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3.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1, 계19: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도 보냈었고, 왕도 세웠었고, 예언자도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다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최종적으로 친히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즉 종으로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전에 마지막으로 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서서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을 받고 왔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제사장, 선지자, 왕, 예언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역할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왔던 이분들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켜 제퍼슨은 ‘만일 하나님의 거룩한 도서관이 되어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서 없어지는 날이면 우리는 가장 불행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또 앤드류 잭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서 있다’고 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모든 영토는 버릴지라도 성서는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만 전해주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친히 그의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한 말을 자신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을 지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표현하기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고 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운동경기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렇게 하니까 안되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운동선수는 “그럼 네가 해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가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김장환목사님의 아들 중에 김요셉목사라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서 학교에 가면 혼혈아라고 놀려주니까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아버지보고 미국학교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는 한국 놈인데 왜 미국학교에 가려고 하느냐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결혼문제를 놓고도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고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Korean-American 신부를 얻어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아서 이름을 성경적인 이름으로 지어보려고 애썼는데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다가 에베소서 6장에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읽다가 순종으로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들이 어떻게 순종이냐 잡종이지!’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는 것입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 재물이 되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대요.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러면 그 동안 많은 선지자, 왕, 예언자들이 왔는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그들의 어깨가 으쓱했지요. 얼마나 신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로 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와서 얼마나 좋습니까? 암행어사가 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암행어사가 섬기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벌주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러 온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결코 암행어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잘못을 찾아서 벌을 주러 오셨다면, 또한 그것을 지적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만 했다면 그 전에 왔던 선지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 분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말씀의 핵심
예수님이 전한 말씀이 왜 복음입니까? 한마디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소망이 없는 구제불능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유에서일까요. 어느 나라에서나 꽃과 풀은 아름다운 전설과 이름을 따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밤에 피는 ‘달맞이꽃’을 토속어로는 ‘도둑놈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잠든 밤에 피는 것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자식 이름을 딴 ‘봉선화’나 ‘옥잠화’ 같은 것은 그런 대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 된 꽃 이름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여우오줌’, ‘쥐오줌풀’, ‘코딱지나물’ 이것도 모자라 ‘개불알꽃’, ‘홀아비X’ 등이다. 외국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의 꽃 이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한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꽃’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음을 삭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 어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냉동 창고 회사에서 어느 경비직원이 3교대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 순찰을 돌던 중 엄청나게 큰 냉동 창고들 중에 한 창고의 문에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한 그는 급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창고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만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대형 냉동 창고의 문은 밖에서만 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갇히고 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냉동실의 온도가 떨어지고 몸은 추워오고 산소가 부족해져서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날것같이 생각되었지만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음 근무를 교대하러 온 경비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여느 때처럼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경비는 한 고장난 냉동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장난 냉동고 안에는 얼어죽은 동료 경비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고장난 냉동실 안에서 사람이 얼어죽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시체를 부검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죽여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리고 공기가 부족할리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산소부족으로 죽은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정신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냉동실이 고장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경비는 스스로 온도가 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밀폐되어 있는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공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정말로 그를 얼어죽게 하였고 질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정신적인 세계가 무서운 것임을 이 사실로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은 이렇게 자포자기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주님께서 내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망설이는 자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저는 하도 못하는 집에서 살아서 조금 잘사는 집 사람의 아이들만 봐도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요. 옛날에 시골에서 잔칫집, 초상집, 제사지내는 집에서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떡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권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옆에서 떡 하나 더 가져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동쪽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주위 친구들은 놀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들이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하고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살 되었을 때, 교회 젊은 목사가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벤 후퍼는 새로온 목사님을 보고 싶어 교회에 갔습니다. 가끔 교회에 가도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가 마치기 전에 살짝 빠져나오고 했는데 이 날은 설교에 빠져서 그만 넋을 잃고 있다가 사람들과 함께 나오게 되었는데 벤 후퍼를 본적이 없는 목사는 “네가 누구의 아들이더라?”하고 말했습니다. 순간 주위의 분위기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 벤 후퍼는 도망가듯이 뛰어나갔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 “나는 네가 누군지 안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주변 사람들은 더 얼굴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맞아 너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답게 휼륭하게 살아야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재선되는 영애도 누렸습니다. 벤 후퍼는 말하기를 “내가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러 왔다는 이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무엇을 전파합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줌마들이 모이면 전파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누구누구는 어땠드라 하면서 안 좋은 일들을 들추어 내어 전파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은 그들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이 말씀을 전파할 것을 받고 오신 분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그리고 이 명령을 실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