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고 원하였노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1. 원하고 원하였노라) / 본문 : 누가복음 22:14-15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오늘은 설교의 서론을 없애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교할 때 서론 하다 30분이 넘게 지난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설교가 30분 일찍 끝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부가 신혼 때 밥하다 가끔 잘 태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익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맛있다면서 날 쌀도 씹을 태세입니다. 그러나 살다가 지루해지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밥이 되니, 무르니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언제나 신혼 같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밥상을 잘 차려놓은 어머님의 마음은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잘 다스리고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저와 여러분을 일시키려고, 부려먹으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복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십니다. 그 복은 영원한 나라를 상속자로 물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사실은 이런 자에게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분명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간쯤 있다가 유리해 지는 쪽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책임지는 쪽을 택해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고 어려워도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는 양철 캐비닛을 만들면서 열등 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추운 겨울날, 런던 거리를 배회하던 에드워드는 어느 작은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거듭남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에드워드의 마음에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는 강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 후, 에드워드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행복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소망되신 주님께 감사의 시를 지어 드렸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예수님 때 사람들이 원한 것

서커스단의 구경나온 사람들은 처음에 공중에서 한바퀴 도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러나 매일 그것을 보노라면 별로 신기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두 번 돌아보라고 하고 두 번 돌면 세 번 요구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계속해서 기적(표적)만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이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첫 기적사건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요2:1-12)을 비롯해 고기잡이 기적(눅5:4-9), 귀신을 쫓아내심(막1:23-28, 눅4:33-37), 베드로 장모와 병자들을 고치심(마8:14-17, 막1:29-34, 눅4:38-41), 문둥병자를 고치심(마8:1-4, 막1:40-45, 눅5:12-16), 중풍병자를 고치심(마9:2-8, 막2:2-12, 눅5:18-26),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를 고치심(요5:2-16), 손 마른 자를 고치심(마12:9-13, 막3:1-5, 눅6:6-10), 백부장 하인의 병고침(마8:5-13, 눅7:2-10), 나인성 과부 아들 살리심(눅7:11-17), 폭풍을 잔잔케 하심(마8:24-27, 막4:37-41, 눅8:23-25), 귀신을 쫓아내심(마8:28-34, 막5:1-20, 눅8:26-39),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마9:20-2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마9:18-26, 막5:22-24, 눅8:41-56), 소경 둘을 고치심(마9:27-34)”등이 있었습니다. 고기잡이 기적을 비롯해 폭풍을 잠잠케 하신 기적은 자연이 순종한 기적이며 불치병을 고침은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신 2번의 기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흠을 잡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는 이런 요구를 하고 있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막 12:38-39, 눅 20:46)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어머니들까지 나섰습니다. 치마 바람이 만만치 않습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막 10:35-36)라고 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을 이루어주시면 하나님께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이루어지며 또 그 다음 것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자꾸만 더 좋은 것을 내어놓으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자기의 욕심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이 고쳐지기를 원하십니다. 병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막 1:40-41, 눅 5:12-13) 우리가 깨끗하게 고침 받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마 20:33, 눅 18:41)

불이 붙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와 같은 의미로 전달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불이 붙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화실 근처의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화가가 그의 창문을 통해 패배감에 젖어 절망의 계곡에 떨어진 그 거지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중요한 변화를 주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변화란, 초점이 없이 허공 중에 박힌 그 거지의 눈을 생기 있고 활기에 넘치는 의욕에 찬 사람의 번쩍이는 눈으로 바꾸어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가는 또한 맥이 풀린 그 거지의 힘없는 얼굴을 강철같은 굳은 의지의 결단성이 강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화가는 거지를 불러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는 그 그림 속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게 누구입니까?”
그 거지가 물었을 때 화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가리켰습니다.
그 거지는 다시 초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저 그림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인가요? 저 그림의 사람이 도대체 저일 수가 있을까요?”
거지는 머뭇거리면서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당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 저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내가 바로 저 그림 속의 사람이라면, 나는 앞으로 저 그림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신 영광을 우리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요 17:24)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눅 22:45)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우리의 기도가 주님 앞에 상달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원하고 원했다는 것은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시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은 몰랐지만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순한 의식행위 같지만 이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피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위해 흘리는 피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내 피가 십자가에서 흘려지는 것이었습니다. 내 살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는 말씀과 “…오늘 네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한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입니다. 이 두 형제는 갈릴리 어부출신인데 예수님께 선택받고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입니다. 이 두 형제의 마지막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이 이들의 죽음까지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다 에뎃사에 도착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에지스라는 총독이 있었는데 자기들의 섬기는 우상을 대적하는 설교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에게 “내가 죽을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안드레를 죽이기 위해서 그를 더욱 천천히 죽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 아니라 밧줄로 묶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이틀동안 사람들에게 설교하다가 11월 30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베드로는 헤롯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죽인 후 그것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 다음에 베드로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베드로는 체포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천사)의 도움으로 석방이 되었는데 이 일로 잔뜩 화가 난 헤롯은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들을 모두 사형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로마로 갔는데 그곳에서 황제의 측근인 시몬 마구스을 개종시킵니다. 이 사실에 더욱 격분한 황제는 베드로와 바울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간수장 두 사람과 47명의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9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베드로는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매질을 당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주님과 같이 똑바로 박힐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을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을 순교사라고 합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 할만큼 두드러진 인물은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입니다. 그는 2세기 초 중엽 서머나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인데, 그의 장엄한 순교는 모든 사람 중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기에 믿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리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형 집행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감독이여, 나는 당신이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원치 않소. 그러니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 줄 테니 다른 지방에 가서 예수를 믿든지 전도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때에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겨왔습니다. 그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마디의 거짓말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하여 두 시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 뒤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약한 것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불같이 타오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