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쉴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 14. 안쉴년? (마 11:28)

<설교 맛보기>
- 여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여유..
- 의무로 하는 자는 지치나, 사랑으로 하는 자는 한결같다.
- 주와 함께 지고, 사랑으로 지고, 소망으로 지는 자가 되자.
- 주일날엔 최대의 컨디션으로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
- 쉬기 위해 일하는 자, 일하기 위해 쉬는 자..

무엇을 구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 무엇을 구하느냐) / 본문 : 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표한 559주년 되는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또 한글을 사랑하여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정말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글입니다. 한글은 다른 나라 글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창작이면서 목구멍의 모양에 따라 자음의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 기계화에 앞장선 사람이 있습니다.
1949년 우리 나라 최초로 “실용적인 타자기”개발에 성공한 공병우 박사입니다. 이분은 우리 나라 최초로 안과를 개업한 의사(1906.-1995. 3. 7.)이며, 70살이 넘어서 사진을 배워서 사진 작가가 되신 분입니다.
남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답게 그의 유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장례식 같은 건 하지 말 것, 장기는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학 교실에 기증할 것,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24시간 이내에 수장 또는 화장할 것, 부고는 죽은 지 1개월 후에 할 것……”입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일제를 향하여 ‘금일 공병우 사망’ 이라고 외치며 항거했던 것처럼 옮은 것에 대해서는 굽힐 줄 몰랐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수술을 해주며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6.25사변 때의 일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 공병우 박사는 소위 부르주아(가진 자)이었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인민들 속에서 “저 분은 우리의 적이 아니니, 살려야 한다”는 증언이 나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증언자는 공 박사로부터 무료시술을 받았던 가난한 환자였습니다.
또한 공병우 박사는 평소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분 안에 머리를 깎는 이발소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혼인식을 낮에 하는 곳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과 궤짝을 포개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 자신이 게을러지는 것을 늘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글 기계화 운동을 위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PC통신(하이텔)에 글을 쓰다가, 1995년 3월 7일 마지막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아무공로 없지만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잘 하고자 하는 사람을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세례요한의 소개로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이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누구를 찾느냐”입니다. 누군가, 무엇인가 찾고있었던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러나 할 것이 없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할 것이 있는 사람은 아침이 빨리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침이 밝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경험한 일일 겁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가는 날이 되면 비가 올까봐 밤새 걱정하며 잠을 못 이루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선교하고 싶어서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습니다.
시편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고 하셨습니다.
마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찾으십시오.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며 만나주십니다.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대상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족이 없으면 돈을 버는 목적도 집을 사는 목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대상이 찾아져야 그 때부터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희생제물입니다. 속죄제를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양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고 했습니다. 두 제자들이 찾는 것은 메시야 였습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무엇을 찾느냐”는 “메시야를 찾느냐”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12제자들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모두 불러서 예수님의 권한으로 선택된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제자가 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메시야를 찾고 있다가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세례요한을 따라다녔던 것은 혹 그가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메시야를 발견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했을 때 세례요한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두 제자만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확실히 메시야를 찾았던 것입니다.
TV에 프로그램 중에서 오래 전에 한국에서 입양되어간 아이들이 부모를 찾는 프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되는 것은 “저는 종로에서 발견되어 불광동 천사 고아원에 있다가 지금은 네덜란드로 입양되어 살고있습니다.” 이런 소개가 여러 명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툰 한국말로 “엄마~~”를 말 할 때는 눈시울이 적셔집니다.

제가 인터넷에 칼럼을 올린 것이 있습니다. 제일 추천수가 많은 글은 “강아지를 찾습니다.”였습니다.
“저희 집에서 제가 7년간을 함께 지낸 강아지입니다.
가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진보다 털이 더 자랐을 것입니다.
이 개를 보신 분이나 가져가신 분은 연락을 주시면
20만원을 사례하겠습니다.“

이런 벽보가 아파트 집을 나섰을 때 신호등 앞에 붙어 있었다.

함께 살던 강아지가 집을 나가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드신 사람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안타깝게 찾고 계십니다.
아직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은 분들은 속히 돌아오십시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성도님이 아니라 진짜 당신을 찾는 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 입니다.

