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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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23. 이루어지는 말씀) / 마 5:17-19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지난번 우리가 배우자 문제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좋은 배우자감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면”되겠다고 그랬습니다. 배우자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참 답답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으시면 답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동행하며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3)는 말씀을 어겼습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흐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노아를 찾으셨고 아브라함, 모세를 찾으셨습니다. 배우자 찾는 사람도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 남편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아내가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부터 못 알아듣는지 테스트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현관문에 들어서자 아내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남편은 현관에서 “여보! 오늘 저녁 뭐야?”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속으로 “아, 현관에서 부엌까지는 좀 멀지!”라고 생각하고
응접실 입구까지 가서 “여보! 오늘 저녁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또 속으로 “여기도 머무 먼가?”생각하고 부엌 입구까지 가서 “여보! 오늘 저녁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속으로 “아니, 도대체 여기서도 안 들린단 말인가? 아내의 귀가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마음이 아파 아내 곁으로 다가가 아내의 등에 손을 살포시 얹으며, 다시 한번 질문했습니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여보! 오늘 저녁 뭐지?” 아내는 갑자기 얼굴을 홱 돌리면서… “아니, 칼국수라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아내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통보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의 말씀(능력)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도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아까운 우리 인생의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창조하는 것이며 말씀이 치료하는 것이며 말씀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면 숱 검둥이 같은 마음도 흰 눈보다 더 희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제일 귀한 선물이다.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은 이 성경책을 통해서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을 펴 들고 있으라. 그리하면 그대의 천국 가는 길도 늘 펴져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1. 모든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본문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평행구절 눅 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했으며 마 24:35, 막13:31, 눅 21:33에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의”라는 말은 “율법일지라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나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알고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켜오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율법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도 최종적인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이지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보다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율법은 지키지는 것이며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마스’에 대한 책을 쓸 때 제일 초점을 맞춘 것은 일반적인 크리스마스 풍습이나 소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마 1:22)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마 2: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23)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4:14)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구약의 예언된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시고 사역하시고 하나님께 올리워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이것만 남겨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66목록 중에서 이제 나머지 한 권 계시록의 예언들만 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말씀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아멘.

2. 말씀은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특별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읽기입니다. 올해 공휴일 4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함께 모여서 성경 일 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일 독해서 성경을 일년에 두 번 읽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혹 올해 못하신 분은 반드시 내년에는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앙교회는 매년 성경 2독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은 읽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지키면 말할 것도 없이 복을 받습니다. 이것을 왜 안 합니까? 열심을 내어 읽읍시다.
행 8:14-17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성령을 받기 전에 14절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했습니다.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은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성령이 임합니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저희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습니다. 말씀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아멘을 너무 잘하시는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너무 잘 하실 뿐 아니라 너무 크게 하셔서 때로는 목사님이 설교에 집중이 안되기도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부흥 강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다 이 권사님이 “아멘~”을 한번 하시면 말씀을 전달하는데 집중이 안될 것 같아 목사님은 권사님에게 부흥회 기간 동안에 영아부에 들어가셔서 아이들을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보던 권사님이 영아실에서 “아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나중에 물으셨습니다. “권사님 아까 왜 아멘 하셨습니까? 부흥 강사님 설교가 영아부에는 들리지 않을 건데요?” 권사님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아이들이 보는 지도책을 보았는데 그 지도책에 깊은 바다는 왜 더 짖은 파란색이 칠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고 아멘 했습니다. 미 7:19절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나서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면 언제나 아멘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말씀은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가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입니다. 디도는 이 예수님의 당부를 딛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디도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맡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야기하라면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만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더 큰 것도 요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영생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아직 실감이 안 나실 것입니다. 이 감사가 진짜 실감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천국에 가면 실감날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을 아무 값없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올 수 있었다니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당부하신 말씀을 조금만 더 힘써서 전할걸!”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일 조금만 뒤로하고 주님의 일을 좀더 열심히 할걸!”하는 마음이 들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아멘.

“손가락 하나 탈골 돼도 이렇게 아픈데 예수님은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당신을 생각하며 참아내겠습니다.” 오른손 검지가 탈골된 상태에서 결선에 임해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번 째 금메달을 조국에 안겨준 유도 73kg급의 이원희 선수가 시합 전 하나님께 올린 기도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하셨던 고난을 생각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부탁으로 오신 분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한 선교사가 오랜 시간이 걸려서 토착어로 번역한 성경 원고를 인쇄하기 위해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는데, 지중해에서는 독일 잠수함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탄 배도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되어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배가 바다로 빠지기 직전 선교사는 다녀간 고심하여 만들어낸 성경 번역 원고를 보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즉시원고를 상자에 넣고 편지를 첨가해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하여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 상자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튀니지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영국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의 유언대로 1929년 6월에 인쇄되었 습니다. 그리고 이 토착어역 성경은 때마침 옥스퍼드대학에 재학 중인 아르리카토인 학생의 손에 넘어가 아프리카에 보급되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말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자 대동강을 넘었습니다.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서양의 배를 향해 불화살을 쏘았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탄 배(제네랄셔만호)는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어떻게 만들어 이곳까지 가지고 온 성경인데 이대로 물에 다 빠져버리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힘껏 성경책을 육지를 향해 던졌습니다. 이 중에 한 권이 바로 토마스 목사의 목을 자른 박춘권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 호기심을 느낀 박춘권과 가족은 몰래 숨어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도 성경작업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공동번역이 아직 자체 안의 오기나 탈자나 오역을 못 고치고 있던 무렵에 평양 교정본이 그러한 잘못을 다 바로잡는 성실함을 보여준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북한 성경의 교정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는 그 실무자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작업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북한 성경 작업 실무자가 밝혀지면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위원장인 강영섭 목사는 공동번역 성서 평양교정본의 작업 실무자가 이눌서(李訥瑞 Reynolds)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던 이영태(李榮泰) 씨임을 밝혔습니다. 이눌서 선교사는 19세기말에 우리 나라에 와서 1938년에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이나 우리말 {구역(舊譯)}과 {개역(改譯)} 작업에 깊이 관여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입니다. 바로 그의 조수였던 사람이 이영태입니다. 이 사람이라면 능히 공동번역 성서를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한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이영태 라는 사람이 바로 1866년에 제네랄셔만호에 한문성경을 잔뜩 싣고 대동강을 타고 평양으로 들어오던 토마스 목사를 처형하던 한 군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먼 훗날 그의 삼촌이 토마스 목사에게서 받아 온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숭실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한 후 이눌서 선교사의 조수로 일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놀랍습니다! 할렐루야!
토마스 목사는 순교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웨일즈를 떠나 중국을 통해 조선 땅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중국에 오는 중에 병이 걸려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본국에서는 토마스 목사가 돌아올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교회를 찾아갔었습니다. 교회 안은 우리교회만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앞마당에 토마스 목사님 묘비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전해질 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전해지지 않는 복음은 고인 물과 같습니다.
성경번역선교회(GBT)에 따르면 아직도 3,000여 미전도 종족이 자기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잊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전2025’란 목표를 정했습니다. 비전 2025란 2025년까지는 성경을 필요로 하는 미 전도종족의 성경 번역이 시작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20년 동안 10개의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전달해 주었습니다. 제 바램은 우리 주앙교회가 속히 성장해서 이러한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까?,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생명의 복음을 전달한다는 것,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보람되고 뜻깊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롬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멘.
