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3. 일하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요 5:2-18

우리말에 “일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욕에 가까운 말로 사용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전에 어렵게 살 때는 일만 시켜주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놈” 이것도 욕입니다. 하는 일이 없어 빈둥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원래 일을 하기 싫은 민족이 아니라 일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한국의 30-40대 남자가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노동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민족도 보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일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지겨운 일에 대해서 왜 또 말씀하시나 그렇게도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보통 일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머리 속에 두 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 있고 하기 좋은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하기 싫은 일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힘든 일 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로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16에서 여자는 “수고하여야 자식을 낳을 것이며” 17절에 남자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수고’는 히브리어 에쩨브(bx,[,)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즉 일을 할 때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인 것입니다. 힘든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은 죄의 대가입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는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노동의 시간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출 31:15)고 했습니다. 칠일 중에 하루는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루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거꾸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하실 뻔했습니까? ‘하루만 너희들을 위해서 쓰고 육일을 나에게 바쳐라’하셨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시간을 가지고는 충분히 먹고 쓸 것을 벌지 못합니다’ 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데모라도 했을 것입니다. 십일조의 개념은 어떻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구는 내 것이라고 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인데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시간을 충분히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쉰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 죄의 대가로 주어진 노동의 시간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축복의 날이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의 대가로 일이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일하도록 임명하셨습니다(창 2:15).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고통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죄의 대가로 해야 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고통이 없는 반면에 나를 위한 일에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고통이 없습니까?’ 다시 묻는다면 ‘그렇습니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일에 싸움이 일어나고 시험이 드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지 아니한 죄인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립니다.
요 5:2에서부터 보시면 예루살렘성전의 양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양과 염소 같은 동물을 들여보내는 문입니다. 바로 이문 옆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행각 다섯 채가 있었습니다. 이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파도가 치면서 움직이는데 그 때를 기다렸다가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러니 이 연못 주위에는 당연히 어떤 병자를 막론하고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물이 움직이는 것 같으면 재빨리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타까운 병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38년이나 병을 앓고있던 사람으로 연못의 물이 움직인다해도 일어날수가 없어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한눈에 이 사람의 처지를 알아보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연못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병이 나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나무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통이 굳어져 내려와 일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질책하려고 찾았으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슬쩍 피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이 사람을 성전에서 다시 만나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대가로 주어진 고통스런 노동, 하기 싫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축복의 일을 기쁨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날입니다.

우리말 가운데는 동사 어간에 ‘음’이 붙어 명사가 된 것이 많습니다. ‘얼음’은 ‘얼다’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은 ‘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노름’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놀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되었습니까? 유교의 영향도 컸지만 그만큼 ‘노는 것’이 죄악시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솔직해 집시다. 놀기를 원하시죠? 자 보세요 대답을 쉽게 못하시잖아요. 우리는 일과 노는 것과 놀음에 대해서 구분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레저’란 말이 ‘일한다’는 것 못지 않게 중시되어 왔습니다. 건전한 오락은 일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죄악시하면서 음성적인 문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된 것이고 건전한 오락이 발전을 못했습니다. 서양의 레크리에이션이란 말은 노름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개념이 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은 ‘재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한다는 것과 무조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신 일은 ‘재창조’ 레크리에이션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7-29)
하나님의 보내신 자,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28절의 ‘일’ 동사 에르가(e[rga)는 복수형으로 질문했고 예수님은 단수형 에르곤(e[rgon)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여러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한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곳에서 27절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의 ‘하라’는 일하라는 말씀으로 명령법, 현재형입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을 영어의 액션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즉 행동해야 됩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심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예수님은 마지막 이 땅에서의 40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사도를 보기 어려운데 바울은 육체의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9)고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일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기도 합니다.

죽은지 며칠 후 눈을 떠보니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한없이 넓고 푹신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편안한 자리에서 몇 칠을 쉬었습니다. 출근하라고 깨우는 아내도, 일을 재촉하는 상사도 없었습니다. 말만하면 무엇이든지 옆에 서 있던 하인이 가져다주었습니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되풀이되자 그는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평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을 불러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좀 달라!”고 하인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지금까지 거절한 적이 없는 하인이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다 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이 직접 일을 하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옥이 낫겠지. 심심해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인은 그의 소리를 듣고 다시 놀라
“그럼 당신은 여기가 천국인 줄 아셨던가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랍니다.”
이 유머는 미국의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직장에서 쫓겨나 무엇을 하고 살까 하면서 이리저리 노숙자가 되어 고민하는 나를 꿈속에서 봅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날 때 “아! 내가 실업자가 아니구나! 내게는 교회와 선교회의 일이 있지!”이렇게 현실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일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업자가 많고 일자리가 적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일자리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일하기 싫은 것입니까? 일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가 시켜서만 일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갑니다. 스스로 하는 일이 즐겁고 계속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예전에 간판 집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월급을 얼마나 주면 되느냐고 물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일한 만큼만 주세요?” 그리고 건물의 간판을 달 때 추운 겨울에도 다는데 지금처럼 사다리 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밧줄을 타고 건물 벽에 붙어서 일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공장 굴뚝에 피뢰침을 세우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그 굴뚝은 아파트 건물로 말하면 20층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까지 내릴 굵은 전기선을 어깨에 매고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왔다갔다하는데 어지러워서 한참을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솔직히 그 때 받은 월급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한 만큼은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현재 여러분들의 일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더 좋은 길이 열립니다. 한번에 만족한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고 합니다.

처음에 선교회를 시작할 때 먹을 것이 있고 누가 도와주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한 달에 3만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선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것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힘들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미래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태국의 송.. 선교사님은 스스로 “주책 선교사”라고 말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선교사”라는 말입니다. 이 선교사님에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태국에서 여자의 몸으로 홀로 20여 년을 사역하셨기 때문에 이제 한국에 오시고 싶으실 것 같아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한번은 옷가게를 들렸는데 몇 개의 옷을 보고 조금 비싼 것 같아 돌아서는데 뒤에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만지작거리기는…”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가다 돈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아저씨 여기서 내려주세요?” 했더니 원래 가기로 한곳이 아니니 요금을 배로 달라고 하면서 계속 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이 겁난다고 하셨습니다. 태국 사람은 우리보다 못살아도 순진하고 여유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요 19:30에 “다 이루었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다 마치셨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제 하실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죄인의 신분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노동)하여 먹고사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재능대로 꼭 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