돌아오시면 20만원을 사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이를 상속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니다.

고아원에 맡겨진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답니다. 그 아이는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부모를 무척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왔습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 소녀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은 온통 화상을 입어 흉측했습니다.
처음 만난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기보다는, 자기를 고아원에 버렸기 때문에 벌을 받아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소녀가 자란 다음 어느 날, 혼자 어렵게 살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토록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해왔던 터라, 별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 어쩔 수 없어 막상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돈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장을 시켰으나 안치할 곳도 없어 화장하고 난 가루를 그냥 산에다 뿌렸답니다.
그런데 장례가 끝난 후 누군가가 생전에 아버지가 보관해 오던 물건들(유류품)을 전해줘서 받아보니 아버지가 남긴 글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그 아이가 갓난아기 때 밤중이었는데 집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엉겁결에 집밖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아기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불길이 치솟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갓난아기를 안고 나왔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보니, 부인은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해 훨훨 타는 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젠 불길이 너무 거세져 구하러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타서 죽고 말았답니다.
불 속에서 딸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아버지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지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딸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흉측한 얼굴이 소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녀는 통곡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허구한 날 원망하고 미워했던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나를 찾지만 나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이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말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다빈치 코드라는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의 상상과 더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도 거침없이 변경하며 예수님의 일생도 변경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책과 말들에 정신 팔 틈이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소설작가입니다. 성경은 사실이고 다빈치 코드는 소설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따라갑시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함께 일어봅시다.
(골 2: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 3: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아멘.

무엇을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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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2. 무엇을 듣는가?) / 본문 : 마가복음 4:24-25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는 세상에서 수 없이 많은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한국 자녀들이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주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15일 퇴학 처리된 전북 K고 1학년 이승철(가명)군이 도교육청에 급식불만을 제보한 글이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에 의해 입수되었습니다. 최순영의원실은 전북교육청의 삭제된 글 데이터베이스에서 이군의 게시물을 요청한 뒤 원문을 공개했습니다.
“부당한 일로 신고할게 있는데 첫 번째는 수업 시간입니다.
이유는 학생의 동의 없이 학교장 마음대로 결정해 7교시까지인 수업을 8교시까지 하는 것입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 축제 연습하느라고 8교시까지 합니다. 저는 학교가 김제이기 때문에 집에 가면 너무 늦습니다. 그리고 학교 급식 반찬이 너무 형편없습니다. 매주 같은 반찬이 나옵니다. 친구에게 물어 봤는데 학교장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승철 군은 위의 내용을 전북교육구청에 올렸다는 이유로 퇴학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퇴학 처분되면 다른 학교에도 진학을 못한답니다. 저도 중학교 때 밤에 가지 말라는 천막 극장에 갔다가 선생님께 걸려 정학처분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한 친구와 같이 체육관에 갇혀서 1주일을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학교가면 교실에 못 들어가고 체육관에 들어가 갇혀서 있다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제가 크게 어머니에게 실망 시켜드린 것이 없는데 이 때 어머니는 정학이라는 통지서를 받고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번에 퇴학당한 학생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퇴학을 시킬 때는 현행법상 학생에 대한 퇴학은 의무교육 이외의 자(고등학생)에 한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으며,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31조에 따라 학교 내 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이수, 퇴학처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퇴학처분을 할 경우에는 5항에 따라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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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 오직) / 본문 : 누가복음 4:24-30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래 전에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오르간은 펌프질을 해서 연주를 해야됩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뜻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날 설교하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설교하는 저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본문 4장 18절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고 4장 22절에 그 반응이 나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은혜로웠습니다. 요즘 설교학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이쯤해서 예수님의 설교는 마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흥미와 관심이 고조되었고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시지 않고 더 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부분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얻으셨던 관심과 은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떨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내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인기나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말씀을 주시려고 합니다. 이것은 받으면 생명이요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의 말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6번만 나옵니다(12:37, 18:17, 29, 21:31, 23:43). 그만큼 이 말씀의 중요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전 엘리야 때에 있었던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때에 있었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야와 사렙다의 한 과부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몇 년(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날아다 주는 빵과 고기를 먹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릿 시내도 말라버렸습니다. 이 때 다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8절). 시돈 근처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머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밧에 성문에 머물러 있는데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자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체 불러서 물 한 컵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자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염치없게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갔다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과부인 여자가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밀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뿐입니다. 지금 나무를 줍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내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이 음식을 마지막으로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엘리야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으로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아들하고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와 아들이 먹을 마지막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칭찬하신 과부의 헌금하고 어찌나 똑같은 지요(막 12:42-44).