 

또 하나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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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22. 또 하나의 복) /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지난번에 마태복음 5장 1-12절의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아홉 가지 복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마 5: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고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아야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에서 전하신 복의 개념과 지금 복의 개념이 연관성이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데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실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섭정하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 헤롯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자기 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나서 그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 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은 마음의 괴로움과 분노를 느꼈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충고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으로 불붙은 세레요한은 이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 “동생의 아내를 뺏은 죄는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책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감옥은 사방이 돌로 쌓인 아주 좁은 지하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나 세례요한에게 희망은 있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로 믿고 세례를 주었던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구해줄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신이 하시던 일, 병든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에게 오직 복음을 전하시는데 힘을 쏟고 계셨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나를 버렸나?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맞는가?” 이런 생각가운데서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마 11: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해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족지 않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
예수님이 오시기전의 사람들은 많은 것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과 같이 하나님의 금지법 즉 “…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계명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하기 싫은 사람은 뭐 그렇게 안 되는 것이 많은 지요? 정부도 하기 싫으면 다 안됩니다. 예를 들어 공장을 새우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나라나 회사가 잘 되려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하고 서비스해야 됩니다. 그런데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허락을 기다리는데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이유만을 열거하면서 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라 나 회사의 발전이 안됩니다.
5.16 군사 정권이 5공화국 시작할때 우리 나라 GNP가 850$정도였답니다. 박정히 대통령은 아프리카가 1000$이 넘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보다 더 못사는 이 나라를 평가하기를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만 남아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고 위치며 긍정적인 희망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추진할 때 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일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은 어떻겠습니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는 긍정을 심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어느 기자 회견에서 “이 세대는 간절한 소망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기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면 소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회견장에 참석했던 기자 중의 한 사람이 “그 마지막 말은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라고 힐난하자. 토인비는 옆에 있던 손자를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가 저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더랍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는 것이겠습니까? 기대하고 바라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정의 뜻을 가진 것까지 긍정으로 바꾸어 놓으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19:24절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이것을 말하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니라”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시고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절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부정적인 생각, 표현들을 주님처럼 모두 긍정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같은 시대에 사신 분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궁에 들어가 왕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결국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하고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정치적인 면에 관여한 것입니다. 사회의 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일대일 전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자기 탓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산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제일 좋아하는 다윗이 십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왕이지만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까? 자신의 군졸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일년이 지나서 그 일이 아이가 잉태되어 발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의 적으로 우리아를 왕궁으로 끌어들이고 술 취하게 하고, 아침에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요압장군에게 보냅니다. 자신이 죽을 내용을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삼하 11:15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그대로 되어서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그 아내 밧세바는 슬픔에 빠져 호곡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 왕궁에서 살게 했습니다. 왕으로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정말이지만 다윗 같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이 행동은 삼하 11:27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의 죄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4개의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나단이 말하기를 “어느 성에 부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고 한 사람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만 있어서 집안에서 같이 살아 이 암양은 한 식구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자기 소와 양은 아껴 잡지 않고 가난한 집 암양 새끼를 잡아 행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 왕은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흥분을 했습니다. 여호와께 맹세까지 했습니다. 나단은 바로 그 인간이 당신 다윗이라고 했습니다(삼하 12:7).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솔직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점입니다. ‘정직’입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왕상 3:6절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어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뒤에 어떻게 행동하느냐 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 간음한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윗도 왕이었고 헤롯도 왕이었습니다. 헤롯에게는 세례요한이 죄를 지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잡아넣고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죄를 지적한 나단은 삼하 12:15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한 사람은 목잘라 죽임을 당하고 하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론 죄를 짓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근본은 헤롯과는 물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태신앙은 다른 겁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면 반드시 그 자녀는 바르게 삽니다. 한 때 실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자신만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의 결국은 정직으로 돌아옵니다. 회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한 때 실수를 한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 앞에 돌아온 다윗 왕과 같기를 바랍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주고 설문을 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한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습니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든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실족할 것이 있으면 빼내야 합니다.
‘실족하다’ skandalisqh’/(스칸달리스데)로 ‘길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 것에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길에 빛이 된 것이 아니라 함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실족치 말아야 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십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가는 길의 낙오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 5: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족할 모든 요소를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전 8: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에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실족한다면 영원토록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 대장이 신병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누라 말 잘 듣는 사람 앞으로 나와.” 모두 나오는데 딱 한사람만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군 대장은 그 신병에게 “너는 왜! 마누라 말을 듣지 않는 거야!”라고 물으니 신병이 하는 말이 “예! 우리 마누라가 이런 때는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아니 마누라 말도 이렇게 잘 듣는 남자들이 왜 예수님 말은 안 들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누라 말 잘 들으니 마누라가 전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부인들 명령을 다시 내리세요. “예수님 말씀부터 듣고 그리고 내말 들어!”

마 18:6-7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저는 목회 하면서 두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통해서 실족하는 영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로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기도해 주세요. 주앙교회를 통해서 절대로 실족하는 분이 없도록 이요.
우리의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자녀를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모두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꿉시다.

젓 소를 키우는 분이 그 주에 제일 많이 젓을 내는 소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소가 저녁에 들에서 돌아올 때 다른 소에 비해서 어깨에 힘이 있어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다른 소들도 서로 젓을 많이 내려고 노력을 했는지 예전보다 더 많은 젓을 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족하지 않으려면
실족하지 않는 방법을 요 11: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밤에 다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도둑입니다. 빛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른길로 인도하는 빛이 없으니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빛은 누구입니까? 요 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실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벧후 1:10-1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메리 리드라는 여 선교사는 인도에서 문둥병 환자의 불쌍한 운명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매일 슬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둥병 환자를 구제하는 방도는 무엇하나 실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리드 자신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고원 주둔소의 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여전히 병명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감각을 잃고 얼굴에 반점 하나가 생겼을 때에 그의 병명은 밝혀졌습니다. 그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본인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때 리드선교사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을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생각해 왔던 문둥병 환자들과 이제야말로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녀는 인도로 다시 돌아와 과거에 그들에게 줄 수 없었던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며,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 때문에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굳게 했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1. 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 / 마 9:36-38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스코틀랜드에서 인도로 선교하기 위해서 갔었던 알랙산더 더프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평생을 인도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평생을 선교하고 나이 많아 선교를 마칠 때가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와 후임자를 모집했습니다. 인도에서 선교할 사람을 모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치고 다녀도 아무도 모집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는 결국 실신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와서 치료하고 다시 회복되어 일어나서 교회 목사님께 내가 하던 말을 다시 마치기를 원하니 다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빅토리아 여왕은 자원병을 모집할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은 이렇게 지원병이 없으니 이제 내가 죽어도 다시 인도로 가서 죽어야겠다고 호소를 했습니다. 이 때 많은 젊은이들이 헌신하고 인도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교회 역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가 다시 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운동이나 윤리, 도덕 교육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진짜 교회의 역할은 주님이 하시던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찬양이나 기도를 힘있게 하시면 육체에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크게 소리지르며 기도하면 창자나 배가 땡깁니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나 긍휼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자가 감정이 담긴 기관으로 여겼습니다. 바로 “민망히 여기시니” ejsplagcnivsqh(스플랑크논)라는 말은 창자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창자에서부터 올라오는 동정심이나 긍휼, 아픔 속에서 나오는 배가 땡기는 아픔을 말하는 것이 ‘민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무리를 보시고 이런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신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면 ‘민망’할 것이 없습니다. 배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아픔을 가진 긍휼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의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신 이유는 “목자 없는 양”같아서 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갈 길을 잃습니다. 좋은 꼴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이리가 와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해야할 책임 있는 지도자들(목자)이 삯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쫓았으며, 대접받기만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이 무리들은 목자가 없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고생하며” ejklelumevnoi(에크뤼메노이)의 원 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에서 온 말입니다. 양의 가죽을 벗길 때의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 속된 말에도 남의 것을 갈취 할 때 사용하는 표현 중에 ‘홀라당 벗겨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겨두는 것이 없이 모두 빼앗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양을 위해서 좋을 꼴을 먹여줘야 할 목자가 오히려 양의 가죽을 홀라당 벗겨먹는 것입니다.
