한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멀어지고 육신의 눈만 보이는 것입니다(롬 8:5-8).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였다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
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라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제자로서 당연히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한 때 ‘말 되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거나 공감이 가는 말을 하면 “그거 말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언어)에는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있어도 ‘말이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자로 말하면 語不成說(어불성설)이란 숙어는 있지만 語成說(어성설)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나 정상적인 것에는 유난스럽게 표를 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말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남자일 경우는 그냥 교수요 작가요 선교사라고 부르지만 여자일 경우 ‘여교수’, ‘여류 작가’, ‘여 선교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것을 有標化(유표화)라고 부릅니다. 친족 호칭도 모계 쪽은 모두 ‘외’ 라는 표가 따라 붙습니다. ‘말 되네’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회에서는 말 안 되는 것이 유표화 되지만, 말 안 되는 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말 되네’ 라는 소리가 유표화 되는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라고 부르지만 ‘친할아버지’라고는 안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할아버지’ 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저 ‘아버지’ 그렇게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만 하면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땅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 하나님을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님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영’ 입니다. 삼위일체란 우리가 포함되어서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나’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앞에 두고 참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마치 당연히 받아들여할 말씀을 이 사회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올 때에 의무감으로 나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은혜로 나오면 기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무조건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이고 응답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식은 자기 생각만 하고 부모님께 떼를 씁니다. 그런 자식에게 부모는 한 두 번은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속 하나님 아버지께 구한 것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그 이름’,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서, ‘매일 매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며, 이루지는 데 힘들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힘드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일이 늘 귀한 것임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는 교회
예레미야 51: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고 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백성에게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말을 그대로 선포하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시다” 하라 하셨습니다. 선포하는 일은 네가 할 일이요 듣고 안 듣는 것은 네 백성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닭은 새벽에 울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개가 물었습니다. “너 왜 아침이 되었는데도 울지 않니?” 그러니까 닭이 말하기를 “요즘 다 시계를 차고 다니는데 내가 울 필요가 있겠니?” 라고 합니다. 그리면서 닭이 개에게 “그러는 너는 왜 짖지 않니?” 그럽니다. 개가 말하기를 “우리집 주인이 큰 도둑인데 내가 짖을 필요가 있겠니?” 하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 타락했다고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울지도 않고 짖지는 않는 닭과 개처럼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들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닭의 사명이요 개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을 체험하고 믿고 나가 선포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에게 아내 넷이 있었는데 아내 넷 중에 라헬이라고 하는 여인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을 다른 열 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너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도단에 가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어린 요셉이 땀을 흘리면서 떡을 한 짐 지고 찾아왔지만 형들은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미운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옷을 완전히 벗겨 갈기갈기 찢어 양의 피를 발라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옷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니다가 발견했는데 악한 짐승이 찢어 먹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사람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옷 한 벌을 못 입고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할 나이에 알몸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지만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직과 성실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사랑 받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이 저는 여러 사람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나에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한 것입니다.

선교부 돈을 유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참고 용서해 주다가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 번은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 주었습니다. 거기에 앙심을 품고 얼마나 욕을 해대고 싸우고 나가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이 미워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그 분이 떠난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10년, 15년 지나고 20년이 가까워 올 때까지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만날 재간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났습니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것을 좇아가서 먼저 인사하니 마지못해 인사를 받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한 두 마디 하다가 자기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수첩이라는 것을 1년 쓰고 또 옮겨 쓰는 것이 아닙니까?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자기 가족 이름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해마다 수첩에 옮겨 쓴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다시 예수를 믿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네팔선교사 편지에 보니까 네팔 선생님이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거짓 말을 하고 월급 몇 달치 월급을 미리 받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보았더니 중동 두바이에 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때에 미국 선교사는 이들을 돕겠다고 네팔로 나라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 안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열심히 선포합시다.

믿음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고 믿음을 회복하니 잃어버렸던 것을 다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잃어버려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잃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을 다 가지고도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다 잃은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회복되므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음을 회복할 때 나 하나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가 변화됩니다. 요셉이 원망과 불평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면 요셉만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의 식구들도 심지어는 애굽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할 수 있다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일을 생각하고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직함으로 받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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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6)

우리나라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 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 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 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 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 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 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 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 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목사, 전도사,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

은혜(恩惠 Grace)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발적이고도, 제한 받는 일 없는 사랑의 은사(선물).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그 죄와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사죄와 생명을 주심을 말합니다. 은혜는 죄 사함 받은 자를 새로운 사명 위해 분발케 합니다(롬 1:5,고전 3:10,15:9-10,갈 2:9,엡 3:7-8).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며 봉사해야 합니다(엡 4:29)

본문에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그랬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은혜 못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정직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은혜라는 말 가운데 마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덮어 주기만 하는 것이 은혜인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직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를 바랍니다.

태국에 처음 선교사로 가신 신홍식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통역장교 출신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미국에서 사령관이 우리나라 장성을 만나러 왔는데 통역을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저도 이번에 태국 카렌족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설교하는데 통역이 둘이 섰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전달이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 사령관 일행은 그냥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일로 난리가 났습니다. 통역장교 어디 있냐고 헌병대가 나서서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헌병이 잡으러 갔는데 그곳은 교회였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성이 권총을 뽑아들고 이새끼 죽인다고 머리에 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할 말 있으면 해 봐.” 그랬습니다. 이때 신홍식 선교사님이 “장군님은 각하를 만나고 있는데 나오라면 나오시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저는 각하보다 더 높은 분을 만나고 있는데 어떻게 나옵니까?” 그랬습니다. 그 다음은 군종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해 왔는데 그러더랍니다. “목사님도 여기 신홍식 만큼 믿음이 좋습니까?” 그리고 제대할 때 군복하고 여러 가지를 챙겨 주더랍니다. 그 때 신홍식 선교사님이 “받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장군님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입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이방교회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린 것이 사도행전 15:1절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고 합니다. 사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헤어진 것은 이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할례 받은 자만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1: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할례 받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고후 9:14-15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봉사의 책임이 더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눅 12:48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고 합니다.
욘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 하며 기도하며 은혜를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들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곧바로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께 돌아와 사례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이었습니다(눅 17:11-19).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유 1:4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경건치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방탕한 것(색욕 거리-개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단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교리를 악용하여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므로 마음대로 행하여 방종한 생활을 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를 이번에 초청한 것이 카렌족 족장입니다. 민족 지도자입니다. 이분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카렌족은 팔찌를 찹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기만 하고 만지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만지면 자꾸만 더 만지고 싶다는 거예요.