엘리사와 나아만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 소녀하나를 잡아온 것입니다. 이 소녀를 나아만은 자기 집의 시중으로 있게 했습니다.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에게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왕에게 고하고 왕은 은 십 달란트(340킬로그램)와 금 육 천 개(약 68킬로그램) 의복 열 벌과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찌 나병을 고칠 수 있겠냐고 한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미를 찾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옷을 찢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라고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전차와 식솔들을 데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은 나와 보지도 않고 문 앞에 서있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며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 집 대문을 떠나며 말하기를 자기가 사는 지역 다메섹에도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더 나은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도 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부하가 말하기를 ‘만일 선지자가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더 어려운 부탁을 해도 장군은 병을 낫기 위해서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단강에 몸 일곱 번 담그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다시 돌이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알았나이다.’(왕하 5:15)”고 고백합니다.
나아만 장군도 믿음 없이는 못할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당히 쉬워 보이는 일인데도 못합니다. 설마 하면서 안 합니다. 여러분! 평생 살면서 주일 만 이라도 성실하게 지켜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선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인데 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까요? 이미 구약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본문에서 두 절에 똑같이 ‘오직’이라는 말과 ‘뿐이다’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두 내용 모두 오직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사렙다에 사는 과부도 이방인이며 나아만 역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선포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이방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방인인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말도 하지 않고 이방인을 위해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심으로 자신 또한 이와 같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 뿐이다.”, “너를 얻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던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하기를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란다”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 오직 예수님 뿐이다.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안 해도 누가 하겠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만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이 엉뚱한 데로 가면 안됩니다. 어떤 교인이 차를 타고 가다가 남의 집을 들이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차는 하나도 망가지지 않고 그 집만 망가졌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하루종일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할렐루야가 아니라 망언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본문 : 누가복음 7:24-30, 렘 1장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올해(2005년) 명절은 추석이 주일이고 크리스마스가 주일입니다. 그리고 2006년 신년이 주일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억울해 하십니다. 쉬는 날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가야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질문으로 할까요.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께 두 제자를 통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질문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4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자문자답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심리를 다 읽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도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말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를 많이 질문 하셨습니다. 모세를 택하실 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시면서 손에 든 지팡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아모스, 스가랴 선자들에게도 “무엇을 보고 있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12)고 먼저 질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왜 먼저 보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30평 아파트입니까? 로또 복권입니까? 어떤 목사님이 20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교회를 짓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시대를 바라볼 줄 아는 영적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 말로 솨켓트 인데 이 뜻은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삼국유사에 보면 살구꽃을 보고 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구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로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와 가뭄에도 잘 견디며 100년 이상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1:7-9 “7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을 분명하게 믿는다는 증거로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시에 북 이스라엘은 B. C 721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고, 강력한 앗수르는 바벨론이 멸망시키고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더욱 악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세상에 보이는 세계를 구별하고 인식하며 보게 하는 눈입니다. 지식의 눈은 배움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눈입니다. 영안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의미의 말이 72번이나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는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듣고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 똑똑히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만이 영안이 열리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번째 “끓는 가마를 보았나이다”(렘 1:13)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끓는 가마가 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당할 심판을 끓는 가마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었다는 것은 북방에서 오는 세력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바벨론 입니다.
남 유다가 왜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우상을 만들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3차에 걸쳐 공격을 받고 B. C 586년 비참하게 멸망당하여 70년간 바벨론 포로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긴다면 재앙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인데도 미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멋있게 대답하면 좋겠지만 여러분에게 그것을 부탁드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쉽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레미야 것을 우리 식으로 조금 벤치마킹하자면 “개나리를 보나이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개나리는 살구꽃과 마찬가지로 입이 나기 전에 꽃이 피며 봄에 제일먼저 피는 꽃입니다. 개나리는 추위와 공해에도 잘 견디며 씨로 번식하기도 하고 꺾꽂이해도 잘 자랍니다. “개나리처럼 빨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잘 번식하며 추위와 공해 속에서도 잘 자라겠습니다.”