“유리함이라”는 술에 만취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절망적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어린양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창자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느끼신 아픔 ‘민망’ 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이 지구촌의 사람들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아픔이 있을 때 우리는 선교할 수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37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는 때나 시기를 나타내고 있어 마13:49에서는 세상 끝과 그 때 있을 심판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의미보다는 영혼구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시던 2000년 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은 더 많습니다. KCM에서 발행한 2002년 세계선교지도에 보면 단일종교로 제일 많은 것은 이슬람으로 20.99%입니다. 개신교는 14.74%이며 카톨릭이 14.87%로 기독교를 약간 앞섭니다. 두 개신교와 카톨릭을 합하여 기독교로 볼 때 32.90%입니다. 물론 이 통계만을 가지고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인지는 잘 모릅니다. 유럽과 남미 등에서의 기독교는 이미 형식적으로 변화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6.78%이며 힌두교는 4.25%입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인구는 61억 정도 되는 것으로 봅니다.
세계기도정보 책자를 준비한 WEC의 패트릭존스톤과 함께 일한 제이슨의 보고에 의하면 가난한 나라일수록 인구밀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독립교회에서 급속히 증가추세를 보여왔고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영국성공회가 성장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선교사 분포를 보면 불행하게도 기독교 국가에서 73%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의 선교사만이 종족선교를 하고 있으며 8%의 선교사가 이슬람 지역에서 그리고 유대교와 힌두교를 위해서 1%씩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1.7%의 성도가 십일조를 하고 있으며 1%의 선교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 헌금 중 1.25%의 선교헌금이 미전도 지역 선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추수할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지요. 이들이 우리의 손길을,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에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대한민국도 선교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하지 않고는 앞으로 선교를 잘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한국은 개신 교인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25%이상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천주교 7%, 불교 23%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기타 종교는 1% 미만입니다. 무교가 47%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무교가 이렇게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찾아보세요. 단 5%가 무교인 나라가 있는지요.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 어떤 종교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타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도하면 그들이 종교를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무교보다 전도하여 결실을 맺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얼마나 전도하기 좋은 나리입니까? 제가 선교사 교육을 할 때 꼭 이 말을 합니다. 여기서, 한국에서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해외에 있다는 그 자체로 선교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심히 전도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합니다. 예수님 때는 세례요한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먼저 죽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추수를 방해하는 집단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꾼이 부족한 것입니다. 독속에 갇힌 계들이 살아 나오려고 올라오면 밑에서 다른 계들이 올라가는 계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져 같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한 마리도 못나옵니다. 하나님의 추수하는 일꾼은 희생합니다.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추수꾼 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해야 합니다.
38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직물공장에는 다음과 같은 불문율이 있습니다.
“실이 얽히면 무조건 공장장에게 보고하시오.”
어느 날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여공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 실이 얽혀버렸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풀려고 하면 할수록 실은 더 얽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공장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왜 즉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공장장의 질책에 그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공장장님, 저는 최선을 다해서 얽힌 실을 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장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공장장인 나에게 보고하는 일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부딪치는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의지대로만 행하려고 하면 더욱 풀기 힘든 실타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보고하고 맡기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을 것이 하러 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익어서 곡식을 거두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면 겨울이 됩니다. 이 때는 추수할 수 없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을 하다 보니 추수꾼이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추수하는 일꾼이 부족하면 어떡해야 합니까? 이 밭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주인에게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다 추수하지 못합니다. 일꾼이 더 있어야 합니다.
“보내어 주소서” o{pw” ejkbavlh/(호포스 에크발레)는 강제력이 동원된 말입니다. o{pw”(호포스)는 ‘어떻게 하든지’라는 말이며 ejkbavlh/(에크발레)는 ‘잡아 빼다, 쫓아내다, 내밀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하는 일터에 사람이 부족하니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을 더 빼내어서, 어떻게 하시든지 밭으로 일군을 더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야 합니다. 이 밭의 주인도 하나님이며 이 밭의 일꾼을 보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앙교회에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온 세상에 선교를 생각하면 더욱 일꾼이 부족합니다. 기도합시다. 일꾼을 보내달라고 한번 기도합시다.

추수는 감사한 것입니다.
일꾼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추수는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저는 우리 주앙교회가 이 기쁨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추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사는지 구약의 예레미야를 보면 압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13년(B.C. 627)에 활동한 선지자로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예언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예언 그 자체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예언을 하기 싫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이겠습니까? 단순히 멸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희 파괴됩니다. 예레미야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고 했습니다. 또 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레미야 8:1-3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종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 이 악한 족속의 남아 있는자, 무릇 내게 쫓겨 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들의 묘가 도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그 뼈들이 무덤에서 나와 굴러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차리라 죽는 것이 났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백성들 때문에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리 예레미야 7:16절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결심은 섰습니다.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직 예정대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일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릅니다.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실 때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시고 응답하실 뜻이 없으시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왜요.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죽어서 천국에 갔답니다. 그런데 창고하나가 있는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필요했던 물건이 그곳에 잔뜩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땅에서 기도하면 주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대답 하셨답니다.
우리가 청하는 분은 “주인에게 청하여”입니다. 주인이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일꾼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하기로 이름난 영국의 한 부부가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로 지원해서 훈련을 받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선교사부부는 열심히 배운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한 명의 결신 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친구가 선교하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선물로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것을 말했습니다. 부부는 똑 같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찬식에 필요한 각종 성구들을 보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찬식은 당장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꼭 우리 신디가 몇 달째 저렇게 있는 것하고 같겠지요. 그리고 몇 년 후 10년 동안 사역한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련해 두었던 성찬 기구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믿고 준비하면 때가 되면 추수하게 됩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추수하는 일꾼이 모이기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여 큰 교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수 없는 손길이 있으며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을 추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수하는 밭은 하나님의 밭입니다. 그러기에 일꾼 역시 하나님이 보내주셔야 합니다. 우리 주양교회에 하나님을 위해 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홉까지 복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0. 아홉까지 복②) /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 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물통을 가지고 왔고, 어떤 이는 밥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빈 병에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항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나? 나는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줬을 뿐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분들이 가져온 그릇만큼 담길 것입니다. 오늘 입을 크게 벌려 하나님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구 복 가운데 오늘은 다섯 번째 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70인 역에서는 ‘엘레오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사랑이라는 뜻의 ‘헤세드’와 ‘라하밈’의 ‘동정’이라는 뜻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종과 주인사이에, 또는 친지들 사이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라하밈’은 ‘렉헴(자궁)’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기 태를 찢고 나온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이 긍휼인 것입니다.
