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4) – 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4. 좋은 사람(4) – 예배 ) / 본문 :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소중히 여기는 바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라이프찌히의 조그마한 토마스 교회라는 예배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습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했습니다. 그 곡이 출판된 일도 없고, 발표회 한 일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나 매일같이 성실하게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해 나갑니다.
결과로 265개의 오르간 곡과 263개 합창곡, 162개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유명해 졌어요. 그가 인정받게 될 때 그 옛날에 작곡해 놓은 것들이 전부 높은 값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유명해 져서 작곡한 게 아니에요. 오로지 성실했던 것입니다. 무명의 오르가니스트로 그저 성실, 성실, 진실, 이것이 마침내 바하를 만든 것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창호 선생님은 학벌이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의 이력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이력서에 거침없이 ‘중학 중퇴’, 그리고 특기는 ‘배 노 젓는 일과 청소하는 것’ 이것입니다. 특기를 ‘청소하는 것’이라고 써 놓고 담대하게, 정직하게 산 안창호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 중요성으로 말하면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도 예배입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원문의 proskunevw(프로스퀴네오) “고개를 숙이다 예배하다.”
이며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는 예배자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배하는 자들은”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옛날 독일어에서 Kuss(입맞추다)와 연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이교도에서 땅의 신들을 숭배하는 의미로 땅에 입을 맞추기 위해 엎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외부적인 몸짓을 거부했지만 내적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배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또 추수하는 장면들을 보면 꼿꼿이 서서 하지 않습니다. 늘 반쯤 고개를 숙인 자세이거나 반쯤 무릎을 꿇은 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자세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영적 거장이신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일 영광된 일입니다.

예배의 대상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 예배자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예배하는 자를 나타낼 뿐이지 그 대상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이교도들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한계시록 16:2, 19:20절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우상에게 예배(경배)하던 자들이 나옵니다. 중국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에게 절하면서도 “빠이빠이” 예배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서 먼저 이 예배의 대상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라는 자들은…”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면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하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님, 하느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식 표현으로 천주로도 사용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 은 마포삼열(마펫)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 게일 선교사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마포삼열은 105년 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했는데 1936년 일제에 의해서 쫓겨나 3년 뒤 별세한 선교사입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道)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했다.”
그는 미국 땅에서 죽으면서도 “나를 조선 땅에 묻어 주오.”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정말 한국을 사랑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선교사들에게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사람”이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초점입니다.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예배의 성격이 규정되는 일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예배이며 참된 예배입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대상은 결코 타협할 수 없고 양보될 수 없는 예배의 최고가치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20)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이 구절이 처음 나오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만 11번이 나옵니다. 3장(아담이 쫓겨나는 장면)에서 8번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직접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표준새번역성경과 2000년도에 번역된 가톨릭 성경인 새성경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모두 “주” 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라는 단어는 아브라함 때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 18:26)
그리고 다시 이 단어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 때입니다. 출애굽기 4장(바로와의 싸움)에서는 무려 14번이 나옵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하나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출 3:18)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이런 표현이 출 8:8, 27 등에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를 [개역개정]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것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제일 큰 방해는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즘 교회 예배는 기획된 한 편의 인기 드라마처럼 진행되어야 즐거움과 감동을 받습니다. 편안함과 안락한 시설 속에서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한 편의 예배가 연출될 때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참여한 관객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을 위하여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저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연극을 보러 찾아온 관객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찾으시는 것처럼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라고 표현했습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 일회성이 아닙니다. 반복되고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라고 하십니다. “척량하되” metrevw(메트레오)는 재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은 여러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큰 교회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거룩하게 찬양하고 훌륭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 그런 곳에서 적당히 예배를 드리고도 마치 내 자신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예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재어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이와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며 예배하는 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는 “ejn pneuvmati kai; ajlhqeiva/ dei’ proskunei’n.”(엔 퓨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퀴네온)입니다.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입니다. 이것은 …안에서입니다. 앞의 문장을 다 연결하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라는 뜻이 됩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dei’(데이)라는 동사인데 진리(알레데이아)와 예배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뜻은 “반드시…해야 한다, 마주치다, 틀림없다.”입니다. 데이는 ‘묶다, 동이다’의 동사 devw(데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다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엔) 반드시(데이) 예배할지니라”가 됩니다.

