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4. 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인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교황은 13세기에 교황권을 크게 휘두른 사람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신학자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썼는데 이 책을 보고 회개한 사람중의 하나가 노예상인 ‘존 뉴톤’입니다. 이 사람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썼습니다.
그 때 마침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로 돈주머니가 수송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교황은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 어나 걸으라’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속하게 될 때,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게 될 때, 이미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모두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보다, 예수님 보다 그것들을 먼저 의지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페트로스(Pevtro”) 남성형 고유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석” 페트라(pevtra/) 여성형 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 베드로를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해석은 제자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경을 깊이 보지 않으면 그렇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베드로”이름이 ‘돌, 반석’으로 예수님이 “반석(페트라) 위에”라고 하신 뜻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반석”이라고 하신 것과 베드로의 이름을 연관지어서 혼란을 일으키면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6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 베드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베드로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님의 수제자라고는 하나 그 또한 인간임이 분명합니다. 23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반대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반석을 세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는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앙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물을 찾아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큰 바위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바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깨지면서 엄청난 물이 솟아 나와 목마름을 해결하고 새 힘을 얻어 살았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가면서 목이 말라 지치고 죽을 위기에 있을 때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마신 기사가 두 군데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출17장의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한달 반쯤 되었을 때 신 광야를 지나서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르비딤 어느 바위로 인도하여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40년이 지난 민20장의 사건으로 바란 광야를 지나 가데스라는 곳에서 목이 마를 때 이스라엘을 그 곳 어느 바위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위에 명령하여 물이 나게 하라 하셨는데 모세는 감정이 북받쳐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40년간 사는 동안 신령한 바위가 함께 따라 다녔는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생수를 주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이 교회의 반석이 되십니다.

주님의 교회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교회가 됩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이시면 예수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회사가 주주총회를 하면 제일 많이 주식을 가진 사람이 그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는 기초석이 없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즉 교회를 세우신 분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교회(에클레시아:ejkklhsiva)는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입니다. 즉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이 뜻은 “불러내었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죄 때문에 떠난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시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 모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교회”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불러모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아멘.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고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했는데 예수님은 그 때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사람의 양이 아닙니다.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단 두 마디로 감동적인 설교를 한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단 두 마디는
“ ‘인간보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과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에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탕자’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아버지’, ‘용서하시는 아버지’, ‘감싸주시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고 회개되고 새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바울, 스펄전, 칼빈, 로이드 존스, 빌리 그래함 목사님 모두, 역사상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나 설교자라고 해도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워 주시는 교회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세우리니”(oijkodomhvsw:오이코도메소) 원문의 뜻은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 사함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세운다”가 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한군데 더 나옵니다.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려 일으켜 세우실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의 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1986년 컴퓨터선교회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계신 ‘모리스쎄룰로’목사님을 모시고 잠실 실내체육관과 광림교회에서 전도학교를 열었습니다. 그 때 이분이 주장하기를 당시 현재 전세계 교회의 실내에 들어와 꽉 차게 서서 예배를 드려도 세계인구의 단 2%도 수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2%가 아니라 단 1%도 수용을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작은 지하실 교회라고 해도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이며 백악관이나 청와대보다도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축복의 장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요,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워싱톤에 살면서도 교회는 촌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워싱톤에 있는 교회에서는 그가 출석할 때에 교역자들이 높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촌 교회에 갔을 때에는, 설교자가 그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얼마든지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듣기 위하여 촌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모인다면 그 교회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 음성을 외면하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앙교회 주님이 세워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권세”는 문자적으로 ‘대문’을 말합니다. ‘음부의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할 때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죄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것입니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죽었다고 하지 않고 행 7:60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유명한 성경 주석가 윌리암 바클리가 40년 동안 교회를 봉사한 다음에 한 말에 동의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사람들 눈에 허물 투성이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때 좌절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백만인의 애인이라고 불리웠던 노만 빈센트 목사가 한 말도 저는 전적으로 수긍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고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도 21세기에는 교회에 희망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믿고 교회에서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복 주시기 위해서 불러모은 백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미시간주에 리차드 디한이라는 유명한 방송 설교가가 있습니다. 같은 시에 어떤 문제가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