유명한 솔로몬 왕의 재판입니다. 한 어린 아기를 두고서 두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짐짓 칼을 가져오라고 분부합니다. 그 아이를 두 쪽으로 나누어 반쪽씩 가지라는 판결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진짜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락하밈”이라고 했습니다. “락하밈”을 개역성경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왕에게 그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우기는 여인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정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크리스천의 형제애로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긍휼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곧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출 33:19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의 간구하는 기도문중에 ‘긍휼’은 40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시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는 갈대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옷자락만 베고 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와 같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삼상 23:21절에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있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일 것입니다.
마 11:29절에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은 청결한 마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Gnoti Se Auton)”는 지혜의 철학이 나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뉴턴은 말하기를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변가의 모래 한줌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TV드라마에 보면 간혹 가정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여 두 집 살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또 더 좋은 조건과 또 사랑이 생기면 떠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히 10: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아멘.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영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출 19:21, 33:20, 삿 6:22).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고후 1: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하면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란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엡 2:14-18에 그 뜻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노벨(A.NOBEL)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이 다이나마이트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인류에게 공헌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벧은 이 무기의 두려움과 공포를 씻기 위하여 노벨상을 제정하여 인류 평화에 공헌한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는 헬라어 ‘뒤나미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능력’입니다. 진짜 능력은 파괴하는 살상 무기가 아니라, 폭력이 아니라 ‘화평’입니다.

예수리스도가 화평(평화)의 왕(사 9:6-7, 눅2:14, 요 14:27)입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는 일이 없다’(Broadus)고 했습니다.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문제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의”를 위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만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당하는 고통같이 보입니다. 구태여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민주주의를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고통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미국에 건너가 현대적 국가를 이룬 영국의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런 것이 다 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서 생기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70년대에 구로 공단에 일하러 올라온 시골 아가씨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80년대에 구로공단 지역의 한 교회에 전도사로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주일날 일하는 공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달 내내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 다니려면 쉬는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월급을 주일에 일하는 회사보다 절반밖에 받지 못하지만 직장을 옮겼던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축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복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이란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부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지막 아홉 번째의 복은 여덟 번째의 ‘의를 위하여’를 설명구로 보아 팔 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8번째의 복이 포괄적으로 ‘의’를 이야기했다면 9번째는 구체적으로 “나를 인하여”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인 것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축복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할 때는 부끄럽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는 아직 자유롭지 못해서 교회를 함부로 세울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세우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승인 받지 못한 중국교회 지도자가 일년에 한번씩 공안부에 끌려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얻어맞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해서 30-40명 모이면 지도자가 끌려가 매맞고 나오니까 교회가 다시 해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했는데 최근에 끌려갔다가 나왔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반신불수 상태가 되어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은 이제는 흩어지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50여명이 모두 모여 예배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절차가 없으면 교회 승인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본문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 제자들 보다 먼저 있었던 구약의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채찍을 맞았습니다(렘 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습니다(대하 24:21),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가 통치하는 기간에 톱으로 켜 죽었다고 합니다(Alford). 우리 나라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분들도 있고, 공산당에 불복하여 순교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쁨으로 순교하는 것을 자청하신 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편안한 상태에서 믿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영국의 천재 소설가 버나드 쇼의 외모는 추남으로 생겼지만 그의 천재성과 재치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탁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탁월한 사람일수록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버나드 쇼에게 악취미가 있었는데 조금만 심장에 이상이 있으면 자기 주치의를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치의가 와서 ‘이 정도 증상은 이렇게 하면 안정이 되니 저를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일러주어도 계속 주치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주치의도 자기 일할 시간을 많이 뺏겼답니다. 어느 날 주치의가 버나드 쇼에게 충격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꾸며 기절하니 침상에 누워있던 버나드 쇼가 벌떡 일어나서 의사를 깨우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적시고 자기의 심장병 약을 가져와 먹이고 간호를 한다고 들락날락 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구리 눈은 이상하리만큼 크고 높은 곳에 있습니다. 머리에 눈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잘 보이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주전자에 개구리를 집어놓고 물을 끓이기 시작하면 개구리는 너무 따뜻해지는 물에 그만 잠을 살살 잡니다. 자신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적이 오는 것을 보고 살길을 찾을 수 있는 개구리이지만 스스로 안주해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지구촌의 온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시다. 지금도 우리의 도움을 호소하는 손길을 잊지 맙시다. 마음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합시다. 두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일편단심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세상을 화평케 만드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가 가는 곳에 화평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도 고난이 와도 그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기쁨으로 이기십시오. 여러분에게 큰 상급이 있습니다. 아멘.
 

아홉까지 복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9. 아홉까지 복①) / 마 5:1-6. 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한국교회 성도를 보고 지나치게 축복신앙을 강조하고 또 믿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솔직해 집시다. 복을 싫어하십니까? 세상에 복을 싫어할 사람이나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복에 대한 강한 집착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복(福)자를 많은 곳에 보이게 새기고 장식했습니다. 어려서 수저에 福자가 새겨진 것을 사용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늘 복을 생각한 것입니다. 문을 나가고 들어올 때도 볼 수 있도록 문창이나 여름에 치는 발 같은 곳에도 예외 없이 福자를 새겼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오강에도 福자를 새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먹고사는 것, 정상적으로 배설하는 것이 모두가 복입니다.
상서(尙書)에 오복이란 수(壽 ; 오래 삶), 부(富 ; 많은 재물), 강녕(康寧 ;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유호덕(攸好德 ; 어진 덕을 닦음), 고종명(考終命 ; 하늘이 내린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보통 이(齒)가 5복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강녕’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도 오복 중에 하나여” 하는 말은 우리 몸의 대문 격인 입안이 건강하지 못해서야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이가 좋지 않아 그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가 튼튼하다는 것은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복에 대한 관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서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바로 산상보훈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9가지 복은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한때 인도의 국부로 불렀던 모한다스 간디를 사람들이 “마하터마”(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렀습니다만 그는 언제나 이 말을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위대한 인도의 아버지에게 어느 날 젊은 대학생이 방문하여 ”마하터마 간디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도 국민들이 잘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때 그가 “우리 인도 국민이 잘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늘 곁에 성경을 두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도독립을 위한 무저항운동이 바로 여기 산상보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천국시민의 성품과 삶에 대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천국백성은 이렇게 되어야하고 또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8복이 아니라 9복을 말씀하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산상보훈으로 팔복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복은 9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는 원문에 매 절 처음에 나타나는 단어로 makavrioi(마카리오이)로 ‘축복, 행복’이라는 복수입니다. 저는 복을 좋아해서 8복으로 말하기보다는 9복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복이 하나 빠지면 되겠습니까? 하나라도 더 받아야지요.