찬송가에 보면 “제목, 목차”보다도 먼저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목 분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배, 성부, 성자, 성령, 구원, 천국 등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자로 부름 받은 자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자유를 위해서 그들은 생명을 걸고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4개월의 항해 끝에 혹독한 겨울인 1620년 12월 11일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추운 벌판에서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위와 역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이듬해 가을까지 46명이 괴혈병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1621년 가을 추수를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였습니다. 눈물의 예배, 감격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광야를 정복한 영적 거인」이라는 책을 쓰신 마크 애터베리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여성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나는 그녀의 삶이 거의 다해 가던 어느 날에 그녀가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 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단상에서 전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행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두 설교 중에 그녀의 것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관객은 자기가 보기 좋은 공연만 찾아다니지만 예배자는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인 교회에 출석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쳐 변화시켜 가는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3. 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 / 본문 : 눅 19:47-48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미얀마의 전설에 어떤 토기장이가 한 세탁소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세탁소 주인이 사업을 못하게 하려고 황제를 설득하여 왕실의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황제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그릇이 필요하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토기장이에게 그 그릇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황급히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 세탁소 주인에게 배달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릇은 곧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계속 다른 그릇을 만들었지만 코끼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을 망치려고 한 그 계략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된 것은 토기장이 자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기심이 별로 해롭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에 덮여 보이지 않는 불씨 같아서 끝내 큰불을 일으키고 자신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요즘 누군가를 향한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좋은 사람이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스스로 올라가셔서 7일간의 일정을 보내십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곳은 예루살렘성전이었습니다. 45-46절에 보면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바꿔주는 사람, 제사에 필요한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 언급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직접 운영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협조와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다.”고 책망 하셨습니다. 책망만 하시고 마치신 것이 아니라 본문에 보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일반적인 상황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금 한가하게 사람들 가르치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한참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의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의 사람입니다. 서기관은 성전의 서기로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는 율법에 관한 한 최고의 지식층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된 백성의 두목들은 산헤드린의 70인 장로회의로 당시 이스라엘의 임시정부와 같은 기관이며 최고의 입법기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군중을 빼 놓고는 당시의 모든 권력층과 지식층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르치시는 일에 몰두하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의 기간을 가르치시는 사역에 몰두하셨습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결에 따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세상의 조류에 따라 떠내려가는 자들이 아니라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무려 14장에 걸쳐 길게 소개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형들에게 하여 형들의 미움 받아, 형들은 구덩이에 넣어 죽이려고 했지만 르우벤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장사꾼들에게 팔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집승 들이 찢어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에게 그가 입고 있던 옷을 가져다 줍니다. 아버지 야곱은 옷을 찢으며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창37:34). 요셉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관계없이 종으로 팔려갑니다. 종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요. 종은 자신의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이런 개 같은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자기의 입장을 비관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가 박탈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배신 당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인 것입니다. 상단에 끼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의 처지를 생각해 보세요. 기막힌 것 아닙니까? 자기가 원하던 일도, 가고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팔려 가는 종일 뿐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 팔려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만 요셉에게 눈길을 보냅니다. 그리고 같이 자자고 보챕니다. 얼마니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는지 창 39:10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굴뚝에서 연기날 일은 하지도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불의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악에게 기회를 제공할 빌미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웁니다. 강제로 겁간코자 했다고 하며 요셉의 옷을 강제로 찢고 소리를 지릅니다(창39:14). 이 일로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에게 또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누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바로의 신하 두 사람이 갇혀있을 때 그들의 꿈을 해석하여 그가 바로에게 돌아갔을 때 바로가 꿈을 꾼 것을 해몽하기 위해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요셉의 그의 형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에 하는 말입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꽁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이 처한 환경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형들이 팔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룟유다에 의해서 요셉이 팔렸던 것처럼 은 30에 팔리지만 지금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에는 예수님이 팔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원문은 “ejxekrevmato(에크레마토) aujtou’(아우투) ajkouvwn(아쿠온)”입니다.
“ejxekrevmato(에크레마토)”는 말하는 자의 입술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kremavnnumi(크레만뉘미)” 매달리다의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는 것입니다. “ajkouvwn(아쿠온) 들으므로”는 성경에서 13번 나오는데 복음서에만 9번나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4번은 나오는데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와 나머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나옵니다.
(마 13:20, 22, 23)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ajkouvwn(아쿠온)”은 그냥 ‘말씀’ 하고는 다릅니다. 이 것은 이미 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들은 상태를 말합니다. 못 들었다고 할 수 없는, 부정이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직접 들은 이 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의 씨가 분명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키우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빛이 지어지고 천지가 지어지기 전의 그 모습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석 가들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카오스의 세계’ 즉,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우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오스, 즉 무질서에서 우주가 지어졌는데 이 무질서를 수습하는 첫 번째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빛을 지었습니다. 이 빛이 드러나자 무질서가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의 이 빛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첫째,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밝음입니다. 우주에 흑암이 물러가고 밝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잘 연상해 보면 마치 연극의 막이 열리는 한 장면과도 같은데 여기에 교육의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후진국인 나라들에 가서 선교사님들하고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 땅에 미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사람의 문제요, 교육입니다.
태국에 가면 방콕 신공항이 1년 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규모로 보면 인천공항보다 두 배 이상이 크답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와서 공항 직원들이 연수도 받았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새로 만든 공항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옛날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는 인천공항의 시스템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공항도 최신 시설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전문가들이 분석을 했습니다. 결과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처리를 못하는 겁니다. 환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육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거두는 일입니다. 가르침의 사역이 없으면 혼돈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없으면 무질서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물질을 모으는 증권 잘 사는 방법과 잘 파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세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성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육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악랄한 북한의 공산정권이 왜 무너지지 않고 있느냐? 그 중에 하나가 강력한 교육입니다. 소위 말하는 당원교육입니다, 아주 철저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5호 담당 비서관을 둡니다. 다섯 가구씩 묶어서 가르치는 비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구를 한 주간에 세 번씩 모아서 공산당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다 점검합니다. 이런 점 조직 교육과 철저한 수직적 당원교육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죽은 지가 14년이 되었지만 김일성 어록이나 주체사상이 그대로 학습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그대로 국민들 앞에 신으로 등장합니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교육이 북한 땅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제일 오락가락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육문제입니다. 어쩌면 교육제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교육을 해도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자기 도그마에 도취되는 사람들을 많이 키웠다는 것입니다. ‘도그마’ 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현 정부(노무현)가 들어서고 많이 들었던 말이 ‘코드’ 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도그마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공산체제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많이 했는데 사람을 키워놓고 보니까 도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코드는 영어로 보면 전기코드가 아닙니다. 이념, 체제, 체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주 쓸모 없는 사람으로 형성되어버린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도그마에 취해 버린 사람, 제 잘났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자기 교회식 도취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ejxekrevmato(에크레마토)” 예수님의 입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육은 성장과정에서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끼쳐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녀가 집을 나설 때 한국의 부모들은 “얘야, 누구한테도 지면 안 돼, 또는 때리고는 와도 매맞고 들어오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반면 일본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 없는 하나님은 있어도 하나님 없는 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배운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결정하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2) – 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2. 좋은 사람(2) – 의 ) / 본문 :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기독교는 신비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있습니다. 신비적인 면은 매우 만족스럽고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 반면 실천적인 것은 힘들고 어렵고 희생적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실천적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라는
기독교의 핵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비적인 면만 추구하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교리를 많이 아는 자들에 의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고 적은 진리이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로만 사랑을 외치고, 말로만 구원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1780년 5월 뉴잉글랜드에서 이유를 알 수 없이 하늘이 어두워지는 돌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세상사를 다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선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커네티컷 주의 의회가 개회 중이었습니다. 의회가 한참 중반전에 들어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회의를 연기하자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의원 중 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일어나 발언했습니다. “의장, 오늘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할게 아닙니다. 만일 심
판의 날이 아니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만일 심판의 날이라고 해도 우리의 의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촛불을 켜고 회의를 진행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닥쳐도 등불을 준비하고 켜놓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저에게 많은 공부를 시키거나 뭘 많이 해 준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님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다리를 절으시는 분인데 절뚝거리면서 강원도로 옷 장사를 다니시면서 저를 키워 주셨습니다. 저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아버님 얼굴을 봅니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 강원도 어느 장터에서 옷을 파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는 저희 아버님이 암 말기 환자 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편히 쉬셔야 할 그 때에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돌아와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많은 왕들이 처음과 나중이 다른 것을 봅니다. 솔로몬도 처음에는 1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우상 숭배와 세상 향락으로 타락했습니다. 열왕기하 9, 10장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10대왕 예후가 나옵니다. 예후는 아합왕과 이세벨이 만들어 놓은 바알 우상들을 타파했습니다. 그 때 그의 열심은 친구인 여호나답에게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10:16)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왕하 10:31 에서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좋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수많은 고백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기도한 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매달을 딴 이원희 유도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한판 승의 사나이입니다.” 종료 9초를 남겨놓고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냥 시간만 끌면 이기는 것인데 9초를 남겨놓고 한판 승으로 이겼습니다. 순식간에 넘어뜨리기 때문에 상대편이 왜 졌는지 모른답니다. 이원희 선수에게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9초를 남겨놓고 위험하게 한판 승을 걸었냐고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말하기를 “심판이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끝났다고 선언할 때까지는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3천 동안 3,300건의 전쟁이 있었답니다. 이 땅에서는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선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선하게 산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하면서 격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의 기준이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잘 해 주면 좋고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해야 합니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6-17) 하신 것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조금 잘해주는 사람이 좋고,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우상 숭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행위로 제일 악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십니다.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 2:19-20)
그러면서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말씀을 계속 하시는데 이런 표현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람은 엎드러지면 일어나고, 길을 떠나갔으면 돌아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지 않는다(렘8:4)는 것입니다. 그리고 렘4:7에서는 철새들로 말씀하시는데 새들도 자기들이 이동할 시기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가리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텔레비전이 설치되었습니다. 몇 주일 동안 마을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밤낮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두 달만에 텔레비전 불이 꺼졌고,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았습니다. 나그네가 그 마을에 들렀다가 추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거요?”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이제부터 마을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소.”
“하지만 텔레비전이 더 많은 이야기를 알지 않던가요?”
“그건 그렇소.” 추장이 대꾸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이야기꾼은 우리를 알고 있거든요.”