은혜를 보답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대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는 보기 드문 선한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오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은혜를 받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모습에 나타납니다
마 25:24-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사도 바울은 더 많이 수고 하였다고 합니다
(고전 15:10)…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봉사를 하게 됨을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하면서 자신이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겸손의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찬송가 197장의 가사 내용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정말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드물어요. 적은 소수의 인원이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늘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은혜를 알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이 겸손한 분이신 데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벤허>를 읽어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을 재미있게 묘사를 했어요.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입니다. 경제(돈)는 우리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우리를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썬다싱도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은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를, 폭포수 같은 생명의 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은 10억을 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00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예요.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입니다.
출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인도’입니다. 인도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입니다. 한 때 여자를 택하고 나중에 책임을 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책임 한 것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은 무한 책임을 지시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초대교회 스데반 순교 후에 흩어진 성도들을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택하신 하나님은 어머니 태에서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택했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러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호의다.”(벤자민 워필드)라고 했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하였습니다. 책임자에게 구원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말하기를 “그거 구원이 너무 싸군요.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뭔가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라고 했습니다. 무디는 “당신 오늘 갱에 들어 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 갔었지요?” “수백 피트나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그럼요, 석탄회사에서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했으니 저는 그저 그 승강기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그겁니다. 선생이 승강기를 타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놓으셨으니 믿음의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 구원받은 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벧전 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때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 8명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에서 구원하는 표인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증거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세례에 대해서 필립 헨리(Henry)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나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최고의 진리의 선포자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 모든 삶의 행동의 규칙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고 드립니다. 나는 이 시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또 자유함 가운데서 그리고 영원히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

본문의 “충만한” 으로 번역된 “plhrwvma”(플레로마)는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완성된 완전한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번역된 “kai; cavrin ajnti; cavrito”"(카이 카리스 안티 카리토스) 카이(그러니까? 접속사입니다) 카리스(은혜는) 안티(반대하여 뜻말고도 …때문에, …그래서 라는 전치사입니다) 은혜가 주어진 것 자체가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에 굳게 서라
벤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을 직역을 하면 은혜 안에 너의 자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너 자신을 고착시키라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그 자리에 못을 박아 놓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자는 남편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확실히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자에게는 아내라는 자리, 어머니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마련해 놓고도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심각한 가정이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라고 하는 그 안에 우리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 놓아야 해요. 예수 믿으면서 교회가 자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교회 안에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요.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이에요. 출발이 겸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에요? 보여주신 삶이 무엇이에요? 기독교의 출발은 겸손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옷도 한 벌로 입었어요. 나라이면서 군인도 없고 나라이면서 돈도 없고 세금 낼 돈도 없으셨어요. 아주 막강한 내각을 구성해야 될 텐데 어부들을 가져다가 구성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나귀를 타고 가셨어요. 겸손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가 다 겸손이에요. 이 세상에 겸손을 귀히 여기고, 겸손 위에 나라를 건설하고 겸손해야만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어요. 어떤 철학에도 겸손을 예찬하지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겸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어요. 유명한 프레데릭 니체도 말하기를 “사도바울의 이 겸손을 주장하는 것은 노예근성에서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겸손을 가르치고 겸손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철학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아세요? 여자를 사람 취급을 안하고 상놈을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옛날에요 아주머니들이 물을 이고 오다가 학교 갔다고 오는 양반집 아이들과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갈 때까지 그 무거운 것을 이고 옆에 이렇게 섰다고요. 여러분!, 여자를 귀히 여기는 종교가 이 프로테스탄트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 이외에는 여자를 귀히 여기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아멘도 안 하시네. 보십시오. 오늘 유교가 500년 동안 여자들을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힌두교도나 지금 중동에 있는 종교나, 아니 어떤 종교도 다 마찬가지예요. 사람 차별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우리 기독교만 차별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내가 제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가운데 표시하지 않고 다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힌두교도도 머리에 표시를 하고 어디를 가도 다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슬람도 다 두르고 다닙니다. 여러분, 태국이나 버어마, 이런 데 가보십시오. 비행기 탈 때 스님을 제일먼저 타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목사가 먼저 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타고, 장애자가 먼저 타고, 노인이 먼저 타고, 여자가 먼저 탑니다. 먼저 되고자하면 나중이 됩니다. 그러나 나중이 되고자 하면 먼저가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대접받으라는 것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기독교에는 성인이 없어야 되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니 알 수가 있나요.
기독교도인 걸 드러내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드러내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조그마한 우상 종교도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가보십시오. 한여름인데도 유대인들은 다 정장하고 검은 옷 다 입고 다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에 수염을 기르고 다 머리를 닦아 가지고 내리고 다닙니다. 어느 종교든지 내가 최고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사랑해야 되요. ‘윈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 ‘윈수’ 입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윈수’ 입니다. 아직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와 겸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따로 갈 수 없어요. 겸손하여져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 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 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 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 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 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 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 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 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

 

