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6.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 히9:11-15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1-15)

어떤 신발가게 주인이 한 켤레는 10만원, 한 켤레는 5만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10만원 짜리 구두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값비싼 구두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값싼 것은 뭔가 결점이 있다. 값이 비싼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너무 값싼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결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엄청난 희생의 값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 되시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우월성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런 이유는 예수님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1)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권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2) 아론보다 먼저 제사장직을 받음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제사장에 대해서 히 7: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레위지파만이 대제사장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자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멜기세덱이라는 아브라함 때의 대제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직이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멜기세덱 혼자하고 레위지파처럼 대물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멜기세덱만으로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또 내려가는 다른 제사장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마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대제사장들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은 방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방울 소리가 안 나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가서 그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대신해서 사함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사는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대신한 양과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본문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드린 제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선배목사님이 이렇게 권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 병이 내게 옮겨와도 좋으니 이분의 병을 치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자녀의 고통을 내가 가지고 갈테니 내 자녀에게는 그런 시련을 주시지 말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만큼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단번에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솔직히 우리는 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분은 죄가 있으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멜기세덱을 비유로 들어 이미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도 대제사장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은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레위지파에서 오는 정통성을 말해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긴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긴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이 세상의 죄인들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지파의 대제사장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제사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시기합니다.
기술개발을 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이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했었고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내가 독창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마디로 기득권의 반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의회원 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닌데 그들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교만하여져 가면 진짜 예수님이 오셔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누려야할 자리에 가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누가 필요해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으니 그것을 직분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동안 특권을 누렸나 봅니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던지 마음을 비우십시오. 이 땅에서 영원한 직책과 직분은 없습니다. 어짜피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는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에 대 제사장으로 오셔서”로 번역했습니다. “장래”(게노메엔온)은 “…하려고 하다”로 부정과거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오사(파라게노메노스)” 또한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오셨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즉 십자가에 이미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중보(메시테스)”, “화해자, 중재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때(첫 언약한 때)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로 인해 가나안땅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단순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제사였지 사람의 죄를 없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한 속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2,000규빗을 대충 계산하면 1km 정도입니다. 1km 정도 뒤에서 따라가면 앞에 무엇이 가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언약궤를 아무나 만지면 죽습니다. 대상 13:10절에 보면 웃사가 언약궤를 만지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또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한 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만큼 그분과 가깝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다. 그제 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경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카칼에네노이)”은 하나님께서 초청한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마22:8, 계19:9) 완료 수동태 주격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정해졌으나(엡1:4)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저와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여 모두가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 대제사장 되심
(1) 하나님이 명하신 바요 (히5:5).
(2) 맹세로써 제사장을 삼으신 바요(히7:21).
(3) 죄가 없으신 바요(히7:26).
(4) 제사장의 직분은 갈리지 아니하는 바요(히7:23-24).
(5) 제사 드리신 것이 완성하고 또 있는 바요(히7:25).
(6) 그 대신 간구 하심에 온전한 특권이 있는 바요(히7:25).
(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되심은 하나님을 대리하시고 사람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권한을 받으신 바이다(히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