본 자만이, 깨달은 자만이, 비밀을 아는 자만이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데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을 모르는데 무슨 비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을 구경하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를 보려고 갔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출 4:16, 사 1:24, 렘 1:1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왜 주앙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 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26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은”(페릿소테로스) 비교급으로 “더욱 풍성한, 더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좀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요한이 직접적으로 물은 “당신이 오실 메시야 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모호하게 대답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메시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메시야 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시며, 대제사장도 되십니다. 단순한 메시야 하고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봅니다. 어떠한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의 주님의 바라봅니다. 아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본문 : 마태복음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탈무드에는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한 청년이 자기 아버지에게 닭을 잡아서 요리해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궁금하여 닭을 어디서 구해 왔냐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걱정 마시고 많이 잡수시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청년은 물레방앗간에서 아버지를 도와 밀을 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방앗꾼을 불러모으는 징집령이 내렸습니다. 이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들이 징집에 나갔습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탈무드]는 두 아들 중에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떨어질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대답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징집에 나간 아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징집에 나간 아들은 힘든 노동과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간 아들은 앍을 잡아드린 아들인데, 그는 아버지의 물음에 정중하게 대답하지 않아 순종이 부족한 것이라는 겁니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부모님을 잘 봉양하거나,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은 효도도 공경도,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에는 효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효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가끔은 믿기 싫지만 자녀가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일도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그만 이라는 식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하느냐 하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만연하고 우리 자신도 부정하기 힘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마치 교회에 다니면 효를 무시하거나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유교나 불교에 비해서 부모에 대한 효가 덜 강조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는 정확하게 말하면 신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효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는 우주가 자연 생성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고 우주를 형성하는 오행(五行: 金, 木, 水, 火. 土)을 인간계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이로서 유가(儒家)에서는 오륜(五倫)과 오상(五常:仁, 義, 禮, 智, 信)의 사상을 체계화했습니다. 논어에는 ‘먼저 오륜 가운데 효는 그 으뜸으로 가르쳐 왔다. 오륜은 하늘이 편 법전이요, 사람의 도리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바니라. 사람의 행실은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나, 오직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되느니라

아버지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 아버지 사랑) / 본문 : 누가복음 6:27-36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하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어느 날 외아들이 살고 있는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은 물건을 훔치려고 귀중품을 주섬주섬 챙겼습니다. 그런데 예쁜 아기가 새근새근 자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둑은 갑자기 생각이 달라져 물건을 놔두고 그 아이를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기가 깰까봐 조용히 아기를 이불에 덮어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잠에서 깬 아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일어나 도둑과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아버지는 도둑의 칼 앞에 멈춰서 있었습니다. 도둑은 점잖게 주인에게 이 아이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도둑이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도둑을 향하여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돈을 다 가져가세요. 그리고 통장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그런데 도둑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아버지는 나가려는 도둑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우리 집 모든 것은 가져갈 수 있어도 그 아이만은 안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미국은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가 31일 루이지애나주 인구 130만 여명의 뉴올리언스는 거의 전 지역이 침수된 가운데 곳곳에서 구조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앨라배마주는 사망자만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미국도 자연의 힘 앞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봅니다. 6m정도까지 물이 찼다니까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먹을 물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 홍수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TV를 켜도 또 뮤직 앨범을 들어도, 영화를 보아도 이 사랑 이라는 주제가 넘쳐흐르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배용준씨의 인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외출’이라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난리도 아닙니다. 타이완에서는 70된 할머니가 배용준을 좋아하여 암도 이기고 새 삶을 산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니까 병 걸린 것도 이긴 것 같습니다. 배용준이 묵고있는 호텔 바깥에서 방송사 차들이 밤을 새워가며 생방송을 했습니다. 타이완기자들은 대통령이 와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9월 11일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일본 언론들은 “배용준의 방문으로 총선 열기 잠재웠다”는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콘서트 장에는 3만여 명이 모이고 6개 지역에 위성으로 생 중계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총선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 사진이 곳곳에 붙어있는데 그곳에는 관심이 없고 욘사마 사진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팔려나간 배용준 사진을 비롯해 관련 용품이 우리 돈으로 약 10억 원 이랍니다. 한국사람이라 기분은 좋습니다.
그런데 분명 이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 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에는 소위 희랍문화 권 안에서는 로마,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 그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가지 그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에로스라든지 휠리아, 스토르게이런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에로스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여지지 않습니다. 휠리아, 스토르게는 조금씩 나옵니다.