화목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7-21)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서 인터넷 서버를 몇 대 운영하는데 그 중에 윈도우 서버가 2대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NHN(네이버) 보안관제팀에서 우리 서버가 자기네 서버를 공격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는 공격한 적이 없는데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윈도우는 바이러스와 해킹에 취약합니다. 그런데 그 약한 이유가 있어요. 최신 버전으로 계속 업데이트 해야 되는데 하지 않은 겁니다.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관리를 해야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이러스가 틈타고 해커가 쳐들어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늘 엎드려야 되요.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공격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 드려야 합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바로 사탄이 틈탑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화재의 근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주 의리 좋게 살아가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탉이 문제였습니다. 한쪽 집의 닭이 다른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가 알을 찾으러 갑니다. “집에 있어? 우리 닭이 여기서 알을 낳았어. 알 가지러 왔어.” 그랬더니 그 집 아줌마가 “아니야. 조금 전에 운 것은 우리 닭이야.” 그럽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닭이 여기에 왔는데.” “얘가 왜 이래?” 이러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얘, 너 왜 그래. 우리 닭이라니까?”, “아니야, 우리 꺼야” “얘 미쳤어?”, “뭐 미쳤다구?” 이러면서 발전하는 거예요. 말이 격해지기 시작하고 욕이 나옵니다. 과거에 의리가 다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다음날은 남편끼리 싸웁니다. 남편들이 싸우고 있을 때 여자가 막 말하니까 이웃의 남편이 손을 들어 쳤어요. 왜? 말이 안 되니까 손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도 절대로 부인들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주먹 올라갑니다.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빗자루를 던집니다. 물건이 날아갑니다. 그랬더니 옆집 아줌마가 확 불을 질러버렸어요. 한 시간만에 두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18-20절 사이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화목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화목” 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카탈랏소라는 말입니다. 카타(아래로)라는 말과 알랏소(이전에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화목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바꾸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에는 “하나님 저 하나님과 화목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물 드리는 것 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42-47 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고 기도했습니다. 서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심지어는) 45절에 보면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로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합니다. 로마 황제인 네로는 64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로마 광장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와 최고의 학자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바울을 죽임으로 기독교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바위를 뚫게 만들었고 카타콤이라는 동굴을 만들어 지하로 숨게 했습니다. 카타콤은 공동묘지에 만들어진 지하 땅굴입니다. 무덤도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이 때 그 박해의 앞장에 서 있던 디도(Titus)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Domitian, A.D. 81-)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도미티안은 처음에는 선악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듯한 통치를 하다가 나중에는 악행을 일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도 결국 자신을 신이라고 호칭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신전들에 무수한 자신의 신상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그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는데, 그의 사촌의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를 죽였습니다. 200여 년 후의 유세비우스는 도미티안을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에 둘째가는 자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는 A. D. 96년 9월 18일에 그의 아내를 포함한 일단의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A .D. 107년에 순교한 익나티우스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서 40년을 섬기다가 트라얀(Trajan) 황제의 로마 신들을 경배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로마로 후송되어 콜로세움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흥미 거리로 지켜보는 가운데 쇠사슬에 매여 사나운 두 마리의 사자들에 의해서 물려 찢기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3세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은(Tertullian, A.D. 160-225)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저와 그리스도가 투우장에서 만나 그리스도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갈레리우스(Galerius)의 칙령 선포’ 가 내려졌습니다. 무려 초대교회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311년 4월 갈레리우스는 어떤 이유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해의 손길을 접고, “국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Constantine, A.D. 274-337)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 다리를 사이에 두고 그의 적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군대는 상대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쟁 전날 밤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리글자(크스, 십자가)를 보면서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를 신탁으로 생각한 그는 병사들의 헬멧과 방패에 그 기호를 그려 넣고 마침내 312년 10월 28일 운명의 전투에 나아가서 승리하게 됩니다.
콘스탄틴은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후에 313년에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택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기독교회의 재산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몰수된 모든 재산을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기독교는 다섯 개의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언제 핍박이 있었는지 평화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570년에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출생합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보니까 기독교가 싸워도 너무 싸우는 거예요. 이 싸움에 신물을 느낀 마호메트는 이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다른 나라말로 번역도 할 수 없지만 절대 토론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오직 절대적 순종만을 강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사람취급을 안 합니다. 그냥 남자들의 소유물로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재산입니다. 기독교가 싸움을 하는 동안 이슬람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954년에 올가(Princess Olga) 공주가 세례를 받고, 988년에는 키예프(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의 왕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가 콘스탄티노플 교구에서 나온 선교사에게 자진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하들과 귀족들에게도 세례를 받게 합니다. 북서쪽을 향해 많은 귀족을 포함시키면서 성장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이슬람에 의해 무참하게 정복당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589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허락으로 러시아 정교회가 독립교구로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약 400여 년이 지나 정교회 사제와 일부 계급층이 부를 독차지하자 1917년 2월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당시 러시아의 수도 빼째르부르그(레닌 그라드)에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러시아의 군대는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였는데, 발포를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시켰습니다. 결국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 때부터 레닌주의(공산주의)가 부상합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부패하자 공산주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처음부터(선교초기) 나누어져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장로교 안에서 싸움이 붙었습니다. 얼마나 싸웠는지요 누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이단입니다. 어떤 때는 신학적인 논쟁도 아닙니다. 이권 다툼에 이단사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이에 가라지가 또 나옵니다. 싸우는 거 보기 싫으니까 이 사람은 아주 모든 종교를 통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안에 다 집어넣습니다. 한국교회가 싸우는 틈을 노리고 통일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되지 못하는 틈을 타고 모든 가라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그 당시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기사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 구브로, 살라미 등을 방문하며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36 이하를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견해 차이로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 그 후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다녔고, 바나바는 바나바 나름대로 전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때를 회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는 인내와 오래참음, 예의가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을 보면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바나바와 화해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캐나다에 사는 어떤 남자는 26년 전에 결혼해 26세 된 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중매한 사람을 욕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유는 중매를 잘못해 지금 함께 사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년 동안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온 그 남자는 교회 집사라고 합니다. 한 평생을 불화로 산 사람입니다.
미국에 있는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85%가 원만치 못한 인간관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편가르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생도 실패합니다.
또한 교회는 평화시대일수록 안주하면 안됩니다. 일을 해야 되요. 힘이 남아도니까 싸우는 겁니다. 교회가 일을 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일을 안 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무슨 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게 무슨 벼슬입니까? 교회에 왜 물질이 남습니까? 그거 남겨놓으니까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화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할 수 있는 방법 하나만 말씀드립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세우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화목하는 것을 간청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우면 서로 다 망합니다. 화목해야 됩니다. 화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빛(능력)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은 실제 경기에서 중앙선까지는 공을 잘 몰고 간답니다. 그러다가 중앙선이 나오고 상대방이 막기 시작하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자기 골대로 가서 공을 집어넣는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은 것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참 성도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 밖으로 나가면 힘 한번 못써보고 돌아서는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처럼 되어있지 않은지 생각해야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집회할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을 꼬집어 말하기를 ‘바구니 신앙’ 이라고 했습니다. 바구니가 물 속에 있을 때는 물이 가득한 것 같은데 바구니를 건져내면 물이 다 빠지고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주님께 은혜를, 성령을 받기 위함이지만 우리가 나가는 것은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고 도망가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이 사라진 것은 이제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망가트려 놓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 뒤돌려야하는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개역:나는 세상 중의)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왕상 2:2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남자답게 떳떳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상 8:60에서 기도하기를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세상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포기 하셨다면 세상을 구원하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하려 하심입니다.
요 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증언합니다. 세상 속으로 오시고 그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병 고침으로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 4:24-25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중풍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벧전 3:6)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능력입니다. 다른 거 다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윤형본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프스에서 조난 당하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홀로 남았답니다. 그는 13일 동안 넓고 험준한 얼음산을 방황하다가 구조대로부터 구조를 받았답니다. 13일 동안을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계속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걷고 잠깐 쉬고 또 걷고, 졸면 죽는다 하면서 조금씩 먹어가면서 13일 동안을 줄곧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았더니 반경 6킬로미터 내를 뺑뺑 돌고 있었더랍니다. 자기는 직선으로 간다고 갔는데 결국은 같은 길을 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리켜 윤형본능(바뀌 윤, 모양 형)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눈을 가리고 실험을 해 보면 자신은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20미터나 100미터 반경 안에서 빙빙 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도 살펴보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해는 바뀌어도 늘 그 모습 그대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참 잘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는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래도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진짜 우리가 변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이 이 사람들에게 증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병을 고쳤으니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비추라는 것입니다.
본문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는 말씀을 가지고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소금이 맛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짠 맛 없는 소금이 무슨 소금이겠습니까? 예지네 김치가 소금에 절인 김치를 어디서 사다가 김장을 했나봅니다. 그런데 좀 김치 맛이 영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번 윤미영 집사님에게 여쭤보았더니 그건 소금 때문이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소금이 잘못되면 모든 맛이 흐트러집니다. 짠 맛 하나만 잘 다룰 줄 알아도 대단한 요리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 맛을 잃으면”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인 것은 우리가 다 압니다. 죽을 때까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금이 맛이 있을 때 일해야 한다. 혹 언젠가 맛을 잃어버리게 될 때가 오면 쓸모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원문으로 본문 13, 14절을 확인하다가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13절에 “ijscuvei e[ti eij”(이스퀴이 에티 에이) 라는 단어 3개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처음에 나오는 “ijscuvei”(이스퀴이)는 “할 수 있다, 선하다, 힘이 강하다, 우세하다, 완전하다, 많은 일을 하다.” 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ijscuv”"(이스퀴스)입니다. 이 뜻은 “강력한, 능력, 권세” 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본문 위에 3번 더 나옵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하는(이스퀴이)가 번역된 것입니다.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효력(이스퀴이) 입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역사하는 힘(이스퀴이) 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그 맛”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개의 단어가 “e[ti”(에티) “아직, 이후에” 라는 부사 단어와 “eij”(에이) “…이라면” 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이 뜻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에게 그것이 있다면 아직(이후에) 역사하는 일을 할 수 있다”입니다. ‘맛’이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맛’ 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맛’ 이라는 단어 또한 ‘멋’있지 않습니까? ‘맛’과 ‘멋’은 같은 것입니다. 맛이 있어야 멋있는 것이고 멋이 있어야 맛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맛없는 사람에게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네.” 그럽니다. 그리고 멋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 참 멋대가리 없네.” 그럽니다. 여러분! ‘멋’이나 ‘맛’ 있으면 뭐해요? 예. 자랑합니다.