그러면 전통적으로 팔복으로 보는 이유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복의 구분을 하지 않고 11절은 10절의 설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를 9번으로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를 구분한 것입니다. 8번째 복은 “의”를 이야기했고, 11절은 “예수님을 위해서”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별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보려면 6절 “의에 주리고”와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상으로는 7개가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7가지로 보든 8가지로 보든 9가지로 보든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많은 것이 좋으니까 9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 개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6:20에서는 “가난한 자”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심령’(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영적인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가난’이라는 것은 마음부터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부자면 부자입니다. 그럼 그런 마음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서민들이 사용하는 말로 번역한다면 “마음이 거지(빈민)인 자는”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가난한 자”로만 기록한 것에 오히려 더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에 비해서 교만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기댈 곳에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들 때, 억울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오직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난은 오히려 제일 큰 축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8:1-2절에 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를 받고 환난과 많은 시련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드렸다고’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비운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다윗과 일행이 그일라에 있을 때 삼상 23:16-18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아버지 사울왕을 이어 왕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인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요나단은 마음이 가난한 자 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로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삼상 24장)의 굴에 있을 때 사울이 군사 3천과 함께 굴에 들어와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다윗은 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가 없었다면 다윗도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성경에 진짜 마음이 가난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권도 그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마음뿐이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 이 마음입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은 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흔히 ‘속상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속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상한 것이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아니면 나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나보다 더 빨리 승진했기 때문에 속상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속상한 것은 죄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사단의 방해가 속상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애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입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예레미야와 애가‘입니다. ’애가‘라는 말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비통의 감정을 말하는 ‘에카(ekah)’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백성은 포로 끌려갔습니다(B.C.587). 그래서 그는 5개의 애가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백성들이 사단의 하수인 노릇하는 것을 애통해야합니다.
이런 아픔이 우리에게 있으면 주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는 paraklhqhvsontai(파라칼레오)로 ‘곁으로(para)’와 ‘부른다(kalevw)’의 합성어입니다. 위로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의 곁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위로’입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이 눅 2:25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시기 위합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LXX)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있을 때에도 의로운 자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살피신다는 것을 굳데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사랑과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땅’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만 45회에 걸쳐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 특정 지역(4:15, 9:26), 하늘과 땅(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 9:6), 육지(14:24), 온 세상(12:40)로 나타나지만 본문의 땅은 창 15:18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축복의 약속의 땅입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는 인간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무엇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가 ‘의’에 있는 사람은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회적 관심을 위해서,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것도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세상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느 쪽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축복에 관한 것으로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로 보아 그 욕구가 충족됨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의’를 그토록 이루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신호 형제를 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지난번에 종엽이가 신호형제에게 ‘이번 박사학위 마치면 제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는데 신호형제 대답이 ‘나는 파키스탄을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선교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의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주앙교회를 부흥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꼭 필요한 교회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이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할렐루야-

사실 제가 구태여 8복이라고 하지 않고 9가지 복이라고 했지만 몇 개이든 간에 가만히 보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사실은 하나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곳에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길거리에 금발의 미녀가 헐레벌떡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쪽 가슴을 내어놓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급기야는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왔습니다. “당신은 지금 풍기 문란이오. 당신이 내놓은 왼쪽 가슴 노출 죄로 체포할 수 있소” 그러자 그 여인은 “오 마이 갓. 웨어 이즈 마이 베이비” 이 말을 경상도사투리로 바꾸면 “아이고 우짜꼬, 내 아이는 어디 갔노?”입니다. 내용인즉 그 여인은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버스가 내릴 때 서둘다가 아이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사람, 정신나간 사람은 생명의 주님을, 천국을 믿기만 하면 준다는데 가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곰을 잡으려면 곰이 다니는 길목에 큰돌을 달아놓으면 된답니다. 곰이 가다가 돌에 텅~하고 부딪히면 곰이 생각하기를 “예전에 없던 것인데” 하고는 다시 한번 텅~하고 부딪혀 봅니다. 곰은 더 큰 충격을 받게되고 머리가 얼얼해 집니다. 그러나 곰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텅~하고 부딪힙니다. 그러면 추는 더 멀리 나라 갔다가 돌아오며 곰의 머리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점점 세게 받습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단단한 곰의 머리라도 배겨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복을 곰처럼 머리로 들이받고만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예수님 말씀하신 복은 안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의에 주린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가 로마서 15:28-29에서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열매로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해 주는 것을 마치고 서바나(스페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해 주고 체포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를 2년 합니다. 그리고 죄수로 포송줄에 묶여 로마 감옥으로 호송됩니다. 그리고 그의 바램이었던 서바나(스페인)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가고자 했던 서바나가 이제 우리가 전해야할 땅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되어서 내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애통해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되어서 바울이 이루지 못했던 스바나(땅 끝)까지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의 삶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8. 제자의 삶) / 눅 12:22-3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목숨은 귀한 것입니다.
저희 집사람 친구 사모님이 있는데 이분이 얼마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누워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세상에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숨 앞에서는 다른 것이 없어서 불평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너무 사치스런 고민이요 문제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본문 23절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부정한 새로 말씀하셨습니다(레 11:15, 신14:14). 왜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까? 부정한 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까마귀를 돌보시는데, 하물며 이런 부정한 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일꾼들, 제자들을 위해 준비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74: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목숨이 귀한 것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목숨을 사용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22절 하반절에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5절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키’ hJlikiva(헬리키아)는 ‘키, 나이,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팔꿈치부터 손까지 말하는 한 규빗(창 6:15)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키를 이야기하지만 본문에서는 시간(시 39:5)의 개념으로 보아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우리의 생명을 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우리가 할 수 없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작은 일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들 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올해 일본에 태풍이 10여 개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지진 공포까지 겹쳐있습니다.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일본이지만 하나님이 바람한번 불고, 땅좀 흔들리게 하니까 아무 힘도 못씁니다. 하나님이 만일 태양을 조금만 더 쬐면 온도가 한 평균 20도만 더 올라가도 난리가 날겁니다. 반대로 해를 조금 물리거나 가려서 한 20도만 더 추워 지만 지구는 살아가기가 힘들어 질 겁니다. 하나님께 이런 일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입니다. 출애굽기 15:8에 홍해를 가르신 것의 표현이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콧김한번 불었더니 바다 물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채기 한 번하시면 지구가 마구 흔들릴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20:8-11에 보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징조를 보이라고 이사야에게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생각하기를 태양이 10도를 나아가는 것보다 뒤로 물러가는 것이 더 어렵겠다고 생각되어 물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기도하고 난 후에 태양은 10도를 물러갔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먹을 것에 대해서는 까마귀(새)로 비유했으며, 입을 것에 대해서는 백합화로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하십니다. 인간에 비하면 형편없는 가치를 가진 들풀의 꽃, 그리고 그 유한성이 있지만 그것이 살아있을 때는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더 귀하게 하나님이 보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망정 현재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우리들이 입을 것 때문에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대한민국 사람들은 먹고 입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40년 전쯤에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2004년 10월 22일 수출 2,000억 달러 넘어섰습니다. 금년 연말까지 하면 2,500억불쯤 한다고 합니다. 정확히 40년 전인 1964년에 1억 달러를 돌파하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출의 날로 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수출 1억 달러 목표를 할 수 있을까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년만에 1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가 된 것입니다. 지금 국민 소득이 1만 달러 정도인데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2만 달러가 되어야 한답니다. 그러면 수출은 4,000억 달러가 되어야 한답니다. 수출전선에 있는 분들 정말 고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작년 2003년 2월 10일 ‘케몬스 윌슨’이 90세에 세상을 떠나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난지 9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미국의 경제가 최악인 대 공황 때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어서 50불을 빌려 팝콘 장사를 해서 1,700불을 법니다. 이 돈으로 집을 구합니다. 그리고 집을 다시 담보로 돈을 빌려서 쥬크박스(노래방 같은 것)를 만들어 몇 년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해 망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낙담하고 죽기로 작심하고, 아내에게 “여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아직 당신은 한가지 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나는 당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케몬스 윌슨’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던 어느날 가족과 함께 워싱턴에 가서 값싼 호텔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호텔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그 때 그는 값싸고 좋은 호텔을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싼 호텔을 드디어 하나 구해서 영업에 들어갑니다. 그 때 그는 호텔의 3대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둘째. 십계명을 지킨다.