성경은 새로운 단어들을 많이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단어로는 설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성경이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적절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기존에 동양사상에서도 ‘하늘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구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을 제일 잘 나타내는 용어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사랑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 당시에 사장되어 있던 단어 하나를 찾아냅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쓰지 않던 죽어있었던 사어라고 할 수 있었던 단어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재생시켰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아가페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가페(ajgapavw)는 27절에 1번 그리고 32절에 4번, 35절에 1번 모두 6번 동사형으로 나타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넘어서는 사랑, 타산이 없는 따지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할 때 상대방 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을 접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그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 보시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사랑과 희락과 화평과…)”하고 제일 먼저 강조된 것이 뭡니까? 사랑이죠 그런데 바로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페입니다.

참 사랑이 아닌 것

본문에서 ‘아가페’적이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 지적해 주십니다. 바로 ‘무엇이뇨’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1.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한마디로 남들 다하는 사랑만 하는 것은 칭찬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자녀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상이, 칭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믿지 못할 일이 있기는 합니다.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싫어하여 구박하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지요.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죄인들도 이 정도의 사랑은 다 한다는 것입니다.

2.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누구든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욘사마를 좋아하는 것처럼 몰려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는데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사랑한다는 것은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3.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이 말씀은 사랑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챙기려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란 돈을 빌려주는 목적이 이자를 받기 위해서 라면 칭찬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수히 받고자”는 그대로 돌려 받기를 바라는 계산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페 사랑은 그냥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에 사용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의 원수(ejcqrou;”:에크드로스)는 구약성경(70인역)에서는 계약관계를 깨뜨린 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사기죄에 해당하는 죄를 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만 조금 다녀본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적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스탠톤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링컨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링컨은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날 고릴라이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 스텐필드로 가라. 거기에 가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그 스탠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하거든요. 그런고로 다 극복할 수 있어요.” 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암살 당했을 때에 가장 슬피 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강합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링컨은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기에 평생 자기를 비난하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유언을 잘 따랐기 때문입니다.

링컨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링컨이 9세 때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 때 유언과 함께 물러 받은 것이 낡은 성경 한 권 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 성경 한 권으로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일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 낸시는 죽으면서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께 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낡았지만 우리 집의 값진 보배다. 내가 너에게 100에이커(12만평의 땅)를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너는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리고 링컨은 말하기를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경의 보화를 캐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이 성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값진 보화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주님을 믿고 따르지만 내 의지 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순교’입니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고 순교할 수 없는 것처럼 저는 이 사랑의 문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정말로 원수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구요 두 번째로 기도하면 용서해 주시는 것을 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용서가 안되시거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세요. “주님 내 힘으론 안됩니다. 생각으론 되지만 마음으로 안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까요, 안 들어주실 까요?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는 의미로 “사하여 준 것 같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하며 가르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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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7. 행하며 가르치라) / 본문 : 마태복음 5:18-19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71년 이탈리아 영화제작자 피에르 파올로 파솔로니(Pier Paolo Pasolini) 때문에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람은 동성연애자요 막시스트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감독한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때문입니다. 개봉되기 전까지는 화면에 예수님이 나온다는 정도로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존 그 어떤 영화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파솔리는 영화가 완성되자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에 여행할 때 교황이 행차하자 엄청난 교통체증이 발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오도 가도 못하게된 파솔로니는 호텔 방에 갇혀 무료함을 달래느라, 탁자 옆에 비치된 신약성경을 집어들고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가던 그는 뭔가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본 없이 마태복음을 유일하게 대본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파솔로니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남부에서 빠듯한 예산으로 예수님이 살았던 팔레스타인과 같은 지역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며 잿빛 풍경들을 연출하며 찍었습니다. 파솔리니의 이 영화는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담긴 영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따르던지 따르지 않던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반대한다고 뒤집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선택권은 내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파솔리니가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깨닫습니다. 자기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다시 봅시다. 자세히 봅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는 영적으로만 계시던 하나님이 신약에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오신 것은 행함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침없이 합니다. 욥기 10: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욥이 살던 구약시대까지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육체를 입고 사람처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할말을 찾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시험이 있습니다.