짐승의 이름에 스승 사(師) 자가 붙은 것은 사자(獅子)밖에 없습니다. 사자의 獅자는 개사슴 록변에 스승 사(師) 자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子)는 공자, 맹자 할 때 사용하는 자로 스승에게 붙이는 존칭어입니다. 어떻게 짐승의 이름에 스승과 같은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자하면 생각나는 것은 폭력과 같은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승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그 생김새가 점잖잖아요. 늑대처럼 흉포하지도 않고, 여우처럼 교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발아래 풀만 보고 다니는데 사자는 멀리 지평선까지 바라봅니다. 사자가 호랑이와 다른 점은 호랑이는 밀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멀리 보는 시력에서 사자에게 뒤진다는 겁니다. 사자의 눈은 무엇인가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통찰력과 사물을 조망하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바로 발아래 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을 보고 가르칠 수 있는 사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힘 이것이 ‘맛’입니다.

14절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duvnatai … keimevnh:”(뒤나타이 … 케이마엔) “duvnatai”는 “능력”(뒤나미스)에서 온 말로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능력 있다”는 뜻입니다. 맨 뒤에 나오는 “keimevnh”(케이마엔)은 “만들어지다. 세워지다. 지명되다”입니다. “세상의 빛”은 능력입니다. “뒤나타이”,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keimevnh”(케이마엔)은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워주셨습니다.

본문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출 수 있을 때 비추세요? 등경위에 두세요. 언젠가 우리의 생명의 빛은 꺼지게 마련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할 때 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도와 주려고 해도 이미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종엽이 이야기) 그래서 바울도 경주하는 자처럼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지난번 우리 집사람이 동창 모임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중에 보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교회 다닌다고 말을 안 한답니다. 우리 집사람이 사모인줄을 아니까 한사람씩 와서 사실 나도 교회 다녀, 집사야 그런 다는 겁니다. 그냥 밝히면 그 사람들 속에 끼어서 불편한 거예요. 술도 먹고 해야 되는데 영 빛이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말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빛이라면 어두운데 감춰 놓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비추세요. 빛이 흘러 나가도록 감추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데 감춥니까? 세상 자랑은 다 헛된 것입니다(약 4:16) 히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의 집”은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이제 주님은 육체로 이 땅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충성을 다합시다. 기도하며 합시다. 주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순례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 84:6)

종교마다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슬람의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실천규범 중의 하나가 그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메카의 순례입니다. 힌두교는 그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갠지스 강변에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순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티벳의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남, 사천에서 티벳 라싸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1,000년전 티벳불교가 라싸에서 운남, 사천 장족 지역으로 전래되던 길이라고 하여 이 길을 총 7개월 정도 걸려서 약 2,100km에 달하는 길을 절을 하면서 고행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순례의 길을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대하 6:34-35). 그러나 이제 구약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다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만 보고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내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한 성전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순례를 하려면 특정한 장소를 신성시하고 그곳을 정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장소를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우리는 무소부재(無所不在)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섭리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순례는 여전히 기독교의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모두가 순례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향해 여행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그리고 참음으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피로 얼룩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순례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카(눈물) 골짜기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우물을 파는 순례자들의 고생스러운 수고를 주목하며, 이 눈물의 골짜기를 힘들게 통과하는 동안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카(Baca) 골짜기

어느 곳이나 골짜기는 있습니다. 능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것입니다. 바카 골짜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좁은 골짜기입니다. 그곳은 메마르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빗물을 받아 마시려고 그 가는 길에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그 장소를 칠십인역은 “애통의 골짜기”, 라틴 불가타 역은 “눈물의 골짜기”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뜻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자는 그곳을 우물로 만들어 놓는다” 말입니다.

