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6. 시험을 이기는 믿음) / 본문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느 여자대학 교수가 제자의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좀 고상하게 축전을 친다고 요한1서 4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결혼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축전을 쳤습니다. 요한1서 4장18절은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이 축전이 그만 오타가 되어서 요한1서의 ’1′자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18절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제자가 교수의 축전을 받고 좋아서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가 나왔습니다. 이 제자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축전을 받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곧바로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시간마다 다 참석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 보이던 박 집사님이 오늘 점심 반찬 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박 집사님은 묵은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고 온갖 반찬들을 정성스럽게 마련해 가지고 왔습니다. 자연히 박 집사님이 가지고 온 묵은 김치와 이 집사님이 가지고 온 화려한 반찬은 비교가 되었습니다. 박 집사님이 갑자기 벌컥 화를 냅니다. “사모님! 왜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시키십니까? 이 집사님이 반찬을 가지고 온다고 말씀하셨으면 저는 안 가지고 왔을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고요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그러지 마세요. 못 사는 사람은 교회에서 점심도 못 먹겠습니다.” 그리고 묵은 김치를 후딱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건강해 보이던 박 집사님이 한 순간에 시험에 듭니다. 아마도 그 날 남편과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나왔는데 하필 그날 따라 점심당번이 꼬여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그렇게 드렸던 예배와 헌신의 다짐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지요.
남자 성도님들은 아마 이런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역시 여자는 한계가 있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정말 그렇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 투표를 했습니다. 후보에 오른 안수 집사와 아내는 목사의 기대 이상으로 열성적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는 몹시 마음이 아프고 속이 쓰렸습니다. 왜 탈락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지금도 왜 그렇게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 믿는데 중요한 것인지 지금까지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뭘 그런 것을 가지고… 하다가도 막상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 닥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쩌면 사단은 죽음으로만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고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했는데 여기서 시험이란 “시련”(testing)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시험”(prirasmov”:페이라스모스)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만 악에서” 라고 나옵니다. “악”(tou’ ponhrou’:투 포네루)는 소유격인데 이는 남성 또는 중성으로 나옵니다. 중성으로 해석하게 되면 추상명사로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 악한 자로서 사단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 더 나오는데요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리고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와 요일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하옵소서”는 사단에게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사단의 꾀임에,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악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엡 6:16-17절을 보십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을 받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합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은 초라해 집니다.”(R. W. Emerson)
믿음은 겸손과 낮아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교만은 믿음을 방해하는 제일 큰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나오고,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큰 교회라 합니다. 모이는 사람도 몇 명 안되고, 아직도 보조를 받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예배 장소도 상가에 세 들어 있다면 작은 교회, 또는 개척교회라 합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거의 보편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 숫자나, 헌금 액수나, 건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 교회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7)고 했습니다. 참된 교회의 기준은 큰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군과 그 조카인 타냐와의 대화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타냐는 혁명 중에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고,
소녀는 매우 당황해하며 주저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때 장군은 잠깐의 시간을 가진 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알고 있었던 코마노프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야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 만약 코마노프가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할지라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2. 구(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가 도망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 66: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3.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민수기 15:37-4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을 때 “38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그리고 이 술을 볼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욕심, 눈을 따라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랬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교만한 자를 가리켜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합 2:5)라고 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의 특징이 있습니다.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이 됩니다. 자기가 다 모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다가 70년 간이나 포로생활을 하게 한 바벨론은 스스로를 자처하기를 만국의 어머니 같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7: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그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홀연히 임할 재앙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이것이 교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욕심은 정지된 것이 아니며 계속 더 나아갑니다. 그래서 욕심은 만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부모님에게 효도하면 부모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아마 가진 것이 있다면 모두 효도하는 자식에게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시고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9:9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 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 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 나서야 고작 쓸모 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 3:7-11절까지 “영광”이라는 단어를 매 절 10번을 사용해 가면서 이 영광이 결국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그 옛날 모세에게 내린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영의 직분을 맡은 우리가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하늘을 향해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은 뱉은 자에게 떨어짐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릴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서 “진정한 교회는 세상 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서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어, 죽어서만 천국 가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