셋째. 손님을 활금율의 원칙에 따라 대접한다. 어린이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 정신으로 세계적인 홀리데인 호텔의 최고부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남의 이야기처럼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구촌에,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에 보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에는 한해에 28명씩 태어나고 10명은 죽습니다. 그 중에 3명은 굶어죽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는 이렇게 죽어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사는 유대는 그야말로 로마가 좋은 것, 먹는 것,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빼앗아가 전쟁물자로 사용했습니다. 유대지방에 남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자연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갈릴리바다는 이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어부라는 것은 아주 좋은 직업입니다. 왜냐하면 고기만 잡으면 그래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안식에 하지 못할 밀 이삭을 따먹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너무 행복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서 배부를 만큼 점심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에 비하면 오늘날 먹고, 입는 문제로 솔직히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나은 생활, 편리하고 고급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주님의 제자가 못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잘먹고 입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나아갑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1절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입니다. 물질적 관심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물질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축복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물질적 축복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중에 한 비행기 조종사는 비행 훈련을 받으면서 교관으로부터 비행의 기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7. 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 눅 11:42-52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카톨릭의 이른바 면죄증(免罪證)에 대한 95개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그교회 정문에 마틴 루터가 붙임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날입니다. 현재 우리 개신교회가 로마카톨릭과 구분하여 지켜오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제일 큰 종교개혁을 주도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에센파, 사두개파, 바리새인(파리사이오이파)) 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신앙노선은 에센파의 숙명론과 사두개파의 자유 선택적 입장의 중간 노선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을 6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개혁한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도 예수님이 지적한 6가지 문제에 모두 걸려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지독한 욕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질러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독일 나치 같다고 한다든지, 한국에서는 일본인을 비하하는 ‘쪽발이’ 같다든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치욕스런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과오를 저질렀던 바리새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재점검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바리새파 사람이나 로마카톨릭의 잘못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하면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섯 가지 잘못을 지적하실 때 “화 있을찐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저주나 복수의 말이 아니라 oujai(우아이)라는 ‘슬픔의 탄성’ 소리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탄성을 하셨겠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뜻이 ‘분리’입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 카톨릭보다 잘 믿겠다고, 바르게 하겠다고 분리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보다 못하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바리새인을 보고 탄식을 질렀던 oujai(우아이) ‘화 있을찐저’라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이 탄성의 소리는 안타까움에 대한 소리입니다. 슬픔의 소리입니다. 우리를 보고 이 탄식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마음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화(외형적 신앙)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언 듯 보아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 잘못이지 십일조를 이렇게 잘 구분하여 드리는 신앙이 잘못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곡식, 포도주, 기름 같은 주요 농산물은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7:30-33, 신 14:22-29). 그리고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드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만 드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공의와 사랑”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사람들은 자주색에 가까운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국 시내 버스의 색이 빨간 색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빨간색을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체통입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해서 빨간색이 아닌 녹색을 우체통에 칠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체통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시 빨간색으로 칠했다고 합니다.
만일 여자들의 립스틱이 빨간 색이 아니라 녹색으로 칠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쳐다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빨간색이냐 녹색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편지를 넣는 우체통이라는 것과 그 입술이 빨가냐 녹색이냐 보다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일 것입니다. 전통과 습관은 때로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정한 규범들이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으면 안됩니다. 따라합시다. “형식에 빠져서 진실을 잃지 말자” 아멘.

두 번째 화(명예욕과 교만)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교권적 교만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변화 가운데 제일 반길만한 것은 예전에 교회 강대상 뒤에 높은 나무의자가 죽~ 놓여져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이 없어져서 좋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높은 단상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충실히 하기보다는 외적인 자리에 탐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늘 뒤에 성령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시고 인사하고 설교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주님이 바로 뒤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지키려는 것이지 그분의 이름을, 능력을 통해서 내가 높아지려면 잘못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입니다. 바리새인이 종교 지도자로서 문안 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사 받을 수 있도록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지적하셨습니까? 자신들은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Noke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위(胃)와 같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음식으로 그것을 채우느냐가 아니라, 안에 들어있는 음식을 얼마나 소화시키느냐가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회의가 있어서 목사님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오시고 다른 많은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긴 테이블인데 가운데 자리에 김삼환 목사님 자리만 따로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제가 왜 그곳에 앉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더 연장하신 분들도 있고, 목회의 선배로 생각할 수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김삼환 목사님은 그 자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주 대접을 받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생기고 당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의 목회철학입니다. “우리에게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세 번째 화(자신의 잘못을 은폐)
세 번째로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을 만들면 그곳에 표시를 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서 그곳을 밟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민수기 19장 16절에 보면 무덤에 닿으면 7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평토장한 무덤인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저는 오늘 로마카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설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들의 잘못으로부터 개신교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래새인이 안되려면 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태(마 23:27)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마태역시 외적 치장에만 열을 올리는 바리새인을 표현해 결국은 이 또 한 진실을 은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무덤에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까? 말라는 것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은 무덤일 뿐입니다. 그것에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습니다. 즉 나 자신 그대로를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결국 신앙적으로 포장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주앙교회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 않은 것을 한 것처럼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없는 시설을 있는 것처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포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한 신사가 길을 걸어가다가 맹인소녀가 동전 통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것이 불쌍하게 생각돼 지갑에서 1만원 짜리 지폐 1장을 꺼내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큰 액수에 놀라는 눈치로 지폐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6.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눅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틴 마틴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창 청년 때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들도 좋아하고 본인들도 좋아하여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첫아이도 낳기 전에 병들어 손도 써볼 여유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앞에서 울고 울다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아버지가 볼 때에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밤새도록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없이 어디론가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왔습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서있는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뛰쳐나갈 때 아버지가 뒤 좇아 온 것입니다. 구경하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붙잡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없이 묵묵하게 밤새도록 아들의 뒤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돌봐 주십니다. 우리가 정신없는 지경에 이르러도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따라와서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광경이 나타납니다. 누가는 죽은 사람이 12절에서 ‘그 어미의 독자’, ‘어미는 과부’라고 설명해 줍니다. 독자인 아들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이 여인에게 더 이상의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여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남고 말았습니다. 로마 압제하에 있던 이 당시의 여자들은 자기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면서 꿋꿋하게 살던 이 여인은 외로움과 슬픔 이외에도 혈통이 단절되어 혼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늘 한숨을 짓는 사람을 일컬어 ‘젊은 과부 한숨 쉬듯’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만큼 과부로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
성경은 과부에 대해서 특별히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슥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외식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또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2-44)
약 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은 과부의 독자가 죽은 딱한 사정을 그의 슬피 우는 울음소리를 통해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소리는 예수님만 들은 것이 아니며 예수님과 함께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리와 장례무리와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나타난 병고침이나 신유의 은사들의 대부분은 병자 자신이나 부모, 친인척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실 때는 누가 요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과 부딪힌 장례무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모두 그 원동력은 사랑이었습니다(마 14:14, 20:34). “불쌍히 여기사”의 원문 splagcnivzomai(스프랑크니조마이)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열정적 아픔’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측은히 여기시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괘씸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어려운 것 같으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눅 4:25-26에서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면 무조건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과부만 보면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악한 사람은 바로 그 과부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8:4-5 비유 중에서 “4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평소 관심이 과부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과부들의 사정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제일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독자가 죽은 나인성 과부의 울부짖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그의 아들을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함께 한 두 무리들에게는 돌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데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레 22:4, 민 19:11). 예수님의 이런 행동으로 상여를 메고 가던 자들이 멈춰 섰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은 세마포로 싼 시체에 뚜껑 없는 관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굴 같은 곳에 시체를 같다놓기 때문에 관은 이동할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시체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이외에 두 사람을 더 살리신 기사가 나오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눅 8:40-56)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요 11:17:44)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 밖에서 명령만 하셨습니다. 오늘 과부의 독자는 관(시체)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으로 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은 사랑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 되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외에 성경은 몇 번의 사건을 더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신 것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간곡히 부르짖었습니다(왕상 17:17-24).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시체 위에 거듭 엎드렸습니다(왕하 4:32-37).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체 앞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행 9:36-43).