그러나 바카 골짜기는 호화스러운 왕궁이나 집에서만 지내는 것보다 유익합니다. 따뜻한 공기만 계속 쬐면 근육을 풀어주고 뼈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난의 차가운 바람은 우리를 단련하며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지금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이런 때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겨울이 있는 것처럼 불황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좋지 않은 경우로 말하면 세계대전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많이 만들어지고 개발되었습니다. 지금 불황을 타개하려고 전기자동차가 급속하게 연구되고 있고 이것이 상당히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안 들어가 오염을 줄일 수 있고 이슬람 지역의 중동 국가들에게 달러를 계속 가져다 바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를 통해서 더 소중한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실패 없는 성공은 그 가치를 소중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공을 주신 자를 잊게 만듭니다. 그러나 햇빛이 오랫동안 비춰지지 않으면 해를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새는 태어날 때부터 알 껍질이라는 고난에 부딪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그맣고 힘없는 아기 새를 위해 대신 껍질을 깨준다면, 새는 한결 쉽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새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새를 도와줬다기보다 망친 셈입니다. 언젠가 그 새는 분명 고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어서 더 큰 고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고난으로 수 차례 단련된 사람만이 더욱 큰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법입니다.
환난과 고통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까불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알곡은 까불면 까불수록 바싹바싹 까부는 사람에게로 들어가고, 쭉정이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맙니다. 모래 위의 집인지 반석 위의 집인지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장마 물이 쓸고 지나가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야 누구인들 잘 못 믿겠습니까? 환난 풍파가 참 성도에게는 더욱 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시 119:71)하였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짝은 가시밭의 백합화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밭의 백합화는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 때마다, 연약한 꽃송이가 세찬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를 더욱 날리는 것입니다. 즉 환난 중에도 감사와 기쁨의 향기를 잘 드러내는 예수의 신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험해 보이고 힘들게 보이는 바카 골짜기는 사실 안전한 곳입니다. 이러한 곳이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긴장을 하고 기도하며 지나갑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우물을 파야하는 수고를 통해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기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힘이 듭니다.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 잊어버리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없어요. 무엇이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축복입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별들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게 빛납니다. 향품은 빻아질 때 가장 많은 향기를 풍깁니다. 어린 나무들은 흔들릴 때 더 빨리 뿌리를 내립니다. 금은 문지를 때 더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처자식도 없습니다. 방 한 칸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 심장병, 안질, 신경통 등 그의 몸은 완전히 종합병원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측은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태도입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는 불행하다. 나는 비참하다” 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기쁘다. 너희도 기뻐하라.” 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순례객의 목적은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모든 힘을 들여서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일정한 장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만나는 곳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분이 나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찾아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없애는 대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눅 3:16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땅의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이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부어 주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1:3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확인한 제자들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다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3년 전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겠다고 배를 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르르 따라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체념했습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는, 만날 수 없는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의 현장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실 고기 잡는 방법이 틀렸다든가 그물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그들이 배 왼편에다 그물을 쳤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40년 간 미국 남가주대학 심리학 교수로 있던 골드 박사는 제자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첫째, 걸음걸이가 빠르다. 둘째, 언제나 강의실에 오면 앞자리에 앉는다(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셋째, 시선을 집중시킨다. 넷째, 항상 웃음을 띤다. 다섯째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좌절에 빠진 곳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혼자 했으면 이제는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은 순종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에 하나님 없이 가면 순례하나마나 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순례의 의미가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다시 가 볼까요. 고기 못 잡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순종했습니다. 그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함께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함께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바카 골짜기라고 해도 우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한 찰스 디킨스라는 영국 소설가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많은 빚을 지고 감옥에 가게되자 그는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과 상표를 붙이는 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그 때에 “No advice, no counsel, no encouragement, no consolation, no support from anyone that I can call to mind, so help me God!(충고도,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하소서!)” 라고 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순례의 길을 갈 때 바카 골짜기가 기쁨의 골짜기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바카 골짜기가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생명의 골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피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11)

우리 인사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올 설 명절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30명이고 설 당일 날 교통사고 부상자는 5,176명이나 됩니다. 대물사고 발생은 4,692건입니다. 이것은 연 평균보다 8-9% 감소한 것이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대대 약 500명, 연대 2천~3천명(대령:***)이고, 사단 1만~2만 명(소장:☆☆)이면 10개 대대 또는 2개 이상의 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된 것이고, 1개 사단의 절반이 중상 병이 생기고 자동차는 쓸모 없이 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고인이 된 30명은 아마 자기 자신이 죽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불행은 나에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에 고인이 된 30명 중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군포가 유명해 지고 있습니다. 군포 여대생 납치하여 살인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매스컴이나 다른 사람들은 ‘군포’ 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작 여기에 사는 우리들은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세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 다윗은 전 국력을 사용해가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전쟁의 역사 속에 늘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들이 죽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작습니다. 면적이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다윗 시대 때의 면적은 유대 주변이기 때문에 더 적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적들과 사울만이 다윗을,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미 믿는 우리에게도 사단은 손을 내밉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까지 사단은 쫓아 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 어느 곳에 피해 숨어 있어도 사탄 마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은 21세기가 성령 시대가 아니고 21세기는 무신론의 재도전 시대이고, 적 그리스도의 시대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안전지대(safety zone)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가도 안전한 땅(Safety Island)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가장 안전한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다윗은 이 안전지대를 종종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시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다윗은 어려서 형들과 목장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적장이 이스라엘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없이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피난처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다윗의 도피성이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져 영원한 안전 지대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미국의 서부의 평원지대 중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초원 지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때때로 그곳에 사냥을 하러 가기도 하며 또 그밖에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건조기에는 그 대초원 지대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데 그때는 불길이 60미터 내지 90미터나 높게 타오르게 되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벌판을 달리는 말보다도 더 빨리 번져 나간다고 합니다. 이때,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도피하지 안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속히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 지대를 어떻게 만드냐 하면 맞불을 놓아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초원 지대를 태워 버리면 더 이상 불길에 휩쓸릴 염려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죄를 소멸시켜서 안전 지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며 안전 지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오시는 것만으로 사단은 우리를 헤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마귀는 벌벌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안전 지대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명저 중에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큰 도시가 나옵니다. 하나는 성공과 부와 영화로 가득 찬 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다른 도시는 세속화된 도시처럼 화려하거나 영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 위에 서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속 도시를 로마로 보았고 하나님의 도시는 기독교로 보았습니다. 로마는 망했고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삽니다.

