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0.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 눅2:11, 행13:23-3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행 13:23-31)

우리 나라에는 성명학(姓名學)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석자가 인생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믿는, 역학(易學)의 일종인 잡학(雜學)입니다. 성명학 관계자들은 성씨나 이름이 ‘금목수화토’ 오행(五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미리 점쳐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성명학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와 이름 석자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설령 사주팔자와 이름 석자가 인생 행로(行路)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할지라도, 우리 기독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생일과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날짜와 그 지음 받은 이름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 인생을 얻은 구원의 날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 더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된 새 이름은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는데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높은 이상들을 설명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즉 석가모니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설명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사해주거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이 “왜 위험한 강물에 들어갔느냐? 가지 말라고 했지 않더냐?”
다른 사람은 “손을 이렇게 하고, 발을 이렇게 하여 수영을 하여 빨리 물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웃옷을 벗고 물 속에 첨벙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아 나왔습니다.”
한사람은 유교이고, 다른 사람은 불교이고, 또 다른 사람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자신을 희생한 분입니다.
기독교가 왜 세상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이 땅의 축복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축복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 땅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축복도 의미가 있어집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재물과 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 좀 나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물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제일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한국에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미 대통령이 나 한사람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에 온다면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 대통령이 와서 이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어느 정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도 내 영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정도이겠지 나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전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아멘-

예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다.” 또는 “구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 주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누가 제일 권한이 있습니까?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버지 되는 요셉에게 친아버지인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마 1:20-21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직접 예수(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뜻으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구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분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기는 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뜻과 의미를 모른체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예수 이름이 왜 능력이 있습니까? 왜 예수이름만 부르면 마귀가 도망갑니까? 죄인은 누구를 보면 도망갑니까? 첫째는 자기가 죄지은 사람을 만나면 도망갑니다. 그리고 경찰을 보면 도망갑니다. 마귀는 예수님만 보면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사단은 도망갑니다.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분이 사단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 가신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예수 이름 불러서 손해본 사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예수 이름은 절망에서 소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으며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예수(구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더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 종교적 삶(권리와 의무)을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하나님은 그의 생애 속에서 생동력 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역사 하시는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 주어야 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구주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3:23-31의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날 유대인 회당에서 증거 한 것입니다(행13:14). 바울과 일행은 안식일에 이 유대인 회당에 가서 앉아있었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읽은 후에 사람을 보내서 바울 일행에게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손짓을 해가며 유대인에게 증거 합니다(행 13:16).
바울이 증거 한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은 구주라는 것입니다.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리고 26절에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상표 인지도를 조사하여 보고한 것에 보면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카콜라”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예수”를 들어보았냐고 질문했습니다. “코카콜라”를 들어보았다고 대답한 사람은 조사대상 사람 중에 9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70%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 회사의 브랜드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을 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전합니까? “예수” 이름만 전하면 됩니다.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카톨릭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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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거짓 증인들을 조심하십시오.
상표도 유명해지면 가짜 상표를 붙여 파는 악덕 상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유명하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알렉산더 대왕이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화가 난 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너는 네가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고치든지 선택하도록 하라.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링컨은 “남자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이름과 역할이 있다. 역할과 이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은 위인이 될 수도 있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름 값을 다 못해 얼굴을 들지 못하곤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의 명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난의 대상이 될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 우리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들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불러 보세요. 예수 이름 자체가 능력이요,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 이름에 자부심을 갔습니다. 어떤 분은 약간 현대적이지 못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만을 바라보라! 주님을 만을 바라보라! 온전히 예수 이름만을 부르라! 이런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