다윗은 사무엘하 8:15에서 “내가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고 그래서 사무엘상 24:11에서도 다윗은 사울에게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떳떳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며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는 결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의를 행하는 자는 환란과 핍박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이겨 나갑니다. 시 119:121절에 보면 “나를 압박하는 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하였고 또 122절에서도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옵소서”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환란이 닥쳐오면 넘어지고 좌절하여 쓰러지고 말았지만 은혜를 받으니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 할찌라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공의를 행하였으니, 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오니” 이 시련을 물리쳐 줄 것을 믿고 기도로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물질로 인한 고통, 건강으로 인한 고통, 사업으로 인한 시련,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로 인한 시련 그리고 자녀들의 문제로 인한 고통 거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하는 또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믿는 자가 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은혜 받고 의를 행하는 성도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은 이 시간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119:123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피곤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피곤할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7절에도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그래서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덩어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한 여인이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 사람을 보고 정원사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바로 슈바이쳐 박사였습니다. 그는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유대의 한 동네에 무조건 큰 소리를 지르는 빵 가게 주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기도도 큰 소리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워내는 빵의 크기는 아주 작아 사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그러던 어 날 랍비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은 날 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랍비는 “당신의 목소리는 줄이고 빵의 크기를 늘리십시오.” 하였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리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시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다른 사람까지 생각할 일이 없겠지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네 코가 석자인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 자신의 일이 크고 중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일이 없어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마지막으로 기억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했으며, 로마서 3장 21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면 이것이 축복입니다. 또한 천국을 약속 받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1. 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 본문 : 마 6:14-15, 참고 창27장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쳐다봅시다. 어때요. 좋은 사람 같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복중의 복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복을 받아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늘 기도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성장하고 교인이 많이 모이고 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나 우리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되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혼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냥 커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어느 성도가 전도했다고 자랑합니다. “목사님, 이번 전도운동 때 대어를 한 마리 낚았습니다.” 그럽니다. 목사님이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에쿠스 타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면 소형차 타는 사람은 피라미입니까? 사람은 보이는 것이 가치기준이 아닙니다.

인도의 힌두교 같은 종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팔자가 정해져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경우처럼 보이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지만 그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부인인 리브가가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받도록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서는 사냥터에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 드렸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습니다. 이미 야곱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여 나도 축복해 주세요. 나도 축복해 주세요.” 하면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같은 자식을 차별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서가 잘못되었다면 이것은 어머니인 리브가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일 아버지를 속이다가 들통이 나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했습니다(창27:12). 그랬더니 리브가는 말하기를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 오라”(창27:13)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모두 나 자신이 야곱과 같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자기가 늘 주인공인줄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최악의 인물로 꼽을 수 있는 가룟유다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가룟유다와 같은 인물은 팔자가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면 기독교 역시 정해진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이들이 비록 악역을 맡기는 했지만 분명히 에서를 통해서 야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들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한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야곱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따라서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여러분은 리브가와 야곱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축복만을 바라면 부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에서의 단점과 부족함이 많았다고 인정합시다. 저는 한 어머니의 편견적인 사랑이 낳은 불행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먼저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을 것을 알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창27:33). 여러분! 이삭의 생각이 틀리고 리브가의 생각만 옳았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야곱의 좋은 점은 본받을만한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언제나 형님의 것을 빼앗으라고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토록 정의를 외쳐온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4-5)

