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3.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 본문 : 요 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진 왕자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자들이 자기가 가진 값진 보물을 가지고 공주를 찾아갑니다. 길을 가다가 세 왕자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서로 자기가 가진 보물을 자랑합니다. 이 때 천리안을 가진 왕자의 거울을 통해서 보니까 공주가 아파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왕자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의 말을 타고 번개처럼 공주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천년 묵은 불사의 약초를 가진 왕자가 공주에게 주어 공주를 살려냅니다. 문제는 이 세 왕자 덕에 살아난 공주가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보시대를 살아가는 네티즌들은 천리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의 시대를 맞이한 포드나 현대가 사람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러나 농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농자천하지대본’의 사상으로 불사약을 먹인 왕자와 결혼해야 된다고 할지 모릅니다.
미국에는 3십만 개 이상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5만개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도 가지각색의 모습과 철학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가지각색의 대답을 듣게됩니다.
● 어떤 교인들은 예배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조용하고 평온하고 엄숙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을 일깨워 주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밴드를 동원해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교회를 구분합니다. 이런 분들은 잘못하면 교회를 휴양지나 컨트리클럽 또는 이성교제의 전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부패한 세상과 싸워 승리해하는 공동체로 인식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봉사나 선한 행실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교인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요새나 원형경기장과 같은 교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 어떤 교인은 세상문화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를 교회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교회를 은행이나 패스트푸드점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최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대형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대형쇼핑몰과 같이 필요한 것을 교인들에게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교토에 가면 “천불상사(千佛傷寺)라는 절이 있답니다. 이곳에는 가부좌를 한 천 개의 불상이 정렬되어 있는데 천 개의 불상 모두가 모습이 다르답니다. 그래서 자신하고 비슷하게 생긴 불상을 골라 예불을 드린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하고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농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세 왕자 중에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농경시대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천리안과 천리마는 단순히 사용만 했기 때문에 여전히 왕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사약을 먹인 왕자는 이미 공주가 먹었기 때문에 그 왕자만 보물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앞의 경우처럼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아마 최서은이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쉽게 나올 것 같습니다. 찝짜가(십자가)가 있어야 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서은이는 십자가만 보면 찝짜가 찝짜가 하고 부른답니다. 너무나 십자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음식을 보면 못 먹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 지구성에는 약 3,0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어야 나이가 한 살 더 먹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래서 철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이만 먹지말고…”그럽니다. 한국인이 먹는 것은 음식과 시간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습니다. 그래서 욕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챔피언도 먹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 세계사람이 한 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데 우리만 한 골 먹었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면에서는 겁먹고, 애먹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지만 아니 어떻게 애를 먹습니까?
육체를 입고있는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제일 기본적인 욕구가 먹는 것입니다. 컴퓨터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업주의에도 먹는 욕구를 표방하면 사업이 성공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개인용 컴퓨터 매킨토시의 브랜드와 고로가 사과모양의 애플입니다. 누가 한 입 깨 물은 로고는 사과의 미각을 통해서 인간 욕구를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있습니다. 실리콘벨리의 썬 마이크로시스템사가 개발한 프로그래밍언어가 커피 브랜드의 이름을 딴 “자바(Java)”입니다. 로고도 커피 향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식욕을 통한 이미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식욕이 탐욕이 되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금식기도 후에 사단은 이 식욕으로 첫 번째 시험을 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먹는 것으로 죄가 들어왔으니 먹는 것으로 해결을 해야합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는 이것을 유치하게 해석을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을 성적 타락으로 비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자신을 통해서 성교를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가름이라는 통일교 교리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손님이 오면 가족이 먹는 한솥밥에 차려낸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가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친계(親系) 8촌, 외계(外系) 4촌, 처계(妻系) 2촌 밖의 손님은 딴 솥으로 밥을 지어냈습니다. 밥상은 물론이요 반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한 숱 가락이 한 찌개나 국을 퍼먹는 것은 위생에도 안 좋습니다.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직계 가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를 생각하면 단순히 선생과 제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야말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이입니다. 3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한 솥 밥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칠병이어의 사건 역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축사하신 한 광주리에서 나온 떡과 고기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나간 디베랴 바닷가에 오셨습니다(요 21:1).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6)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순종하여 163마리의 고기를 잡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준비하신 모닥불에 고기와 떡을 굽고 제자들과 디베랴 바닷가에서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일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어린양을 먹일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마음이 사랑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마다 주어진 말씀은 “양을 먹이라”입니다.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뜻으로 보면 됩니다. 양을 치는 것은 기본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 양을 잘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제자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한 솥의 밥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골라낸 사람, 가르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서 3:1-13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간직해온 신성한 비밀을 밝혀줍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신비”라고 불렀습니다. 이 비밀을 수천 년 동안 하나님만 알고 계셨고 족장들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심지어는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이제 이 비밀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이 비밀이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미스테리온(musthrivw/)이란 말입니다. 이 비밀이란 허락된 사람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미스테리온은 오랫동안 숨겨 왔지만 하나님께서 마침내 원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결정하신 비밀입니다. 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엡 3:3)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자신이 깨달아 안 것처럼 우리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엡 3:4-5).
그러면 이 신비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갈 3:28)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우리나라가 한 솥 밥을 먹은 것은 농사신인 선농제사 때 희생당한 신성한 신체인 소의 어느 한 부분도 버리지 않고 한 솥에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문무백관 백성, 거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던 말하자면 공식 음식인 선농탕 곧 설렁탕입니다. 그래서 큰 것을 말할 때 ‘선농단 국솥 만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설렁탕)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된 ‘설렁탕’교회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미스테리온)을 전하는 것이 인간보다는 천사가 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미가엘이나 가브리엘 천사가 구름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서 천둥 같은 목소리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면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고 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복음의 비밀조차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복음을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와 설렁탕(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을 먹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이 복음의 진리를 베드로와 바울처럼 힘써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