고백하세요.
본문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피한 사람, 하나님만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요청하세요. 제가 일산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여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아파트를 구입할 때 구 아파트 이름이 “청구”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하셔서 아파트 입주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몸 속에는 부적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대들보에 부적 붙여놓은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런데요 몸에 지닌 것 보다, 집 대들보에 붙여 놓은 것 보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하고 주를 믿지 못하고 다른 것에 기대어 보려는 마음의 부적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요, 이것저것 많이 구합니다. 예수께서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무엇이든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합시다. 다윗의 시(기도)를 보면은이요 사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본문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라는 단어만큼 좋은 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말은 성도입니다. 목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도 집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되고 장로 집사는 되었지만 성도가 안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를 우습게 압니다. 여러분! 목사, 장로, 집사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구원받습니다. 총신대학교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1948년 6월 9일 신설장로회신학교 특별 기도회 때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의 본문으로 “선지 학교의 중건”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나온 것이다)입니다.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거룩한 성자(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되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목사, 장로, 집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성도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한 성도들을 존귀한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장수였습니다. 마치 군대 문화와 같은 곳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가 존귀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는 다윗에게 늘 기쁨이었습니다.

훈계와 교훈을 받아들이세요.
본문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랬습니다. 잠언 15: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생명의 길로 가게됩니다(잠 4:13, 10:1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훈계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밤마다 다윗은 양심이 교훈을 했을까요? 예 밤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시 121:3-4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기가 밤에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졸립니다. 육신의 피곤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앞서 모시세요.
본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마치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먼저 드리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뒤에 모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자기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다른 모임이 먼저입니다. 다른 것에 돈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생각에 마음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먼저입니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지금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항상’ 이라는 말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세요?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앞에 두셨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시 17:15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가 일어날 때에 주를 닮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버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빌 2:8) 정작 자신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로마 군인도, 무지하여 침을 뱉으며 따라오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성도가 됩니다. 회개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레 5:8) 라고 했습니다. 급한 것은 나의 속죄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10:10-13)

닭고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입니다. ‘어머니’ 하면 닭고기 스프를 연상할 정도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닭고기는 중요합니다. 갈렙은 양계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번창일로 였습니다. 사업가로 상당히 성공한 그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나 금요일마다 교회에 나와 버젓이 경건한 유대교인으로 행세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랍비가 물었습니다. “갈렙씨, 요즘 당신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고 있어서 몹시 걱정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랍비 선생님도 아시다 시피 전 금요일엔 반드시 교회에 나오고.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고 있는데요.” 그러자 랍비는 “갈렙씨, 당신은 매일같이 당신의 양계장에 나가죠? 하지만 매일 닭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탈무드) 그랬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252명에게 “교회 내부의 가장 큰 문제점” 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삶의 변화 없는 은혜만 추구함’ 이 11.6%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이 ‘믿음과 실천의 불균형’ 을 11.0%로 뽑았습니다. 두 가지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10.8%가 ‘목회자 윤리 부재’, 10%가 ‘개교회 주의’ 순위로 나타났습니다.

“孟子曰 順天者(맹자왈 순천자)는 存(존)하고 逆天者(역천자)는 亡(망)하니라.”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의 명(命)에 따르는 자는 살고, 하늘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게 된다.” 는 뜻입니다.
맹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우상에게 절하거나 조상신에게 빌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맹자가 말했던 “하늘의 뜻” 이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죽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죽습니다.
시 37:20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사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악인이 한 때 좋아보이고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패망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지킨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율법 없이” 란 말은 하나님의 법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는 다 망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삽니다.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8: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가서의 표현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엄중한 말씀으로만 우리를 “살고, 망한다” 는 식의 표현으로만 고 우리를 이끄시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성경인데요 그 말씀이 시편을 능가하는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말씀을 대하면서 저의 딱딱한 면 때문에 하나님의 온유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제가 가로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준 책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랑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신부인 여자는 우리들입니다.

신랑의 모습
신랑, 하나님의 모습이 아가서 1장에 나옵니다. 5절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의 모습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 1:6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흩겨보지 말 것은” 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햇볕에 쬐여 거무스름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면 안됩니다. 그분의 그런 얼굴 모습은 나를 위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의 주름살은 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은 다리를 저셨습니다. 절뚝거리며 강원도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셔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그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라고 했으며 고전 1:18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검게탄 주님의 얼굴을 사랑합니다. 그의 육체적 모습은 흠모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부르심
이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보세요. 아가서 1장에는
7절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9절 “내 사랑아” 13, 14, 15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 10절, 13절에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라고 불러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 사랑해 주셨던 분의 음성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던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예루살렘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얼굴이 검게 타시고, 제대로 쉴 곳이 없어 나그네처럼 다니시고, 머리 둘 것이 없이 이 땅에 잠시 오셨던 주님, 그분이 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을까요?
네.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간곡히 요청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일어나십시오. 주님과 함께 갑시다.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이 야킨(우:그가 세우신다), 보아즈(좌:그가 지키신다) 두 기둥 꼭대기에 쇠사슬에 석류 100개를 매달아 달았습니다(대하 3:16). 우리를 세우시고 지켜주시는 주님께서 쇠사슬로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온전히 붙들어 메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오셨습니다. 라오스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이 그곳 장관들을 모시고 경비를 들여서 한국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처음 온 그분들은 라오스에서 선교하는 것을 방해하고 한국 선교사님들을 오해하다가 한국에 와서 보고는 이런 잘 사는 나라에서 라오스에 와서 고생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것으로 24절기(二十四節氣)가 있습니다. 한 달에 두 개의 절기가 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처음에 시작하는 절기가 입춘(立春 2월 4일나 5일)입니다. 입춘 다음에 우수, 경칩, 춘분 … 동지, 소한, 대한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 중에서 제가 중학교 때 새벽에 신문 돌렸는데요 한자로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 놓은 대문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절기는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계절 중에 봄이 오는 것은 어둡던 죽음의 땅속에서 기지개 펴듯이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집에는 겨울이 가고, 십자가의 사건은 끝이 나고,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는 꽃과 각종 열매가 가득합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함께 가자”는 주님의 부름에 기뻐 뛰어 나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 누님이 어려운 일을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아직 약간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있나봅니다. 사람마다 저에게 누님 정신나라고, 기억을 뒤 찾으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은 기억나게 하지 말게 하여주시고 기억해도 좋은 것만 기억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영광, 축복, 기쁨,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안에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움은 없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모두 다 그 아래 입니다. 예수 믿는 거 이상의 성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공을 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을 믿는 축복 같은 이 복을 이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배설물 같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잘해줘도 좋고, 못해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의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남귤북지(南橘北枳)란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 심은 귤을, 강복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영왕이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을 초청한 자리에서, 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당신같이 키가 작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으니 말이오. 라고 비웃자, 안영이 말하기를 저희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그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지요.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 중에서 가장 작은 키에 속하므로 초나라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안영의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기세가 꺽인 영왕은 은근히 부화가 끌어올랐는데, 마침 그 앞으로 포리가 제나라 사람인 죄인을 끌고 가자 영왕은 안영에게 들으라고 큰소리로 죄인의 죄명을 밝힌 다음,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는 모양이지요. 하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안영은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듯이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었을 때는 본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다가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초나라의 풍토는 엉망인 모양이죠?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나오면 새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세상 밖에 모르고 살 땐 엉망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안에 살면 참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미국 교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12시부터 깨어난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잠을 잠시 깨워 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11시부터 깨어납시다.
어제 영국에 사는 선교사님의 편지를 미션매거진에 소개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전도를 해 보면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유대인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니고 영국 사람들인 것 같다고 합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척하고 오히려 가르치려 하는 이들은, 마치 기독교를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유행이 지난 종교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종교적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명심보감 경행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景行錄 曰(경행록 왈:경행록에 말하기를) 恩義 廣施(은의 광시:은의를 널리 베풀라) 人生河處不相逢(인생하처불상봉: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곳에서 만날지 모른다) 讐怨 莫結 路逢狹處면 難回避(수원 막결 노봉협처 난회피:원수를 맺지 말라 좁은 길에서 만나면 회피하기 어렵다)”
‘은혜와 의(義)를 널리 많이 베풀면 언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 반면 한번 원수가 되면 언젠가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된다.’ 는 뜻입니다.

