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열두 제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6. 예수님과 열두 제자) / 본문 :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남기신 것이 있다면 빈 무덤과 열두 제자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시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특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고, 같은 지역 출신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공통점이 있다면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성인 남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통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다양한 배경과 직업과 모습은 예수님이 팀을 형성하시는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팀 형성을 위한 응집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격도 달랐지만 직업도 달랐습니다. 직업이 다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제자는 네 명은 어부였으며(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는 세리, 시몬(베드로가 아닌)은 로마 정권을 전복시키고 독립된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열성 당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이 있어서 따라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이 같은 열두 사람을 택해서 함께 있게 하시며 훈련시켜 나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며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눅 11:1). 예수님이 제자를 가르치신 유일하신 방법은 모범을 보이심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요한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직후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요 15:9).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요 15:12)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행한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할 것과 자신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사랑을 드러낼 것을 세 차례 당부하셨습니다(요 14:15, 21, 23).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마 16:17)고 말씀해 주신 것과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눅 22:34)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32절).

제게 기억나는 강아지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우물이 없어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물지게를 낑낑대고 지고 오다가 그만 모자를 어디다 떨어뜨리고 온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모자 하나도 귀했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 따라오던 우리집 강아지가 모자를 물고 온 것입니다. 얼마나 신기 한지요. 훈련받지도 않은 똥개였는데 이 개는 다른 개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아버님이 어제 장에서 사온 것인데 신기했습니다. 시골에서 이런 개는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이 강아지 이름을 얼룩얼룩한 털 모양이 있어서 바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때부터 부모님과 누나는 이제 그 개는 네 개이니까 네가 알아서 밥도 주고 똥도 치워주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다고 했습니다. 모자 물어다 준 것에 반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지겨워 지는 것입니다. “같이 놀 때만 네 개”라든지 “내가 원할 때만 네 개”라고 하면 좋은데 그게 아닙니다. 병이 들었을 때나, 부유하게 되었을 때나, 가난하게 되었을 때나, 진자리 마른자리나… 그 때 퍼뜩 든 생각이 “나는 이제 꼼짝없이 매였구나”입니다. 연애는 끝난 것입니다. 신혼여행도 끝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바둑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의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영속성이라고 합니다. 이 영속성은 사람을 질리게 합니다. 어떤 때는 나를 처다 보는 바둑이가 이유 없이 그렇게 미웠습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반갑다고 멍멍멍’ 그것도 지겨웠습니다.
이제 저도 병이 든 것입니다. 이 병명은 “매임병(病)”(stuckititis)입니다. (stuck란 “꼼짝없이 갇혔다”는 뜻이고 Ititis란 거창한 병명처럼 보이고 싶을 때 아무 단어에다 붙이는 말입니다.) 「맥스 의학용어집」은 이 병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매임병은 숨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발병하는 것으로 특히 출생과 죽음 사이에 찾아온다. 매임병의 증세는 짜증이 늘고 화를 잘 내며 속에 쌓이는 것이 많아진다. 매임병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은 ‘누구?, 무슨?, 왜?’라는 말이 들어가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내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을까?”

이 사전에서는 매임병의 처방으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도망간다. 싸운다. 용서한다’입니다. 첫 번째 도망(도피)가는 길을 택한 사람은 다 버리고 다른데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는 것은 그곳에서 똑같은 증상이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정은 전쟁터가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처방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사람들을 한 두 명도 아니고 12명을 365일 3년이 넘도록 봐야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고, 똑 같은 배를 타고, 똑 같이 밥을 먹고 가야했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꼴 볼 견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들은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말 그대로 동거동락 했습니다. 서로에게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다 들어 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동안 제자들은 반응은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고’(막 10:24, 참조26절), 심히 놀랐다(32절). 때로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었습니다(요 1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요 2:22, 17:8), 그분이 메시아란 사실을 인정했으며(마 16:16, 막 8:29, 눅 4:20), 경배했습니다(마 14:33, 28:17, 눅 24:52-53).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당한 비판을 당할 때 변호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주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은 일을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마 12:1-8). 또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다고 비방할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유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므로 그 주장은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외식하는 자들이라고(마 15:1-9) 이사야 29장 13절의 말씀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눅 5:33-35). 네 번째 주님이 제자들은 변호하신 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왕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자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간결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37-40) 한 마디로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값싼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강도 높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제자들을 칭찬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점은 언제나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적어도 이런 부분이 복음서에 열 다섯 번에 걸쳐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꾸짖으시고, 엄중히 경고까지 하셨습니다(표 참고).

번호
성구
사건
예수님의 반응
분류
1
마 8:23-26,
막 4:40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을까 두려워한 제자들
“어찌하여 부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심
믿음의 부족
2
마 17:17,
막 9:19,
눅 9:41
간질병 소년을 고치지 못한 아홉 제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심
3
마 16:22-23,
막 8:32-33
자신의 죽음과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심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부족
4
마 26:40, 45,
막 14:37, 41,
눅 22:4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잠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5
눅 22:49-51,
요 18:10-11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심
6
눅 9:54-55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사를 것을 구한 야고보와 요한
돌아서셔서 그들을 꾸짖으심
7
마 19:13-14,
막 10:13-16,
눅 18:15-17
예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을 꾸짖은 제자들
제자들에게 분노하시고 겸손과 신뢰의 모습을 보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임을 설명해 주심
8
막 9:38-39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그 일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요한
요한에게 “그를 금하지 말라”고 하심
겸손함의 부족
9
막 10:35-40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권세를 누리기를 원한 야고보와 요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심
10
막 10:41-42,
눅 22:24-30
야고보와 요한의 분수를 모르는 교만한 요구에 분개한 열 제자
섬기는 자자 가장 큰 자라고 하심
11
마 26:33-34,
막 14:29-30,
눅 22:33-34,
요 13:37-38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심
12
요 21:21-22
요한의 장래에 관해 질문한 베드로
베드로에게 요한에 관해서는 알것이 없다고 하심
13
마 26:6-13,
막 14:3-9,
요 12:4-8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을 비판한 제자들
“가만 두어라…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심
그리스도께 드려야하는 영예에 대한 인식 부족
14
막 16:14
부활한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제자들
그들의 불신을 꾸짖으심
다른 사람들의 증거에 대한 인식의 부족
15
요 20:27-29
예수님을 만져보기 전에는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겠다고 한 도마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치유 사역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마 10:1, 막 3:14-15).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40).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간 후에는 제자들이 자신이 한 것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했고(요 15:27), 제자들을 길러냈으며(마 28:19),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1:8).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권세와 함께 주신다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은 종이 아니라, 학생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요 15:13-15).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가 죽은 후(AD 96년) 사도 요한은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을 때 전승에 의하면 그의 18번 설교가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몸이 불편하여 제자들이 부축하여 설교단 의자에 앉게 하면서 “선생님, 오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하면 그는 백발의 노구로 두 손을 들면서 “소자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그것은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도 아직도 주님 가르치신 사랑뿐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부활 후에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잘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제자가 있다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제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 이상 방황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면 우리의 일생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증인’(mavrtu”:말튀스)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순교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자신의 권리들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며(갈 5:24),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롬 6:11). 내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복음이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냥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보장이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 이러한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