이제 축복을 빼앗긴 에서를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아버지 장례식만 마치게되면 아우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창27:41). 리브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란에 있는 자기 오빠의 집으로 야곱을 피신시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냥 넘기게 되었던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27장 40절입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40 -한글개역)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다시 원문으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너는 칼을 의지하여 살고 네 동생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면 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7:40 -이영제목사 역) 에서에게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전히 에서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서가 야곱과 같은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에서와 같이 “억울하게 되었는데 정말 몸부림 쳐서 그 멍에를 벗었던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있습니다.”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욥입니다. 욥은 창세기 때의 인물입니다. 욥기서는 시대적으로 아브라함 세대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고 그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 이전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고난을 을 겪은 후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200년은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나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점차적으로 줄어드는데 바로 아브라함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에서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욥기의 목적은 진정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하는 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욥은 좋은 사람(의인)임에도 고통을 당했고, 극심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아내와 그의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에서에게 내린 말씀처럼 그 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에서도 듣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에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33장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용서하고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것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에서에게도 하나님은 많은 축북을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만나러온 에서는 먼저 4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앞서서 보냈습니다(창 33:1). 이 사람들을 마을에서 사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에서의 종들일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양과 가축들 많은 선물을 주려고 할 때 에서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내게도 쓰고 남을 만큼 많은 물질이 있다고 합니다(창 33:9) 그리고 에서에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창 27:40) 했는데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7번 절하고 부를 때 늘 “내 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서 또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럽을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더니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조용히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사람은 남에게 명령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궂은일을 대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신약의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닌 제자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나갔을 때도 유다도 갔습니다. 그런 유다를 끝까지 지켜야되는 것 또한 예수님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온 유다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끝까지 친구로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팔 자로 의심을 받은 것은 가룟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는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은 완벽한 부인입니다. 그러나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사실 운 것으로 보면 가룟유다도 후회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메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 또한 에서에게 내렸던 말씀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그 멍에를 벗기 위해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울이었던 바울 또한 예수믿던 사람들을 잡아가던 사람입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이 죽을 때 함께 있던 자입니다.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이 사울 같은 사람들 때문에 스데반이 죽었고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끝까지 추적하여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나이다.”(렘3:22)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모든 것이 세 번 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에 있어서도 세 번 하면 많이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무리 많이 용서해 주어도 한 4-5번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한마디로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을 끝까지 용서해 주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음을 넓게 써야 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해 주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이 최악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최악은 아니다.”(셰익스피어)

신문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며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안 아버지가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아들을 불러 훈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훈계가 사랑의 훈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만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방탕한 자식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정신 없이 돌아다녔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뉘우침의 표시로 삭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참으로 그 아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면서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이발소에 가서 삭발을 하고 아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며 아버지 품에 안겨 통곡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의 품안에 거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나 자신이 용서했을 때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내게 대해서 용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먼저는 나 자신이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은 또 한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용서란 한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 중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내가 왜 예수를 좋아하는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0. 내가 왜 예수를 좋아하는가?) / 본문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혹 제 머리에 이상이 있나해서 월요일에 MRI을 찍어보았습니다. 오전에 의사선생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고 오후에 MRI을 찍고 다시 검사결과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그동안 약 먹어보시니까 어떠세요?” 그러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의사 선생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환자를 착각한 겁니다. 오전에 본 저를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MRI 찍어볼 사람은 내가 아니구 의사 선생님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못온 것 아닌가 하면서 제 뇌 사진을 가지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계속 설명을 합니다. 침에는 나이가 들면서 뇌가 작아지게 되는데 뇌 주의가 전체적으로 작아지면서 오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어든 뇌 주의의 모양은 MRI로 하얏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뇌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뇌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구나 말입니다. 여러분! 머리 좋아서 뇌가 크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곳에 쓰레기 같은 정보만 잔득 모아 놓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작지만 알차게 그리고 꼭 필요한 정보를 담아 둔다면 IQ, 머리가 좀 나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굴 양식장을 경영한 이영권(67)씨는 서해안(허베이 스피리트호) 원유 유출사고 피해로 생계 터전을 잃은 것을 비관해 자살했습니다(2008.1.17). 사람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으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저는 자살 충동을 강하게 두 번 느꼈습니다. 한번은 예수 믿기 전의 중학교 때이고, 또 한번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 크게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을 때 였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 저의 집은 못살았고 저는 장난꾸러기이기 때문에 늘 팔이 빠져있는 상태로 지냈습니다. 심지어 학교보다 병원을 더 많이 갔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공부 또한 뒤에서 맴돌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마음에 맞지 않는 선생님들 때문에 늘 싸우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품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수즙음을 잘 타기 때문에 누구 앞에 그렇게 나서는 성격이 못됩니다. 그 중에서도 영어선생님하고 제일 마음에 안 맞았습니다. 시골에서 영어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저에게 어떤 단어를 따라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 나름대로 그 발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어 선생님은 까르르 웃더니 출석부로 제 머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출석부를 손으로 탁 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제 머리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 머리에 이상이 있다면 그 때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시골의 머리 나쁜 가난한 학생이라고 그렇게 마구 취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존심 강한 저희 어머님께 학교에서 정학이라는 통지서를 보낸 것입니다. 어머님의 꾸중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도 저에게 꾸중을 치시지 않았던 아버님께서 밖에서 낮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방구석에 있는 제 목에 갖다 대시는 것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도망다니고 했는데 이제 그럴 마음도 없어졌다 봅니다.
억지로 간 학교에서는 정학이라고 저를 그 추운 겨울에 큰 체육관에 혼자 가두어 놓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학교생활을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예쁘고 착한 선생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제 세상을 그만 살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선생님이 계십니다만 모범생과 공부 잘하는 학생을 잘 해주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아라고 생각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와는 반대로 선생님을 잘 만난 사람도 많습니다.
루스티 베르쿠스는 어린 시절 학습 지진아로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난독증’ 이라고 불리는 시신경 장애가 있었습니다. 난독증에 걸린 아이들은 종종 단어들을 빨리 습득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단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단어는 잘 기억하지만 문장을 만들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나 부모님은 아이의 학습 능력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단어들이 글자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글자가 단어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난독증 환자는 단어를 하나의 형태로 파악할 뿐, 낱개의 글자들이 합쳐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난독증 환자는 글자를 뒤집어서 쓰거나 거꾸로 쓰곤 합니다.
이렇게 적응을 못하자 1학년 담임 선생은 학습 지진아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여교사였던 그 담임 선생은 자신의 판단을 생활기록부에 적어 2학년 담임에게 넘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 교시 수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2학년 담임 선생은 나에 대한 결정적인 편견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수학문제와 부딪혔고 그 결과 차츰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있게 말을 하지도 못하고, 쉬운 숫자 계산도 하지 못할 뿐더러, 글자까지도 엉터리로 나열하니까 한 마디로 나는 완전히 구제 불능인 아이였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담임 선생의 눈에 띄지 않는 맨 뒷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라도 지목을 받으면 우물거리면서 “저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5학년에 올라갈 무렵 나는 이미 지능적인 면에서 거의 죽은 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신께서 내게 위대한 여교사 하디 선생님을 보내 주셨다.
하디 선생님은 걸어서 로키산맥을 횡단한 경력이 있는, 가장 뛰어난 초등학교 교사로 미국 서부 지역에선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불가사의한 여성이 내 앞에 큰 탑처럼 우뚝 서더니 양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인 학습 지진아가 아녜요. 이 아인 다만 보통 아이들과 좀 다를 뿐이죠.”
학습 지진아라는 말에 비하면 보통 아이들과 좀 다를 뿐이라는 말은 얼마나 희망적으로 들리는가! 하디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난 네가 생각을 표현하는 걸 주저하고 겁 먹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고 난 믿는다. 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이 방법이 성공할지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데모스테네스(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라는 사람에게 큰 효과를 가져다 준 방법이 있다. ‘데모스테네스’ 라고 발음해 볼 수 있겠니?.”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할 수 있을 거다. 데모스테네스는 혀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병에 걸렸었지. 그래서 그는 혀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입안에 돌멩이를 물고 다녔다. 마침내 그는 최고의 웅변가가 될 수 있었어. 내가 여기 구슬 몇 개를 가져왔다. 이 구슬은 커서 네가 목구멍 너머로 삼킬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깨끗이 씻어 왔다. 이제부터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넌 먼저 구슬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하거라.”
하디 선생님이 내게 보여 준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해심에 자극을 받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내 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자유롭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나는 6학년에 올라갔다. 너무도 기쁘게, 하디 선생님이 또다시 6학년 담임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지도 아래 만 2년을 보내는 벅찬 기회를 가졌다.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나는 하디 선생님과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선생님이 말기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명밖에 없는 당신의 특별한 제자와 1천 마일이나 떨어져서 병상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외로우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당장에 비행기표를 사 들고 그 먼 거리를 달려갔다.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나를 나는 곧 깨달아야 했다.
대충 세어 봐도 7백 명 정도가 넘는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들이 병실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 동안 계속해서 선생님과 소식을 주고받고,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말동무가 되어 주려고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사람들이 그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이들 7백 여명은 흥미로울 만치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미국 상원 의원 3명, 주 의회 의원 12명, 그리고 기업체와 회사 간부 및 대표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더욱 흥미 있는 사실은 우리들 중 4분의 3이 5학년 때까지 수업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학습 지진아나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운명에 맡겨진 아이로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디 선생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능력이 있고, 중요한 인간이며, 만일 우리 자신이 노력한다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H. 스티븐 글렌)