조선 선조(宣祖) 때 홍순언(洪純彦)이란 중국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일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으려고 주막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술집 앞을 지나려다 이상한 글이 문에 씌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룻밤 술값이 일천냥임.” 이 값은 굉장히 비싼 금액입니다. 호기심이 일어 그 집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더니, 그 집에서 술을 따르는 아가씨의 아버지 장례를 모시기 위해서 일천냥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꽤 알려진 분이예요. 그런 아버님이 얼마 전 남의 모함을 받아서 그만 처형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시신(屍身)을 고향으로 모실 비용이 없어서…” 홍순언은 그 아가씨의 사정이 너무 딱하여 차고 있던 돈 전대를 풀어주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아가씨가 뒤쫓아 나와 성함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해 조선에서 온 홍역관이라고만 일러주었습니다. 귀국하여 공금을 축낸 죄로 홍순언은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홍순언은 명(明)나라에 응원군을 청하러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신 일행이 북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성안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 홍역관이 계시거든 저를 따라 오십시오.” 홍순언은 영문을 모른 채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어느 으리으리한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한 귀부인이 방으로 안내해 들어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십여 년 전 한 주막집에서 생긴 일을 잊으셨는지요?” 홍순언도 그제 서야 문득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대인께서 주신 돈으로 아버님을 고향 땅에 장사하였고, 그 후 아버님의 죄도 모함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지금은 석상서(石尙書)의 아내입지요.” 홍순언은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석상서는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인 석숭(石崇)이었다. “염려하지 마셔요. 제가 힘은 없으나 대감께서도 항상 홍대인의 의리를 감탄하고 계셨으니, 잘 되리라고 생각되어요.” 이렇게 되어 석숭의 도움으로 명나라에서는 즉시 이여송(李如松)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홍순언이 북경을 떠나는 날, 그 부인은 손수 수놓아 짠 비단 몇 상자를 실려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한 필 한 필마다 “보은(報恩)”이라는 무늬가 수 놓여 있었습니다. 홍순언은 명나라와의 외교(外交)를 잘한 공로로 통역관의 신분으로는 될 수 없는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되고 당릉부원군(唐綾府院君)에 봉해 졌는데, 당릉이란 ‘중국의 비단’ 이란 뜻입니다.

세상 사람도 이와 같이 베풀 줄도 알고 은혜를 값을 줄을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홍순언도 단순히 은혜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한없는 가치를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과 우리를 비교하십니다. 하루를 살아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들풀도 하나님이 돌보고 계십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하십니다. 사탄은 우리를 멸하려 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주앙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려고 하면은요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고 마음이 떠나기 시작하면은요 모든 것이 이상해 보이고 싫어집니다. 저에 대해서 자꾸만 좋아보입니다.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정상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싫어지게 하는 미움의 씨를 뿌리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자꾸만 보기 싫어지고 미워집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만 싫다가 나중에는 ‘시’자 들어가는 것이 다 싫어집니다.

