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1. 부활의 증거) / 본문 : 마 28:1-10

“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 목사인 제가 “이 사실을 어떻게 증거 할까?” 이 문제가 사실 제일 큰 문제요 고민입니다. 복음의 결론이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설교를 잘하고, 선교를 잘해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저도 한 때 의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도저히 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은혜가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부활이 믿어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부활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도 부활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오직 복음이란 이 부활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알고있는 한 부활에 대해서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말로 부활이 믿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확인해 드리고자 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던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따라다니는 제자가 있는데 도마입니다. 그는 항상 “의심 많은 제자”, “믿음이 없는 제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는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이 의심은 그렇게 쉽게 풀린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28:16-17)고 전해줍니다. 처음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만 의심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 나타나신 예수를 보고도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믿음에 대해서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믿어질 것 같으면 문제가 없지요. 덮어놓고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런 자세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떠나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가설 중에 하나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빼 돌리고 부활했다고 퍼트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음모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 음모론이 설립되기 어려운 것이, 제자들이 날조하여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면 제자들이 먼저 의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의 음모에 가담했던 적이 있는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확신을 보이기는커녕 문 잠긴 방에 꼭꼭 숨어 자신들도 죽게될까 봐 덜덜 떨고있었습니다. 이런 음모를 꾸밀 만큼 제자들은 담대하지도 못했으며 상황도 못되었습니다. 음모를 꾸밀만한 엉뚱한 인물이 있는데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가 제판을 받을 때 모닥불이나 쬐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여자아이하나가 자꾸만 와서 분명히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따라다닌 것을 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의 시체를 훔쳐서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의심은 제자들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4복음서가 똑같이 기록한 것은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는데 이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막 16:1-3, 눅 24:1, 요 20:1)라고 증거 합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자의 증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법정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머리를 썼다면 그럴듯한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예컨대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가 제격인데 왜 하필 여자들인지, 또한 복음서의 기록은 이 사건이 있은 후로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이런 약점을 얼마든지 고칠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처음에 부활 사건이 기록된 것은 짜임세가 없어 보입니다. 충분히 손질을 해서 전해줄 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들이 새벽에 무덤에 도착했을 때 힌 옷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천사인지, 청년인지?, 둘인지, 하나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게 잘 나타나셔야지, 도저히 변증하려는 뜻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부활과 관계된 음모가 있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음모는 예수의 제자들이 꾸민 것이 아니라 무덤이 비었다는 이 당혹스런 사실을 어떻게 하든 숨겨야하는 로마군인들의 입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의 입장이 같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죽인 장본인들로 당시의 권력자들입니다. 부활이 소문뿐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렵게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무덤에 가서 막혀있는 무덤을 보여준다든가 아니면 좀더 적극적인 방법은 무덤의 돌을 굴려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간단할 것 아닙니까?

앞에서 첫 증인이 여인들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여인들보다 먼저 목격한 증인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천사가 나타날 때는 거의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에게 나타난 이 일을 그저 두려워 떨면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오후쯤 가서는 제사장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 28:13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큰돌을 굴리도록 군병들이 잘 수 있을까?, 아니면 소리도 없이 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것을 알 수 있을까?”하는 약점들이 있습니다. 어떻든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이 방법 외에는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굳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예수님의 생애에서 이미 나타난 것처럼 예수를 부정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점에서 그렇게 애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힘쓰시지는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 약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행동이 부활 후에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바닷가에 그렇게 잠깐 나타나셨다 가시지 말고 예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몇 년 더 계셨더라면 부활 문제를 가지고 저처럼 굳이 이렇게 설교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부활 후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마치 늘 보여주시면 안 되는 사람처럼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곤 합니다. 이렇게 하신 기간이 딱 6주간입니다. 두 달이 안됩니다. 나타나신 것은 모두 열두 번입니다. 열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나타나심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부터 알고 있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장소 또한 공개적이지 않은 방안이나 갈릴리의 조용한 바닷가였습니다. 공개적인 장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꺼려하셨습니다. 당신을 처형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던 대제사장이나, 처형을 허락한 빌라도에게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 속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을까요?
도마에게 한 말씀을 통해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부활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미 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 8:31, 9:9, 10:3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고전 15:20, 골 1:18). 부활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ejgeivrw:에게이로) “깨우다, 일어나다, 행동을 시작하다, 씨앗이 나오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씨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강원도민일보의 의하면 7천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식물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2월 28일 강원도 양양군 여운포∼송전간 도로개설 부지에서 신석기 유적 발굴조사 중 출토된 지름 2㎝ 안팎의 구근에서 최근 파란 싹이 돋아났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언제든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2,000년 묵은 꽃씨를 무덤에서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살 것인가, 못 살 것인가 해서 땅에 심었더니 죽었던 꽃씨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또 1884년 애굽에서 3,000년 묵은 완두콩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1884년 6월 4일 이 완두콩을 땅에 심었는데 며칠 후에 싹이 나고 땅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꽃씨나 콩의 씨앗도 2, 3천년만에 그 생명이 다시 사는데 하물며 인간의 생명이 부활이 없겠습니까?

[유머]
미국의 어떤 남자가 강짜가 넘 센 아내를 데리고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관광 갔다가 갑자기 아내가 죽었습니다.
장의사가 남편에게 말하기를 “미국으로 시신을 운구하려면 5,000 달러가 들고, 여기 聖地에 매장하면 150달러가 든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장의사가 말하기를 아니 여기 매장하면 150 달러 밖에 안 드는데 왜 애써 5,000 달러라는 많은 경비를 들여 고국으로 운구 하러 합니까?” 하자
그 남자가 말하기를 “오랜 옛날 그러니까 2000여 년 전에 한 남자가 여기서 죽어 묻혔는데 사흘만에 되살아났다고 했는데 나에게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쩝니까?”

우리가 믿든지 안 믿는지 상관이 없이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십니다. 요한이 전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3-16)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공산주의의 실천자였던 레닌의 시체를 포르말린이 담긴 유리관 속에 넣어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리관에는 “그는 모든 나라 인민의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세상의 구주였다.”라고 팻말을 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닌은 한때 볼세비키의 운동에 있어서 리더였을지 모르지만 단지 과거의 사실일 뿐입니다. 그는 현재의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현재형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오늘 여기에 진리가 되시고 부활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진리가 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속에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죤 러스킨이 쓴 ‘티끌의 윤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러스킨은 진흙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중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티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진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연결될 때에 맨 흙덩어리 같은 우리가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