저에게는 이런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가 우두커니 서 있는 성당 앞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느 마음씨 좋은 수녀님이 나를 좀 데려가 주질 바래서 일겁니다. 그러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멍청하게 생긴 나를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주일날 저 쪽 산 능선에서 땡그렁 땡그렁, 교회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당장에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가 마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나왔습니다. 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완전한 도피입니다. 학교에서 도피입니다. 집에서 도피입니다. 세상에서의 도피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갈곳이 없었습니다. 저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2. 나를 알아 주셨습니다.

그 날 생전 처음으로 교회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이, 세상이 아닌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제를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알지도 못한 분이 나를 사랑했다니…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영재는 영제인가 봅니다. 이 사실을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깨달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유명하게 되니까 반기분 유엔총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초, 중고등학교 때 학적부를 떼어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모범생에 아주 공부를 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것은 떼어 보나마나 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또 평가하려고 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그럴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유엔사무총장은 반기문씨가 하고 대통령은 이명박씨가 하고 저는 목사 일에만 열중하면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주님이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코흘리개에 공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상태에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고 하셨습니다.

3.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기드온에서 나온 신약성경 작은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잃는데 왜 그렇게 아기는 많이 나않는지 끝이 안 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너무 어렵고 모르는 게 많은데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고 해서 그 때 공부할 때 전과같이 좀 쉽게 설명이 되는 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주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석 책을 사러 제가 살던 경기도 마석에서 청량리로 나왔습니다. 서점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당시 플핏 주석이 씨리즈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아직 다 나오지 않고 구약 일부만 나와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사면 성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30만원이 넘게드는 겁니다. 이 책을 사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고 싶은 것은 사고야 마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공휴일에는 812m의 천마산에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올라가 얼음 과자를 팔았습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학교를 마친 후에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빵을 떼어다 팔았습니다. 그 철없고 순진한 학생이, 죽기나 생각하던 그 아이가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1년 가까이 돈을 모아 플핏 주석을 샀습니다. 70권이 넘는 엄청난 량의 책입니다. 이 책을 사 가지고 집에 가니까 제일먼저 놀란 분은 어머님입니다. 공부하고는 담쌓고 지내는 아이가 무슨 책인지 모르시지만 엄청난 책을 사 가지고 오니까 놀라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건 안되건 잃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성경의 맥을 잡아라”란 책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정말 맥이 있을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책 한 권 읽는다고 맥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금광을 캐는 사람들이 길 가다가 우연히 맥을 캐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 맥을 찾을 때, 찾아지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여러분들이 이영제 목사을 믿을 때 “학교 공부는 꽝 이지만 성경에 관한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 않다” 하는 것만은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4. 이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이 고민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 고민이 없다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후회 없는 구원에 이르는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알란 레드파스 목사는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절규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절규는 기쁨의 절규의 축복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하나님이 “강하게” 하라고 하셨던 것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라” 일을 시작할 때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겁을 먹은 사람에게 한 것입니다.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하신 것은 일을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고작 여러분들에게 다시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너무 잘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방법에 얽매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꺽으시고 빈 그릇이 되게 하셔야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낮고 낮아져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격려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내 딛을 수 없고, 주님 뜻 안에서 일할 수도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은 적자생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은 우리의 힘 가운데서 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무기력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쓸모 없는 것들을 쓸모 있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일상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불평하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새해에는…(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9. 새해에는…(복음서를 중심으로)) / 본문 : 막 9: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ajlla;(알라)”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새해에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반드시, 꼭”으로 번역할 수 있는 “ajlla;(알라)” 에 대해서 지난주에 설교했는데 벌써 작년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마태복음서에 나온 것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복음서에 나오는 것을 좀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단어가 “알라”입니다. “알라”에 대해서 들으시면서 “알지”못하면 안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며 변화하신 것입니다. 이 광경이 너무 황홀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짓겠다고 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약의 선진들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온갖 것하고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08년도에는 오직 예수만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만 보셨습니다.

