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1.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9-17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 다음 것들이 선발되었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동정이 쌓여서 옷을 입고 있는 것”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은 시계” 하지만 1등은 다음의 글이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저는 자신 있게 그분에게 “행복한 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세상 친구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에 조건을 따져서 사귑니다. 학력, 나이, 지역, 수준 등을 봅니다. 여자들은 외모도 중시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조금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잘 생긴 친구를 사귀어 자신의 품격을 조금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친구로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금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못생긴 분을 친구로 사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다니면서 그 친구보다 자신이 조금 잘 생긴 것을 뽑낸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친구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낮추어 선택하고 친구를 고를 때는 한 계단 올려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 말이 수긍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탈무드의 이 이야기를 지키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친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탈무드에는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대하기 힘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를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작고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느 핸가 케네디 대통령의 조찬 초대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조반 한끼 먹으러 멀리 워싱턴까지 갈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 초대라면 대개는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라도 달려가리라고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는커녕 오지 말라고 하여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기 때문에 비서들은 골치를 앓습니다. 사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목사님들 가운데도 자기의 권위를 위해 대통령이나 시장을 한번 만나기 애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고 고백하는 분은 정말 행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를 소개해 드립니다. 타이완 기독교가 2000년대 표어로 내걸은 것이 “제일 좋은 친구 예수” 또는 “최고의 친구 예수”였습니다. 우리의 제일 좋은 친구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친구는 솔직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그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으며, 그 친구의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하라. 자기가 들은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은 대단히 참기 어렵다. 성경의 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자는 가까운 친구를 잃는다.’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 당신의 입은 금고이다. 금고는 쉽게 자주 열면 안 된다. 입을 금고에 비유라면, 열릴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금고일수록 정교하고 좋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좋지 않은 친구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는 속된말로 입싼 친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친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을 보면 압니까? 말(언어)입니다. 잘 되는 집, 잘 되는 나라는 말하는 것 보면 다릅니다. 요즘 한국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화끈하게’라는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 다짐을 할 때는 더 무섭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라는 말과 ‘나라가 반쪽이 나도’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반쪽이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은 창의성을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다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양의와 한의가 다릅니다. 양의는 “약을 싸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의는 “한 첩이면 끝납니다.”라는 말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TV에 보니 홈쇼핑 채널의 PD와 몇 사람이 고발을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건강약품을 소개하는데 바르기만 하면 채 지방이 빠져 살을 쉽게 뺀다는 광고였습니다. 저도 그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연애 인들이 나와서 홍보를 하니 그 말을 쉽게 믿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 사람 참 순진한데 가 많습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친구 될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 남한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 교육하는데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TV광고도 홍보책자도 그리고 쉽게 친구인척하고 접근하는 사람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었다가는 하루아침에 정착금 다 날리고 노숙자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기를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삽니까?”라고 말할 때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적인 친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5절 하반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밀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친구로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입니다. 제일 좋은 친구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권세를 친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그의 친구 모두에게 동등하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장이나 신분증조차도 남에게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권세를 마음대로 이용하여 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쫓을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대통령이름 잘못사용하면 붙잡혀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까?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귀한 친구는 없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그 귀한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그 이름을 빛내는 예수의 친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친구는 목숨을 내어줍니다.

한 소년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시골에 다니러 왔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며 뛰어 놀던 그 소년은 어느 날 호수에서 헤엄을 치다가 발에 쥐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그 호수를 지나던 한 농부의 아들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헤엄을 아주 잘하는 편은 못 되어서 그를 구해낼 수가 없었지만 자기라도 구하지 않으면 물에 빠진 소년이 영락없이 죽게 되니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그 후 그들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방학 때만 되면 도시 소년은 늘 시골에 와 그 친구와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 놀러온 소년이 생명의 은인에게 장래의 희망을 물었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무얼 할 생각이니?”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집안사정을 뻔히 아니 가망 없는 꿈이 되고 말 것 같아.“ 그러자 친구는
“내가 우리 부모님과 상의해 볼게. 부모님도 승낙하실 거야” 시골 소년은 도시 소년의 도움으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골 소년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으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플레밍이 구해 주었던 도시 소년도 크게 장성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폐렴으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은 폐렴의 특효약이었습니다. 결국 플레밍은 그 소년을 두 번 살린 셈이 되었습니다.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 낮 예배에 설교하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것은 곧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 누가 이토록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시고 몸소 실천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조금도 우리의 자존심을 꺽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구제불능’이라든지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든지 ‘누굴 닮아서 그러니’라는 말은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나의 자랑스런 나의 친구야’,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강한 부정의 내용도 긍정문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 19:24절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입니다. 우리가 하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려우니라”로 되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국어 선생님이 한문도 함께 가리키고 있었는데 창문너머로 첫 눈이 오는 것입니다. 여 선생님은 모른 척 하고 계속해서 “공부해야지” 하면서 책을 폈습니다. 속으로는 아마 이 선생님도 공부는 그만하고 밖에 나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문학적 소질이 있는 한 학생이 “선생님 첫 눈에 반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저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학생들은 모두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차갑습니다. 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을 냉혈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무례(無禮)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사랑은 예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 예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 그것은 작은 불씨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을 하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사랑의 불씨가 붙으면 막을 수는 없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계명을 지켜야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는 조건을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에 “내가 이것을 명함은 너희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친구가 되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믿고 머리로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 몸으로, 생활로 드려야 합니다. “행하면”은 원어로는 “계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주안디옥교회(이동휘목사)가 저희 KCM을 후원합니다. 이 교회의 작년 선교비 총 지출액이 30억이 넘었습니다. 성도는 3000여명입니다. 계산을 해보니 성도 한 분이 1년에 1백 만원의 선교헌금을 한 샘입니다. 그리고 ‘좀도리’운동이라고 저금통을 모았다 헌금하는 것인데 작년이 이것만 1천 만원이 넘게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들의 가정의 저금통까지 싹쓸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누구를 주겠습니까?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의 책에 보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그 중에 한 명은 죽는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중 7명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면 100명중 2명에 드는 겁니다.
우리돈 2만원 정도면 5-6명의 한 가정을 한달 간 먹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팔리지 않아 버리는 음식만 모아도 현재 구호하는 전세계식량의 70%가 됩니다. 아마 한국과 일본 것만 모아도 세계의 굶어죽는 어린이는 먹여 살릴지 모릅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28명씩 태어나고 10명이 죽습니다. 그 중 3명은 굶어죽고, 1명은 암으로 죽습니다. 2명은 첫돌이 되기 전에 죽습니다.
그리고 100명중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정신호 선교사님이 우르드어로 성경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우르드어는 58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서 펀잡어는 3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이들 중에 글을 아는 아들은 10명중 2-3명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려주려고 녹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개척한지 원년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해외선교비로는 월 15만원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KCM의 사무실을 운영해 가니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10여명이니까 안디옥교회 수준으로 하면 1천 만원을 선교비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월 100만원은 선교비로 지출해야 합니다. 일단 제가 기본적인 운영이 될 동안 사례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내 것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이요 선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