대한민국인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이요 좋은 나라입니다. 제가 그래도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은이요 우리 대한민국만큼 좋은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입니다. 한마디로 차든지 뜨겁든지 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민족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데모 도 한번 했다하면 실감나게 하잖아요? 국회에서 다른 당이 회의 못하도록 몇 일 밤을 세우면서 단 점거하고 농성하다가도 그건 그거고 다음날 태국에 골프 치러 가잖아요. 평소에는 FIFA 순위 40위권에(현 42위, 일본 35위) 머물던 나라가 발에 땀났다하면 월드컵 4강에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평소에는 개고기든 뱀이든 다 먹어치우다가 미국 소 광우병 의심스러워 못 먹겠다고 700만이 뛰어나와 촛불 집회하는 나라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독일 교회는 기독교인중 5%만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영국은 10년 전의 통계에서 기독교인 중에 10%만 교회에 다닙니다. 지금은 더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추세라면 최근의 한 연구 보고서(영국성서공회)를 통해 영국의 교회 출석자 수는 2050년 경에는 전국 통 털어 8만 8천 명 수준으로 급감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 놓았습니다. 이는 사실상 영국 교회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표가 나오자 영국 교회는 물론 영국 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든 총리는 “아직도 영국인들의 믿음은 살아 있다.”며 이러한 예상보고서를 애써 불신하려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복음을 전달해 준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에 있는 교회를 방문 했었습니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어렵게 되어 내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얼마 전 팔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20%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장로교회가 매년 4만 명씩 감소하고 있답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파송 했던 교회가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자 지금 새문안 교회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은 기독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던 나라인데(일본의 기독교인은 전체인구 0.3%입니다.) 그래도 세계적인 신학자를 배출했었습니다. 이것은 학교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표적인 신학교인 동경신학대학교가 문부성으로부터 이번 2학기(2008년)에 학생이 한 명이라도 등록하지 않으면 학위를 주는 학교 명단에서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선교를 하는 나라들은 미국과 영국, 대한민국입니다. 영국은 이미 오래 전에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 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도처에 너무 많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빚진 것이 있어서 미국의 요청에 다 거절할 수 없어서 사회 복지 라든가 의료봉사 등으로 돕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이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피 흘림이 없었던 이 민족을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1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는 일본 방문 중 조선을 위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조선의 역사는 동방의 등불이 되어 주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지은 시이지만 대한민국인이 깨어날 때 동방을 넘어 세계의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북아일랜드 얼스터 대학의 리처드 린 교수와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타투 반하넨 교수의 공동 논문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인의 평균 IQ가 제일 높은 나라는 1위 홍콩 107, 2위 대한민국 106, 3위 북한, 일본 105, 4위 104로 타이완입니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가 102로 다음입니다. 미국 98로 9위입니다. 물론 한 국가가 성장하는데는 국민의 IQ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력이라든가 얼마나 합심하느냐 등 정치적인 이유 등도 작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뛰어나다는 데는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계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원하나 변변한 것 하나 없는 나라에서 지난해 12월 7일 무역수지가 4,000억(약 529조원)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64년 1억(1년) 달러로 시작했는데(1977년 100억 달러) 44년 만에 4,000억 달러를 돌파한 것입니다. 이는 한국보다 먼저 수출액 4000억 달러를 넘어선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등 10개국이 1000억 달러에서 4000억 달러에 이르는 데 걸린 기간(평균 17.2년)보다 4년 이상 단축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 남미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200만 달러가 많은 것이구요 전 아프리카 32개국가 보다 높은 것입니다. 자원하나 안나오는데 어떻게 가능하냐 포스코(포철)이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고철을 사다가 잘 제련해서 강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팝니다. 당시 박태준 사장은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모래 벌판에 전 사원을 집합시켜놓고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대일청구권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읍시다.” 이런 포철이 세계 2위의 제철소가 되었습니다. 일본 자동차 도요다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값싸고 품질 좋은 포철의 철을 사용하지 않다가 지금 어렵게 되자 앞으로 포철의 강재을 사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사 제너럴 모터스(GM)는 한국의 LG화학을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의 리튬-이온 전지 공급자로 선정했습니다. 세계의 차에 한국의 자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여러분! 힘을 내세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이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시 9: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저 인생일 따름입니다. 육신으로 나서 육신으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릅니다.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컵에 물이 담기기 전에는 그냥 컵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컵 안에 물질이 담기게 되면 그 컵은 컵의 가치, 플러스 그 안에 담긴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별것 없지만 내 안에 계신 분이 소중한 분이시니 나 또한 소중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만드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만들 때는 정해진 사람, 정해진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출 31:11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은 이제 통합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는 질문에는 한없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심과 또 하나는 무한히 돌보심으로 완전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굳건한 약속입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무한한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3-17)

예수께 미치세요.

노아가 미쳤습니다. 그 식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배를 산에다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쳤습니다. 아들하고 3일 길을 가더니 갑자기 아들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워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미쳤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타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 5장을 무척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가 아마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다가 미쳤다는 소리 듣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가끔씩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부모님들께 미쳤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미치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에는 미쳐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학문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애하는데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돈버는데 미쳐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사행성 오락으로 유명했던 바다이야기에 미쳐있던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아마 고래가 나오면 큰 것이 터진 것인가 본데 고래가 나오기 전에 상어가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땡긴 답니다.
고이주에타 전(前)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콜라에 미쳐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태국에 벧엘타이교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인데요 태국여자 어린아이인데 한 7살 되었나요. 교회에 하도 열심히 나오니까 부모님이 집에다 가두어 놓고 못 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가위를 가져다 자기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어린아이의 부모님이 손들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드리고요 어른예배 11시 참석하고 오후 3시 성경공부시간까지 하고 저녁에 어두캄캄할 때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에 미친 아이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딘가 미쳐있어야 된다면 예수께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우며 확실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차고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삽니다(13-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예수님, 예수님’ 소리만 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까? 궁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자기를 심문하는 왕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6:24). 그러자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반박했습니다(행 26:25). 그는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오직 하나님과 양떼들을 위해 헌신을 다했습니다(13).
나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렇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의무감이라든가, 동역자 들의 눈치 때문이라든가,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든가, 양에게 본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니 그는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이 push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push를 받으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push하시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게 됩니다.

아내가 추운 겨울밤에 갑자기 호떡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밥통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있다가 밥통을 다시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남편은 호떡이 추운 겨울에 식지는 않을까 해서 밥통을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확인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내 남편을 죽도록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아내를 강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피조물(16-21)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라고 했습니다. 죄 아래 머물러 사는 인생은 새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만일 도적질과 강도를 일 삼았던 한 죄수가 옥살이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도적질과 강도 짓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죄 아래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의 결박을 끊어 우리를 자유케 해 줍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낡아지고 쇠하여 지고 부패하거나 부식되거나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새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 새것을 사거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서 낡아지고 맙니다.
낡아지고 썩어지고 죽게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남으로 영적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몇 단계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이 깨어나면 하나님을 찾게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육신의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장은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뿐입니다. 물질도 건강도 명예도 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은 죽어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셨습니다(엡 2:1). 다시 죽지 마세요. 다시 죄의 구덩이에 들어가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 아래 있고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새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죄를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마음을 정하게 하며 정직한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 줍니다.

세계적인 물리 학자요, 수학자요 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날이 있었습니다. 1654년 그는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4일, 화요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 확신을 주시고, 환희의 감정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일체의 것이 망각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당신을 모르나 나는 당신을 아옵나이다. 환희, 환희, 환희,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날 말씀에 의해 주님을 영접한 후 매일 아침 5시면 기도하고, 많은 날을 금식하면서 성자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파스칼은 그 모든 책은 다 집어치우고 성경과 어거스틴의 참회록만 읽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형수술 하듯이 보이는 얼굴 몇 군데만 뜯어고쳐 놓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속 사람까지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럴싸하게 치장하고 잠시잠깐 위장하고 살다가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감춰두었던 옛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는 그런 삶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문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겉 사람인 육체의 조건만을 생각하고 대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나 상가를 보수하고 개축하여 새로운 건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도 리모델링 했습니다. 우리는 건물만 리모델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리모델링 해야 합니다. 죄를 지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작업입니다.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본문 17절에 새로워지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새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면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삼으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선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코의 극작가 카를 차펙은 “만일 개가 지껄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사귀기 어려운 것만큼 개와 사귀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차펙은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신, 아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