“알라”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거의 이 단어를 포함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자주 쓰는 말이나 어법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포함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ajlla;(알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ajlla;(알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ajlla;(알라)”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ajlla;(알라)”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는 독일 사람으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뮬러 목사는 평소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뮬러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뮬러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뮬러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총무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고아를 돌보는 사명을 주셨으니 길도 열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 고아원을 세우는 길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2.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ajlla;(알라)”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없이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내가 너를 산 에 데려가 크게 혼내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 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이 놈아 쉬기는 뭘 쉬어.” 아들은 계속 쉬어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 네요.”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크게 혼날 건데 좋긴 뭐가 좋아.” “아빠랑 등산하는 것이 처음이 예요. 혼나러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좋을 수 없네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들과 등산 한번 간 적 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과 산을 내려 왔습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오늘은 전 가족이 찬송가 456장을 불러보세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제가 오늘 주일이 되어서 설교만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또 무엇을 준비했겠습니까? 어린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은이를 위해서 “목사님은 복어다!” “목사님은 갈치다”하는 것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말이 안통해도 아이들과 노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 가도 자신 있습니다.

3. 주님은 우리를 꼭 지켜주십니다.

” “ajlla;(알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 “ajlla;(알라)”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7)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낯선 사람 둘이 서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60대쯤 돼 보이는 할머니, 또 한 사람은 40대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나누러 왔습니다.” 그럽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데요.” “교회에 다니시는군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시나요?” 그럽니다. 그냥 ”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하면 되지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 하면 어떤 신이 대답할지 모릅니다. 꼭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나요?” 그랬더니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안 불렀는데도 알아들으시잖아요.” 그러자 그들의 그냥 가버렸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요 10:14-1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는 우리의 음성을 듣고 알며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ajlla;(알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ajlla;(알라)”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미국 어느 지방의 산 속에 한 가족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힘이 세고 용감한 사람이었으나 어린 아들은 몸도 약하고 겁도 많았습니다. 아들이 7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가려면 깊은 숲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매일 아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까지만 너와 함께 갔다 오겠다. 내일부터는 혼자 다니거라” 아들은 울며 아빠, 무서워서 싫어요.” “아무리 울어도 안 돼”
아들은 할 수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그러기를 이틀, 아이가 학교에서 오다가 숲에서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아이는 도망도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이가 눈을 떠보니 자기를 덮치려던 곰이 쓰러져 있고 총을 든 아버지가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일으키며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아들아, 아버지는 항상 네 곁에 있었단다.”
“미국은 지금 국방의 힘, 경제의 힘, 과학의 힘이 사상 최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없으면 모두 헛것일 뿐입니다”
닉슨 대통령 당시 레너드 국방장관이 조찬기도회 때 한 말입니다.

4. 반드시 믿음을 가지십시오.

” “ajlla;(알라)” 그러나(카이)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마르다의 고백)”(요 11:2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ajlla;(알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앞에 버티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과 낙심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 슬픔 또는 경제적인 궁핍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산들은 대부분 높고 험준하여 산들을 가로지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산들을 옮기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산들을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ajlla;(알라)”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ajlla;(알라)” 옮겼느니라”(요 5:24)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선배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선배 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 대로만 복종하면 돼. 네 앞에 할 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있다가 이 머리 좋은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 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ajlla;(알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이것만은…(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128. 이것만은…(마태복음을 중심으로)) / 본문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

성경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도장처럼 사용된 단어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멘”은 한글로 주로 “진실”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만:알라”또한 아멘과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그만큼 이 단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만”은 원문의 ajlla;(알라)입니다. 이 단어는 a[llo”(알로스) “다른”이라는 뜻의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른 것들, 그러나”로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한 접속사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오직, 다만, 유일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오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414번나옵니다. 한글로 “오직”이나 “다만”으로 번역된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어로 번역되거나 아니면 빠진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전체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것은 무리이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 정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단어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제목대로 “이것만은, 반드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7년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지나면 2008년이 됩니다. 한해에 꼭 해야될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만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도 꼭 해야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ajlla;(알라)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8)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란한 가운데만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출애굽사건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조용하면 마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조용한 중에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시끄럽게만 하는 사람의 문제는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 “그러면”이 알라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는데 절대 화려함만을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ajlla:알라)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예수님께서 꼭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12의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는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한 상태에서만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망을 쌓아놓으면 가슴만 아픕니다. 나쁜 일은 빨리 잃어버리시고 좋은 일을 많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ajlla:알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했습니다. 단순히 용서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3. 완전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ajlla:알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아니요 (ajlla:알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는 ajlla; plhrw’sai(알라 플레로사이)로 반드시 완전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완전케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5에서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루려 함이니라” 이 단어가 마 5:17에서 “완전케 함이로다”의 원문 plhrw’sai(플레로사이)로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서 9:26-28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어떤 사람이 치과에 가서 이 하나를 빼는데 치료비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의사가 2만원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뽑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는데 왜 그렇게 비싸죠?”
그러자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환자 분이 원하시면 아주 천천히 뽑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랬답니다. 예수께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값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값이 있되 하나님이 계산을 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5.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ajlla:알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원문의 “알라”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가 들어갈 곳은 “… 버리게 됨이라 (ajlla:알라) 새 포도주는 새…”여기에 들어가야 됩니다. 같은 본문인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고 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새 부대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담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오르간을 갖고 있는 것이 대체로 전자식입니다. 그것은 컴퓨터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그대로 내는 것 같지만은 실제로는 오리지날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큰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첫째 조건이 온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름, 겨울 관계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려면 오르간의 값보다 유지비가 훨씬 더 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했더니 귀한 것이기 때문에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라는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Le musee du Louvre)에 가면 모나리자, 비너스가 있는데 이것은 세계가 사랑하는 값진 보화들입니다. 얼마나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만지고 훼손하려고 하기 때문에 특별한 BOX에 넣어, 온도유지, 보관, 경비도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죄와 마귀의 자녀 노릇하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4.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원문에 “ajlla:알라”가 있어서 번역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행 1:8절처럼 처음에 넣든 가 아니면 “곧”을 “오직”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복음을 전할 때 ” (ajlla:알라)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9)라고 했는데 여기도 “오직”이 들어갑니다. 온전히 성령님만 의지하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ajlla:알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ta; tou’ qeou’ ajlla;”로 나옵니다. “네가 (ajlla:알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에 넣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ajlla:알라)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우리가 평상시에 늘 하나님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선택해야만 하는 길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가구점에 존이라고 하는 청년이 취직을 했습니다. 주인은 술집에도 잘 다니고, 나이트클럽에도 잘 다니는 아주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존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교회만 다니고 이렇게 사니까 그를 불러서 “남자란 술도 먹도, 춤도 추고, 그렇게 세상을 즐기며 살아야 하는 거라”고 설득합니다. 주인님, 저는 교회에 나가기 때문에 술 먹으면 안됩니다. 그런 데에 가면 안됩니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남자가 그렇게 종생원 처럼 그러는데 아니야, 남자가 남자다워야 되는 거야. 술도 마시고, 사람도 사귀어야 되는 거야. 그래야 사업도 잘 되는 거야.” 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것 먹어서 안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주인은 병이 들었어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주인은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부인이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하면 은혜를 주실 거예요. 주인이 말합니다. 목사님을 찾지 말고, 우리 집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느냐고 합니다. 존을 부르세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사람도 인정하고 하나님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ajlla:알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왜 막 삶니까? 왜 교회를 핍박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7. 임마누엘의 예수) / 본문 :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오늘은 크리스마스주일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미사(예배)’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스도께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날로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선물을 기다리고 어른들은 휴일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예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하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시면,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경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찾아갔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경배는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정성을 다한 경배였습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아주 값비싼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마 2:11).

