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9. 생수의 강) / 본문 :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여러분!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 –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 –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 –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병,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눅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눅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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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59. 생수의 강) / 본문 :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여러분!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 –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 –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 –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병,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눅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눅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