죽은 자를 살릴 때 예수님과 선지자(엘리야, 엘리사)나 제자(베드로)의 방법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일어나라’ ejgeivrw(에게이로)고만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선지자나 제자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말합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죽은 시체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신 분으로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메시야 곧 하나님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롬 8:2, 고후 1:10, 딤후 1:10).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2:19, 요 24:36-49).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이란 싶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과부의 아들과 아이로의 딸과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과 아울러 자신도 부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 된 세상의 죽음에 지배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죽음이 지배할 수 없기에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또 언젠가는 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영생을 소유하려면 나인 성의 과부도 이제부터는 아들 제일 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들이 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어야 합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지금 살리시기 때문에 울지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여인이 또 울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장 불행한 경우의 반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살아나면서 제일 행복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아들만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 축복이 주어진 사람이 물질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에 샤르황제가 세상에서 도대체 행복한 사람 그것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그 당시 시인으로 굉장히 명성이 높은 따소라고 하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따소가 황제 앞에 섰습니다. “내가 한가지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거야 하나님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화가나서 “이 사람아, 내가 하나님을 물었나?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란 말이오” 이번에도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 않고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뻔한건가?” “가장 행복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샤르황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이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 같은 일에 참여할 수도 있고 목도 할 수도 있고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동행의 은혜가 즉 그런 체험의 은혜가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살리셨으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자식이 죽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와 현재 함께 할 수 있는 자녀를, 남편을, 아내를, 부모님을 보내주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혹 아무도 없어도 욥과 같이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의 길

예수님의 생애(15. 제자의 길) / 마 8:18-22, 눅 9:57-6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는 아무 교회에서나 아무에게나 편하게 할 수 있는 설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즉 수준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는 모두가 예수의 제자되는 교회이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더라.” 11장 24절에 보면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리”란 초대교회 당시,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는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신자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5장 14절에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사람’이란 ‘신자’를 말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고 신앙고백하는 신앙 인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험과 고통 중에서도 신앙의 변화가 없이 꾸준하게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보다 더 좋은 신앙인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인 ‘제자’입니다. ‘제자’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동거동락하며,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와 함께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과 권세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막3;13-15).
신약성경에서는 “제자”라는 명사가 265번, “제자가 된다”는 동사가 25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 또는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같이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나오는 사람입니다. 병고침, 베고픔, 출세를 위해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일 자신이 아프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으면 주님께 나오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출세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출세하지 못했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지 못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완장’이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완장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완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큰 벼슬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주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번을 하면 완장을 찹니다. 어린 마음에 그 완장이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공산당의 당 간부들은 붉은 완장을 찹니다. 그 완장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봉사의 완장이라는 의미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권위의 완장입니다. 겉에 보이는 완장만 차지 않았지 교회에 나오면서 이러한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앙교회야 개척 1년 된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분들이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주님이 인기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려는 사람들입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그랬습니다. 지금 주님의 인기는 매우 높습니다. 본문 8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8장에서만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은 ① 2-4절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② 5-13절 백부장의 간청으로 그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③ 14-15절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④ 16절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입니다. 함께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어깨는 상당히 우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나온 사람 둘이 있습니다. 물론 밀고 댕기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라고 소개됩니다. 이로 보아 ‘서기관’으로 소개된 이 사람 역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가 처음에 나온 “제자”이고 본문이 두 번째 “제자”라고 나타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이제부터 가르치시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성숙된 믿음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쫓으라
이 서기관은 예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좇으리이다’ 원문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이든지’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믿었던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다음에 믿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리 믿어 가지고 그 오랜 시간 교회에 다니면서 시간 없애고 돈 없애고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참 머리가 좋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온다 해도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이란 그렇게 계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의 현재형은 과거와 미래를 담보한 현재형입니다.
“좇으리이다”의 ajkolouqhvsw(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인기 절정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이 제자는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한 고백은 잘못은 아니지만 상당히 자기 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제자가 되어 따라 가야하는 참 길을 설명하십니다.