성탄절은 과거의 사건을 단지 기념하며 축하하자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을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는 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도, 그리고 동방박사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어도, 헤롯왕은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싫어했습니다. 헤롯 왕궁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탄생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경배하는 영적 사건이 이번 성탄절에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본문 18절에 보시면,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 정혼(일종의 약혼)하고 동거하기도 전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이 일 때문에 고민했을 것입니다. 나와 약혼한 처녀가 임신했다는 것은 남자서는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율법대로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정리하고 분노의 감정을 가라앉혔습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약혼을 취소하고 모든 일을 없는 것으로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그는 꿈을 꾸게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요셉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싫습니다. 그녀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처녀가 임신을 했다고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 마음이 허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자상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네 아내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수없이 많이 약속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구약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 5:3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고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루어 주셨습니다.

둘째,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본문 21절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을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1)고 합니다. “너희에게 전하노라” 너희가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2000년 전에 당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면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을 주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은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국의 세균학자입니다. 사람들이 하루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사님, 박사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페니실린’ 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플레밍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일생 중에 내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요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주,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여러분들에게 구원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23절)

본문 22-23절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큰복은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족에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훈련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마을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하루는 그를 데리고 밀림 속 깊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택하여 정글 속으로 정처 없이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칼 한 자루를 손에 쥐어주고 그곳에 혼자 남겨놓고 어른들은 돌아와 버립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깊은 밀림 속에서 혼자 밤을 지새워야만 합니다. 사나운 맹수의 울음소리에 온 몸이 오싹해지고, 주변에서 짐승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 지고, 그렇게 두려움 속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이 아이는 아침이 되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자기 혼자인줄 알았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완전무장을 하고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아이가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하,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셨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 아이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항상 지켜준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 7:2)를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일에 우리는 동시에 마지막을 생각해야 합니다.