욥의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 당하실 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보통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분명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능력이 있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단이 그런 시험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얼마 있다가 오병이어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미 사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모습으로 능력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단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으로 사단의 모습은 드러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감춰졌습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을 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거짓 복음서가 있는데 위경 복음서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로부터 거짓문서로 판단을 받은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어 숨을 쉬어 생명을 부여하고, 말라비틀어진 물고기를 물에 던져 넣어 기적적으로 헤엄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염소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만화책에나 나올만한 그런 “슈퍼소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때로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굳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천사나 보내고 구약시대처럼 직접 능력을 일으키시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로 좋아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멀리 여행 갔다고 돌아오시는데 자식이 반갑게 뛰어나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를 만나려고 저처럼 기쁘게 뛰어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품에 안길 줄 알고 팔을 넓게 벌리려는데 자식은 부모님 손에 있는 선물꾸러미를 낚아채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손에 있는 선물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와 같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시험은 안 하지만 비슷한 시험을 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가느냐?”, “집에서 얼마든지 혼자도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느냐?”, “바쁜데 오늘은 쉬어라?”, “너 쓸것도 모자라는데 네가 아니어도 교회에 부자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감사헌금은 안 해도 된다“ 등 수 없는 유혹을 오늘도 해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내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유혹도 그렇습니다. 아담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라도 자신만을 위해서 땅 투기, 집 투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망합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

행하며 가르치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 당신을 명령을 잊어버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하면서 했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했는지에 따라서 등급이 구분됩니다. 우리모두는 천국에 안가 보았으니까 이 등급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와 “크다”라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 차이는 상당한 것입니다. 진짜 상급에 욕심이 있다면 천국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저는 “과연 이 시대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분을 찾으려면 신앙영웅에 관한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흔히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제일 큰 부자들 중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일 오래 사는 사람들 역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누구일까?”를 찾다가 선교사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시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 선교사님 중에는 남편을 잃고 선교지로 가신 분, 선교지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함께 선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낮선 환경으로 한때는 고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한철 몇 일 덥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년365일 30도를 넘는 선교지역이 태반입니다. 아니면 극동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싸우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서 “미션매거진”이라는 매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선교사가 왜 다릅니까? 이분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가신 분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노 부모님을 한국에 그냥 두고 가신 분, 자식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욕심을 가진 분들은 선교 못합니다. 자기 욕심이 있는 분들은 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다 선교지에 가있지는 않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방법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포기와 유사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치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길을 스스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기 이틀 전까지 본회퍼의 설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결국 지도자는 그릇된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내보냈던 방송사는 히틀러의 세력으로부터 폐쇄 당했습니다. 본회퍼는 인쇄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군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제로 중단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저서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정한 사도가 되라(The Cost of Discipledhip)』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살아야 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1939년 본회퍼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만약 이 순간의 시련을 독일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독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잘못된 점을 늘 지적하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수감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사야서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올라 처형되었습니다.

일본 기독교사에 보면 1552년부터 1616년까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 기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놀랍게도 20,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점점 기독교가 왕성해가자 일본 왕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622년에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하여 기독교인들은 지오미오 섬에 있는 시니아바라 도시로 피난 가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며 싸우다 결국 3개월을 버티다 일본군에 의해 20,000여명이 대학살 당했습니다.
이 모든 순교자들이 행하며 가르친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존 번연이 읽고 『천로역정』을 썼다는 『기독교 순교사화』(Martyrs)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의 책 뒤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으나 세상을 넘어선 사람들,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했던 사람들!

