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를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8. 소자를 위하여) / 본문 : 마 18:10-14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프리카에는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벅’이란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짐승들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갑자기 질주를 시작하는데 뒤에서 풀을 뜯던 양들이 앞쪽으로 나오면, 앞에 있던 양들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빨리 앞으로 내달린다고 합니다. 이 양들은 목적 없이 질주를 계속하다가 눈앞에 낭떠러지를 보고서도 가속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덩달아 앞을 다투어 경주하는 과속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이 흡사, 이 미련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소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면서 세상 속에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달리지 마시고 주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기 위해서 “..위하여!”라고 위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이 “위하여!”는 여당 분들이 하니까 우리는 야당이니까 “…위하야!” 한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어느 교회 모임에서 “위하주!” 그리고 축하한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에게 경배만 받으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경배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경배만 받기 위해서 오셨다면 이 땅에 오지 않는 편이 더 났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저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받고 따라오라고는 하셨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는 하셨지만 나만을 위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0-32)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 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글에는 백성을 가리키는 단어 중에 ‘국민’과 ‘인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1952년 이전)에 보면 역대하 17:9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라고 나옵니다. 유다 4대왕이었던 여호사밧 때의 일입니다. 남북한이 말을 나누어 갖다보니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용어를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 남한에서는 인민이라는 말보다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국민은 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고 많고, 인민은 나라가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용어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북한 공식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중국에는 “인민일보”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이 정말 인민을 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민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인민)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소자(mikrw’n touvtwn:미크론 투톤)”는 “가장 작은 사람, 미미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작다(소자)”는 의미를 “키가 작은”, “범위가 작은”, “의미가 적은”, “시간 적으로 짧은(연령적으로 어린)”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9:3 에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며” 마가복음 15:40 에는 야고보도 “키가 작은” 또는 “나이가 어린”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단어는 “의미 없는”이라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결코 경멸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진, 장래의 위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예수님이 나신 유다지파에 대해 예언하기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창 49:9)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르십니다(마 11:25, 29).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게 됩니다(마 18:4).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장래에는 큰 자가 될 것입니다(마 18:1, cf 5:19).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마 11:11).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에게 리포터가 뛰는 동안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호흡입니까? 아니면 갈증 때문입니까?” 그러자 마라토너는 “저를 힘들게 한 것은 호흡도 갈증도 아닙니다. 신발 속에 모래알 만한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며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제일 작은 나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를 VIP로 대접하십니다.

VIP로 대접하시는 하나님

VIP(very important person) 국어사전에 보면 “정부 요인이나 국빈 등과 같이 특별히 대우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 ‘귀빈’, ‘요인’ “을 말합니다. 신어로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가 있는데 이 말은 VIP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VVIP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단어가 성경에 있습니다. 시 13:6을 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또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후대하심”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lm’G:가말(혜택, 관대하다, 섬기다)”과 “l[‘:알(넘어, 위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예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실 때의 물 항아리도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요 2:7). 우리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십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시(141장)처럼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소자의 가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연자 맷돌은 혼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나귀나 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곡식을 빻는 멧돌을 말합니다. 연자 멧돌과 같이 큰돌을 목에 메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부모를 죽이거나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로마가 집행하던 당시 형벌이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비교로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성경에서 천사들은 국가(단 10:13, 12:1), 교회(계 1:20), 개인(행 12:15)을 위한 수호(守護) 천사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천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천사를 숭배하게 됩니다. 천사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명령을 받은 하나님이 일꾼이지(히 1:14) 우리가 섬겨야될 대상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천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돌보는 소자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길을 잃었으면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얻은 이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 또한 여러분은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입니다(딤전 2:4). “만일(eja;n:에안)”은 접속사이지만 이 단어는 “a[n:안” 소원을 말하는 기본 조건 불변사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찾기를 원하신다는 애절한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80대 중반이 되신 노(老)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을 찾아보기 정말 힘든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이 장로님을 부르는 애칭이 “보톡스 장로님!” 성품은 밝고 친절하여 많은 교회 후배들이 본받고 싶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 장로님께서 부흥 사경회 중 목사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은 천국에 가신 저의 어머님께서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저의 어머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강사 목사님의 식사를 대접하셨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식당에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했죠. 그래서 제가 일 년 중 제일 맛있는 것들을 먹는 날이 바로 부흥회 하는 날이었답니다. 지금 어머님은 돌아 가셨으나 그 때 그것을 보고자란 대로 저도 늘 이렇게 부흥강사님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