넷째 분부대로 행하여(24절)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한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본문 24절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라고 합니다. 요셉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통적인 섭리로 나타납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성장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내려오시면 굳이 애매한 성령의 잉태설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을 또한 난처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잘 알 수 있도록 성장하게 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본부대로 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남편 선교사를 잃고 혼자된 여 선교사님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도 이러한 분이 많았습니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총각 선교사인데 당시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를 찾아 100$을 내어놓으며 한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자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한국에 올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소래지역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자연히 소래교회 초대 목사처럼 되었습니다. 1895년, 예배당 건축공사가 거의 끝나,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전도차 장연읍을 다녀왔는데 뜻하지 않게 일사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5일간의 고열 끝에 1895년 6월 23일 낮선 땅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일기에서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낀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과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내 마음은 평안하며 예수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는 같은 날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발송하지 못한 채 그는 숨졌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여자친구는 창창한 청년 선교사와 함께 한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될 장미 빛 미래를 그리며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애인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도중하차하지 아니하고 소래에 내려와 애인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고인이 된 애인을 위하여 한국을 떠나지 아니하고 원산지방에 머물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한국에서의 매켄지의 생애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the Rev W. J. McKenzie of Korea”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매컬리(Miss Elizabeth A. McCully)입니다. 이런 분들이 ‘분부대로 행한’, 예수님의 명을 따라 산 분들입니다. 또한 이 분들에게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되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분부대로 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6. 시험을 이기는 믿음) / 본문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느 여자대학 교수가 제자의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좀 고상하게 축전을 친다고 요한1서 4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결혼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축전을 쳤습니다. 요한1서 4장18절은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이 축전이 그만 오타가 되어서 요한1서의 ’1′자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18절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제자가 교수의 축전을 받고 좋아서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가 나왔습니다. 이 제자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축전을 받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곧바로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시간마다 다 참석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 보이던 박 집사님이 오늘 점심 반찬 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박 집사님은 묵은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고 온갖 반찬들을 정성스럽게 마련해 가지고 왔습니다. 자연히 박 집사님이 가지고 온 묵은 김치와 이 집사님이 가지고 온 화려한 반찬은 비교가 되었습니다. 박 집사님이 갑자기 벌컥 화를 냅니다. “사모님! 왜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시키십니까? 이 집사님이 반찬을 가지고 온다고 말씀하셨으면 저는 안 가지고 왔을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고요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그러지 마세요. 못 사는 사람은 교회에서 점심도 못 먹겠습니다.” 그리고 묵은 김치를 후딱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건강해 보이던 박 집사님이 한 순간에 시험에 듭니다. 아마도 그 날 남편과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나왔는데 하필 그날 따라 점심당번이 꼬여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그렇게 드렸던 예배와 헌신의 다짐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지요.
남자 성도님들은 아마 이런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역시 여자는 한계가 있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정말 그렇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 투표를 했습니다. 후보에 오른 안수 집사와 아내는 목사의 기대 이상으로 열성적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는 몹시 마음이 아프고 속이 쓰렸습니다. 왜 탈락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지금도 왜 그렇게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 믿는데 중요한 것인지 지금까지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뭘 그런 것을 가지고… 하다가도 막상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 닥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쩌면 사단은 죽음으로만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고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했는데 여기서 시험이란 “시련”(testing)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시험”(prirasmov”:페이라스모스)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만 악에서” 라고 나옵니다. “악”(tou’ ponhrou’:투 포네루)는 소유격인데 이는 남성 또는 중성으로 나옵니다. 중성으로 해석하게 되면 추상명사로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 악한 자로서 사단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 더 나오는데요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리고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와 요일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하옵소서”는 사단에게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사단의 꾀임에,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악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엡 6:16-17절을 보십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을 받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합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은 초라해 집니다.”(R. W. Emerson)
믿음은 겸손과 낮아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교만은 믿음을 방해하는 제일 큰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나오고,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큰 교회라 합니다. 모이는 사람도 몇 명 안되고, 아직도 보조를 받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예배 장소도 상가에 세 들어 있다면 작은 교회, 또는 개척교회라 합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거의 보편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 숫자나, 헌금 액수나, 건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 교회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7)고 했습니다. 참된 교회의 기준은 큰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군과 그 조카인 타냐와의 대화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타냐는 혁명 중에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고,
소녀는 매우 당황해하며 주저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때 장군은 잠깐의 시간을 가진 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알고 있었던 코마노프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야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 만약 코마노프가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할지라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2. 구(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가 도망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 66: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3.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민수기 15:37-4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을 때 “38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그리고 이 술을 볼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욕심, 눈을 따라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랬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교만한 자를 가리켜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합 2:5)라고 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의 특징이 있습니다.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이 됩니다. 자기가 다 모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다가 70년 간이나 포로생활을 하게 한 바벨론은 스스로를 자처하기를 만국의 어머니 같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7: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그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홀연히 임할 재앙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이것이 교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욕심은 정지된 것이 아니며 계속 더 나아갑니다. 그래서 욕심은 만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부모님에게 효도하면 부모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아마 가진 것이 있다면 모두 효도하는 자식에게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시고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9:9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 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 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 나서야 고작 쓸모 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 3:7-11절까지 “영광”이라는 단어를 매 절 10번을 사용해 가면서 이 영광이 결국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그 옛날 모세에게 내린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영의 직분을 맡은 우리가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하늘을 향해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은 뱉은 자에게 떨어짐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릴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서 “진정한 교회는 세상 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서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어, 죽어서만 천국 가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다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4. 기다림) / 본문 :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소녀가 편지겉봉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주소도 없이 보낸 그 편지는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역사는 처칠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바다를 넘고 우뚝 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랜돌프는 아내에게 “아들이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니 군인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들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제니는 워낙 바람기가 많은 여자여서 아이들의 양육을 유모와 하인에게 맡겨 버린 채,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자, 기숙학교에 보낸 뒤 돈을 보내 주고 가끔씩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의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고 게다가 고집이 셌기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교사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나빠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고 아버지로부터 “전혀 쓸모 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들은 후에 하는 수 없이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 간 과외 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으며 세 번째 시험을 준비했답니다.
그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는데,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와 기적적으로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든 살이 넘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늘 지긋지긋한 빚 독촉과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열 세 살 때부터 폐렴을 앓았고 심장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였습니다. 수상직에서 물러나 모교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 그는 학생을 행해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라고 말하며 연단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실 오실 때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강절에는 네 개의 촛대를 준비하여 한 주에 하나씩 켜나가서 성탄절 주일에 마지막으로 제일 큰 촛대의 불을 켜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이 오기 전, 4주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을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부터입니다. 처음에는 6주간을 대강절로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결혼을 금지하였고, 사제들은 매일 금식을 하도록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날 대강절은 11월 30일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첫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예비해야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첫 번째로 “기다림”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는 기다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결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같이 교회에 나오기로 했던 전도한 분이 안나오면 예배시간 내내 그분을 기다립니다.
자녀가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은 애타게 기다립니다.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잘 살게되어 기다림에 대한 갈망이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북한에 사는 사람보다 갈망이 상대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40)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로마는 각 지역마다 총독을 통하여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대다수 서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대지주들에게 노동력과 생산물을 착취당하게 됩니다. 또한 바리새인 같은 종교 엘리트들에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성전에 한번 들어가기 위해서도 세금을 내야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소작인이 되거나,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워 노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옛날 다윗 왕 시대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다윗 왕의 혈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이 비참하고 비굴한 삶에서 건져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내면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을 화려한 왕통으로 소개하는 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낙타 털로 짠 볼품 없는 옷)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축 늘어진 옷이니까 허리띠를 해야 겠지요), “메뚜기와 석청(들 꿀)을 먹더라” 그랬습니다. 단순,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을 하다가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곧 그가 메시아 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등장하기 전에도 스스로 메시아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사이에는 약 400년 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동안에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 졌고, 가짜 예언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세례 요한이 등장했는데, 요한은 말하길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이것을 볼 때 세례요한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강절 기간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되,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대강절이 안고 있는 의미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 보다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때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법이 없습니다. 방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먼지를 닦고, 거실을 정갈하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손님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해 놓고, 동네 어귀까지 마중을 나가서 손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네 삶이 이럴진대 하물며 구세주를 맞이하는 이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히브리어의 산성이란 단어는 ‘미스가브’(misgab)입니다. 이 단어는 높다, 안전하다는 뜻인 ‘사가브’(sagab)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masada)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높은 산성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최후까지 로마에 항거했습니다. 이 마사다도 ‘미스가브’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환난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울 때 계획했고 안정된 시기에 축성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겨울에 땔감을 사는데 쓰지 않으면 안될 돈을 여름에 놀며 쓰지 말라”, 잠언 6: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니니라”고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닥칠 가장 어려울 때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준비되었다는 것은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일을 추진하는 시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일의 성과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오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내일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해야 할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은 바로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 깨어있어 홀연히 임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한다는 것이 잘 안됩니다. 스스로하면 죄를 지을 확률이 많아집니다. ‘법 없이도 산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제 우리에게 총 들고 강제로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막는 일이 있지만 복음을 믿으라고 강제로 시키는 나라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해야합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지켜 내야하고, 우리 가족을 지켜 내야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누가 시키면 잘 안 합니다. 그래서 ‘하던 일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눌러서 강제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교육을 많이 받은 민족도 드뭅니다. 그러나 정말 공부를 잘하고 바른 사람으로 교육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은 하고 싶어서 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강제로 시켜서 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5-36)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 5:30절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5절에서는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7장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라”이라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능력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실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주님과 동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스스로란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3. 뒤돌아보지 말고 미혹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막 13:5-6)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1-32)
본문에 보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뒤돌아보는 것은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는 이 세상에 많은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지나친 욕심이 있으면 미혹 당하기가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 못할 집단을 만납니다. 바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제사장 그룹입니다. 제사장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로마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라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제사장)들은 성전 세를 받아 챙기니 얼마나 좋습니까? “마음이 둔하여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해하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뒤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눌러 앉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 많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 생길지 모릅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 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 분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 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 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만 믿으면 되겠군요.” 노 교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 때 영광 중에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