고문도, 옥에 갇힘도, 배고픔도, 단두대도, 화형도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우리로 주님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게 한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귀히 보시는 주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 귀히 보시는 주님) / 본문 :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코카콜라하면 전 세계인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계제일의 브랜드입니다. 국제적으로 미국의 외교관은 없어도 코카콜라는 들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코카콜라의 본사는 미국 애틀랜타에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전세계 198개국 이상에 들어간 것은 이 회사의 사장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사장은 늘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 그리하여 하루에 8억 병씩 팔리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회사로 성장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 속에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뜨거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불타 올라야 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욕심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생명의 복음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의 주님의 피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가치

가난한 과부를 말하는 원문의 프토코스(ptwcov”)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극빈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부자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두 렙돈’은 ‘작은 것’이라는 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에서 사용되는 가장 작은 유대의 동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지금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5만원으로 계산해서 1/128로 나누면 390원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까 400원이 안 되는 돈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이 돈은 부자가 바친 돈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은 금액입니다.
예수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진실로”는 원어에서 ‘아멘’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지금 가르침이 신실성과 권위로 인준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산술적 가치로 말하면 비교도 안 되는 헌금이지만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역전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산술적 가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신앙적, 질적 가치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분입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보통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여실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청년에게는 과격하게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라고 하셨으면서 정작 과부가 내는 ‘두 렙돈’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강퍅함에 실망하셨고,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모습에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믿음에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보다 많이 한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44절 함께 읽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자기의 생활비 전부입니다. 이제 그는 돌아가면 아무도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식구도 없을 것입니다. 저녁밥을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돈으로 빵 하나라도 사서 먹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부’를 드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시한부 인생에게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흘러가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게 있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된 사람과 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1원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일 작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제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결코 작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억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 비유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욕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조그마한 돌멩이를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그러자 그 남자는 눈빛이 변하면서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이왕이면 더 큰걸 주세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좀더 큰돌을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러자 그 사람 역시 더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 덩어리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욕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으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싶지 않니?”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욕심이 없는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 하나님,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비전과 소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기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어도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작은 것 소중히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싱거는 오랫동안 가난과 병으로 누워서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 가정을 잘 꾸려 나갔습니다. 그의 부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습니다. 싱거는 아내의 사랑과 정성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싱거는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고생하는 아내를 도와줄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느질하는 아내를 도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쉽게 바느질하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재봉틀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재봉틀의 이름을 아래를 위해 만든 싱거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물론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귀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실 때 사단은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뀌었습니다(마 4:8).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천하만국이 하나님 아버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가치를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셨습니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만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큼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도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한 생명입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국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이 영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적지 않은 격론을 벌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 역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 사람보다 안식일이 먼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에 웅덩이에 빠진 양의 비유를 들어서 ‘너희들은 양이 안식일에 구덩에 빠지면 꺼내주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마태복음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아들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자녀입니까?

흑인 지도자 말콤엑스는 흑인으로 백인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백인인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부를 희게 하려고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고 백인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백인이 되지 못하자 더욱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절대로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백인이 되지 말고 흑인이 되자. 흑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검은색은 아름답다.” 이때부터 “흙색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흑인 사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비아냥거립니다. 네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고있다고 합니다. 욥은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2)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자일 때, 행복하게 살 때에도 밥을 먹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아름답게 빛나는 스카프를 본적이 있으시겠죠? 좋아하시는 분은 몇 장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스카프의 미의 절정은 오색찬란한 그 색채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카프에 채색시키는 염료는 연지벌레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 벌레는 아주 작습니다. 선인장 잎사귀 밑에서 눈에 띄지 않게 양분을 섭취하며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랍니다. 이 작은 벌레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스카프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 작지만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과 진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 해방과 진리) / 본문 : 요한복음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어느 가정에 아내가 며칠간 친정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내는 혼자 있을 남편이 걱정이 되어 반찬도 마련해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옷은 어떻게 입고 나가고, 양말은 어디 있고 등등 여러 가지를 남편을 위해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못내 미안한 마음으로 ‘가능하면 빨리 올게요’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표정을 보니, 부인이 없기에 쓸쓸한 표정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부인이 없는 집에 들어선 순간 남편은 땅을 치면서 좋아하더랍니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해방이다!” 마치 8.15 광복절을 만난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더랍니다.