모 대학교수가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특별히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 조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조사를 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착하다. 선하다. 진실하다, 상냥하다, 친밀감이 간다. 성실하다, 친절하다 등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에 출석을 강요해서 싫다. 말이 많다. 위선적이다. 잘난척한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등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이 많다라는 뜻은 정말 말이 많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말이 있는 만큼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고 말이 많으면 말 많다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행위가 없으면 자연히 말만 남게 되고, 그러니까 말이 많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태국 콰이강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동남아를 모두 점령하려는 전략 가운데 가장 큰 계획으로 군사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를 이용, 콰이강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은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영국 포로들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하라. 만일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가 총살이다. 하나, 둘… 셋”을 외치려는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숨겼습니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즉석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포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본군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그곳에 잘 간수해놓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
서기관이었던 제자의 고백에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제자 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절한 것으로 굳힐만한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될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우의 굴이나 새의 거처는 잠시 지낼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처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정은 같았습니다. 그분의 일생이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 같은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 만드신 기적,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면 얼마든지 집 한 채나, 서당 같은 것을 만들어 ‘가말리엘’보다 유대 랍비들의 집보다는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실 수 있었을 텐데… 서점에 가보면 10억 만들기, 10년 안에 집 마련하기 등 부동산 관련 책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실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이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안식처나 부귀 영화를 위해서, 인기를 얻으시려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욕심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것과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때로는 고난과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세상의 잣대로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는 지상의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기뻐하는 교회라면 다시 한번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이 둘이서 깊은 시내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 한 청년이 다리 밑을 보니까 강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을 자꾸 내려다보면 그 청년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위를 봐! 하늘을 봐!”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여러 장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지마는 위를 바라보고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자의 우선 순위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두 번째 제자가 부탁했습니다. 자식으로서의 ‘효’와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전도여행 가시는데 이 제자의 집에 부친이 죽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다 그가 죽으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지의 의미는 문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모를 모시는 것은 제5계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출 20:12, 신27:16). 부모를 공양해야 하는 것이나 죽어서 장례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모두 최고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이든지 복음전도 사역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 유교에서는 국가의 충신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만큼 효를 강조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공무원이나 군인은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나라의 급한 일이 있으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충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어찌 한 나라에 충성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오늘날은 학생이 영어를 배운다면 영어만 배우면 그만입니다. 선생의 성품이나 가정생활 또는 그 분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어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에서는 독본이 따로 없으며 그 랍비의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랍비 자신 전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고, 절대 수락하고, 절대 신뢰하고 절대 신앙하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이 뜻의 좋은 격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죄짐을 의미하거나 매고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멍에는 내가 당하는 모든 일, 내가지는 십자가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과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골방에서 명상이나 하며 책이나 참고하면서 예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나와 함께 가면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따르면서, 본받으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복음서 속의 복음

예수님의 생애(14. 복음서 속의 복음)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까지 제가 설교할 때 본문의 말씀이 비교적 길었던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최대한 성경 본문 안에서 설교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둘째는 성경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시키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딱 한 절입니다. 그것도 우리모두가 외우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Luther)는 이 말씀을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한 절에 모든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①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 ② 방법은 독생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③ 범위는 누구든지 ④ 목적은 영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토록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한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다름 아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다른 설명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랑을 5살 때인가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믿지 않으시는 눈친데 고백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5-6살 때인가 우리 집 뒤에 사는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아빠가 목수이셔서 나무를 켜고 문짝 같은 것을 만들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나무 조각이 많은데 저는 그것을 가지고 놀기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막대 달린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먹으려고 천천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에요. 제 사탕을 먹고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 아빠에게 신세진 것도 있고 해서 사탕을 빨다말고 ‘너 먹어, 그런데 조금만 빨다 도로 줘야해’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얼른 받아 빨아먹었습니다. 그 애는 조금이라도 더 빨아먹으려고 쭉쭉 빠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불안했습니다. 사탕이 자꾸만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며 ‘야 이제 줘’하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 애는 아주 주지 않을 눈치였습니다. 이제 사정은 내가 다급해 졌습니다. 그 때 그애 엄마가 ‘밥 먹어야지’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애는 사탕을 그제 서야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나무막대기가 다 나온 사탕을 돌려 받았습니다. 저는 이때 사탕(사랑)을 주면 아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
테일러 스미스(Taylor Smith)목사는 기독교의 핵심은 다음 세 문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God is),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kovsmo”(코스모스)인데 원어에서 이 용어는 죄로 물든 타락한세상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 4:8)입니다. “천하 만국”으로 번역된 것이 ‘코스모스’입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눅 11:50)의 “세대”에 원문에는 ‘코스모스’ 단어가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의 “세상”역시 ‘코스모스’입니다.
구원의 대상은 아담이후로 죄악이 물든 이 땅의 모든 사람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러나 나로 볼 때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나 개인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세상을’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이영제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원문의 ‘세상’ kovsmon(코스몬)에서는 명사. 주격, 남성형, 단수로 나옵니다. 복수가 아닌 단수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단 하나다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오직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 제일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는 불필요하다는 느낌과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29명을 살해한 시대의 살인마로 불리는 유영철씨(34)가 최근에 구치소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는 유가족에게 남긴 편지에서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유영철씨는 경찰 조사 등에 따르면 유씨는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14살 무렵 아버지가 간질환으로 사망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공고 2학년 재학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됐다. 학교는 이때 접었고, 이후 사회에 진출해 갖가지 직업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21살 때(99년) 마사지 안마사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무려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 범행을 저질러 10여년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2002년 전주교도소 수감 중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 이혼을 당했습니다. 지난해 6월 만기 출소한 유씨는 전화방을 통해 알게 된 여인과 교제했으나 전과자와 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절교당했습니다.
경찰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과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사회와 여성에 대한 혐오증을 키워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이 부자들 때문이며, 여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부유한 사람과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 살해 동기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께 불필요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유영철씨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이러한 끔찍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가 예수 믿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 받게 하는 것’입니다. 정종엽이 생일이 조금 지났는데 늦게 안 누나들이 옷을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못 받아 본 옷 선물을 받아서 좋겠네’ 그랬더니 종엽이가 하는 말 ‘저도 누나들 생일에 다시 돌려줘야 하는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돈이 있다고 내 것을 내가 사면 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담긴 선물이기 때문에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삽니다.
-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민섭 작사, 작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소요리문답에 보면 1번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습니다.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고전10:31, 롬11:36)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시73:25, 요17:22-24)”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과 하는 말 중에서 ‘여기서 산다는 것이 선교입니다’라고 하곤 합니다. 여러분! 힘드시죠. 우리(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열심히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선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에서 더 좋은 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곧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사랑하면 주고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이것은 사랑의 성질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려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고싶은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랑은 저절로 주고 싶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좀 치사하지만 밤 먹는데 맛있는 반찬 더 먹는 것도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먹으면 좀더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먹는 모습이 줄줄 흘리고 먹어도 보기 좋습니다.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자체가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합니다. 데가볼리의 거라사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돼지를 기르면서 좀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좇아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딱 하나만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어떠한 행복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우리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금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모든 시민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였습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그만 에이즈(AIDS)에 걸리고만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이제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너무나 밝게 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레이건 대통령, 또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부 부동산 업자,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선물도 주고 위로하며 관심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라이언은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살에 죽었습니다.
이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 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
우리는 평생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즉 공은 우리에게 넘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냐 믿지 않느냐의 결정 그것은 우리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결정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아마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교회에 오셨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땡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남편과 아이들 잘 되게 해 달라고, 물질 축복이나 더 받아보려고, 병이나 나아보려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구원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들어오는 자에게 주실 선물을 잔뜩 싸놓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우리는 좀 단순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하신 분은 죄송하지만 예수 믿기가 힘듭니다. 따지고 따져도 물론 하나님께 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라고 했습니다. 세상 똑똑하게 산다고 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제일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헛 똑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가 벽에 휘갈겨 놓은 글씨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글을 조지 베벌리 세아(George Beverly Shea)라는 가수가 곡을 붙어 노래해서 유명해졌습니다.
4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제일 좋은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위대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주로 받아들일 때 이야기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영원한 집은 이제 막 짓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어져 있습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접을 받습니다. 베트남의 정영식형제가 있습니다. 영사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국빈으로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이 올 때 만 공항에 나와 영접합니다. 그런데 제가 베트남에 가니까 영사관 출입증을 달고 공항 안에까지 영접을 나왔습니다. 정씨 집안이 인사 잘하지 않습니까? 90도 각도로 공항에서 몸을 굽혀 인사합니다. 솔직히 이 기분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모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님은 천군 천사를 대동하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접을 반드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