내일은 우리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 된지 60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제 일제의 만행과 광복을 체험한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때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지금까지 죄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있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한번 엎지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교훈 삼아 지금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사진/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 저는 이 사진과 이야기가 너무 끔찍해서 주일예배에 전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전해야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으며 모두 거짓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마다 전쟁기념관을 만들어서 역사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자료제시 설명).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던 1945년의 국민생활 수준을 통계청에서 발표하였는데 당시 평균수명 44세, 유아 사망 율은 1000명당 102명, 인도 다음 2위로 높았으며, 문맹자 77%이었습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현재 평균수명 남자 73.4, 여자 80.4세로 평균 77세입니다. 그리고 문맹률은 2%정도로 세계 최하위에 속합니다. 우리경제는 IMF을 경험했지만 교만하지 않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런 민족적 해방을 귀히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아직까지 자유가 속박되어있는 북한이 여전히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루 속히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은 속박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속박 당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1.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자유 함이 없습니다.
시편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참이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진짜 거짓말은 ‘나는 절대 거짓말은 안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어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담화문을 발표해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와 정부, 국가의 신뢰도는 백성들에게 깨어져 버렸습니다. 백성들이 정부와 국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이런 나라, 이런 정부가 싫다고 조국을 떠나는 젊은 엘리트 가정들이 늘어나고만 있습니다. 사회 생활하면서 누구를 만나든 그 말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에그, 순진하기도 하지’라고 동정을 살 정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의가 사라졌습니다.

미국 LA 영락 교회에서 목회 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몇 해 전, 평양에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오래 전에 서울에서 목회 할 때, 남대문 시장에 바지를 하나 사러 가셨습니다. 바지 사러 가시는 목사님께 권사님 한 분이 코치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무조건 절반을 깎으세요” 그래서 바지 하나를 고르고, 얼마요 했더니 주인이 7천원 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절반 깎으라는 코치가 있었기에, 심호흡을 하고 짐짓 잘 아는 체 하며 ‘아니 왜 그렇게 비싸요? 3천 5백원만 합시다’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풀이 죽는 표정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옳거니 기 싸움에서 내가 이겼구나’했는데, 그 주인이 풀 죽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그거 원가가 6천원이에요.” 자기를 보고 목사라고 부르는 소리에, 게다가 그 가게 주인이 자기 교인이란 말에 목사님은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고 합니다.

시편 57: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영으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언하실 때 분명히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2. 진리를 변명으로 거부합니다.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변명합니다.
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아시겠지만 거짓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의 종 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왜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습니까? 노예 살다가 나온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 들이 출애굽기에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덕이 없다니요! 우리는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낫다’ 이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때도 70년간이나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통치하에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민족적으로 지금도 자유가 있습니까?
그러면 정말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런 것을 모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적인 예속상태에 있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압제 속에서도 종교적인 자유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는 일종의 자부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면 거짓인 것이 금방 들어 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이 우상을 섬기고 거짓을 계속해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대상 9:1)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거부하면 안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한다는 그 자체가 그 어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적 자부심도 좋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항하면 안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을 보면 이런저런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무슨 무슨 가문의 몇 대손 이라고 하는 자부심 때문에, 내가 그래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데 등등 많습니다.
빨리 손들고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일의 활력이 되지만 자만심은 망하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3. 죄의 종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민족적인 노예나 지금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잘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극명히 들어 납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적인 해방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입니다. 지금은 민족적으로 해방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민족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민족이 타민족에게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족은 지배당하고 있을지라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이 해방되어 있어도 지옥 갈 사람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문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가 노예가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죄에게 지배받으면 안됩니다.
목회하기 힘들다고 할 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분 만나면 괴롭습니다. 다른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 세례증명서를 떼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앞으로 받을 거니까요. 그러면서 떼어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세례 받을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줍니다. 이 목사님도 안 떼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나가서 하는 말이 “목사가 융통성이 없니, 목사가 사랑이 없어, 너무 꽉 막혔어!”하고 다니더랍니다.

4. 아들이 자유를 줍니다.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뒤에 나오는 “자유하리라”는 해방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종의 멍에를 버립시다. 오랜 관행이라고 하면서 대충하지 맙시다. 정직하게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죄에서 해방을 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일제 만행의 증거 정옥순 할머니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 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 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